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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삼국시대 각 집단/군벌의 특성.
게시물ID : history_248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른미르
추천 : 10
조회수 : 143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1/07 13:24:16
원소는 비록 명문의 후예였으나 서출이라는 출신 때문에 차별과 무시를 받아 이를 극복하기위한 수단으로 엄청난 효를 행하여 자신에 대한 여론을 부각시키고 포장시켜 결국 원씨 명문의 수혜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의 관료제도는 서로 추천하고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사족만의 리그와 같은 모습이었다. 사세삼공을 배출한 원씨는 많은 효렴들과 문객들이 원씨에 의해 관직에 진출했기때문에 원씨가 동탁에 의해 박살이 나자 원씨 문생고리들이 원소/원술을 향해 엄청나게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 관계官界에 추천하면 추천자와는 일종의 스승과 제자같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원소는 집단을 형성하였고 뛰어난 정치력과 처세로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대군벌로 성장했지만 불공평한 인재임용과 사족에게만 관대했던 정치인 관치寬治를 행하여 정치의 문란을 가져와 사족에게도 엄격한 정치인 맹치猛治로서 다스린 조조에 의해 결국 멸망당하고 만다. 

이에 반해 조씨 집단은 재력적으로 엄청난 거부였음에도 환관의 후손이라는 컴플렉스로 인해 조숭이 억만금을 들여 태위라는 관직을 사고 조조가 허소를 거의 겁박하다시피하여 난세의 영웅이라는 월단평을 얻어낸 것도 신분적 한계 및 결핍으로부터 결코 무관하지않다. 이러한 신분의 한계는 분명 명가나 사족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영향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조조가 능력위주의 유재시거나 문학으로서 인재를 등용했던 정치를 펼쳤던 것도 결국 사족 그들만의 리그를 철폐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후계자가 된 조비가 진군의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를 채택하게되어 결국 허사가 되었다. 조예는 허명이 있어 부화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도당을 결성하는 무리를 거의 혐오하다시피하고 그들을 관료로써 등용하지않았다. 조예는 유엽으로부터 조조의 풍모가 있고 진황한무(진시황과 한무제)의 모습이 보인다는 평을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했던 이들이다. 하여 그들은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조상 일파는 여러 곳에서 마냥 무능하게 그려지는데 사실은 명가사족들의 권력독점을 막기위해 정책을 펼치려했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사마의 일파에 의해 저지당했다. 

유비 집단은 유협(건달) 출신이었다. 대개 당시의 군벌들의 특색은 유협들이 많았는데 많은 경우, 배경이 좋았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비는 비록 황실의 후예였다지만 그 혈통도 정확히 알기어려울 정도로 방계였고 몰락하여 사실 유비의 유씨라는 혈통이 군벌로서 얼마나 많은 힘이 되었을진 의문이다. 물론 그렇다하여 하나도 도움이 되지않았다라는 말은 아니다. 유씨였기에 친척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노식으로부터 유학할 수 있었고 유협 집단의 두목이 되는데에도 여러모로 도움은 되었을거라 추측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본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통 무명이라 생각하는 유대, 유요, 공주, 교모, 왕광과 같은 이들은 당시 유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있었고 환경도 좋았다. 유비집단은 여러번이나 붕괴되었는데 이는 그 집단의 출신성분이 그리 좋지않아 사족들의 지지를 얻지못해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비가 중앙정부에서 고관을 역임하고 제후로서의 명성을 휘날렸던 여포를 받아들인 것은 유비의 지지도와 명성을 높히기위한 수단이었으나 역으로 여포집단에게 먹힌 것으로 생각된다. 유비가 형주에 정착하기전까진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되었으나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에 정착하면서부터는 형주의 신진사족들의 의탁으로 비로소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는 유비의 인물됨과 맞물려 관료로 진출하려는 형주의 신진사족들과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진행된 것이다. 형주의 유표는 형주에서는 거의 독자적인 왕같은 세력이었지만 중원으로의 진출을 사실상 포기함에 따라 신진사족들의 관료진출은 기존사족들로 인해 어려웠기때문이었다. 사서에선 그저 유비의 정성에 감동한 제갈량이 출사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지만 유비의 그런 면모는 그때가 처음도 아니었고(삼고초려는 처음이었지만) 많이 부정되는 견해이긴 하지만 위략의 내용대로 제갈량 등이 먼저 나서서 유비의 인물됨과 정책 등을 본 후에 유비를 시험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제갈량을 위시한 형주 신진사족들을 유비가 인식하여 제갈량을 삼고초려하여 등용하여 형주 신진사족들을 흡수하여 형주의 상당수 여론을 품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무력만으로 소규모집단을 거느리는게 가능하지만 규모를 더욱 키워 세력을 갖추는 것은 사족이나 호족의 지지를 얻지못해서는 불가능했다. 조조가 순욱의 피라미드(?)로 인해 대군벌로 성장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이다. 아무튼 형주의 또다른 실력자가 된 유비는 유표 사후와 적벽대전 이후, 그리고 익주 공략에 성공한다. 그 후에는 국가를 건설하여 명실공히 국가의 지도자로 부상했는데 관우가 형주를 잃은 후에 유비가 직접 이릉 및 형주로 진공했던 것은 유비 집단의 초창기 특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수많은 형주 인사와 익주 인사들은 유비의 형주 진격을 반대했는데 이는 그들과는 이해관계나 관계가 대부분 없었기때문이다. 

손씨도 비슷한 상황은 있다. 손견은 스스로도 실력자였음에도 원술의 휘하에서 활약했는데 원술의 명성이 자신이 커가는데 분명 필요했기때문이고 손견 사후 손책이 원술 휘하에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손책 사후 손권의 지배력은 급락했는데 이는 손책이 단기간에 강동지방에 대해 무력으로 공격하고 억압했기에 강동호족들이 강하게 반발했던 것이 그 이유이다. 이후 손권은 한나라의 연호를 가장 오래동안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한나라황제에게 선양을 받은 위나라와 유씨인것 자체로도 조씨에게 대항하는 상징이 된 촉나라와는 다르게 오나라는 별다른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손찬은 그의 뛰어난 군재로 말미암아 한때는 원소도 압도하는 대군벌로 성장하였으나 정치력 부재와 사족의 지지를 잃어 결국 원소에게 멸망한다. 공손찬은 상인같은 집단을 중용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그가 사족에게 외면받아 그들을 배척했기때문이지 상인 등의 집단만을 총애해서 그랬다고는 보기 어렵다. 공손찬의 상관이었던 유우는 반대로 군재가 없어서 멸망된 케이스이다. 

삼국시대의 군벌들은 군소군벌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은 일반인 이상의 그릇이다. 우두머리로서 활약했던 영웅들은 어떤 분야 하나라도 뛰어나지않은 것이 없었다. 단지 그들이 대적한 상대들이 워낙 뛰어나 상대적으로 부족해보였을뿐. 멸망당했다고하나 감히 일반인들의 범주와는 견줄수조차 없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위오촉 삼국의 황제는 모두 명족 출신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통일한 진나라는 명족이었는데 어쩌면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당시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여 일어난 것은 아닐까.
조씨가 사마씨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멸망당한 것은 사마씨들이 명문이었기때문에 지지와 중망을 얻기에 유리했던 까닭으로 생각한다. 
출처 blog.naver.com/smh2829/2205903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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