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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공사상과 헤겔의 변증법
게시물ID : phil_115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garjuna
추천 : 2
조회수 : 2112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5/06/01 22:25:45
불교에서의 공은 그자체로의 무가 아닙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없는 것은 불변적 실체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뿐이고 나를 포함한 세상은 연기pratītyasamutpāda일뿐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성의 결과로 나와 타자를 보는 것인데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기초한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에 의하면 이것은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입니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 법(法: 존재)을 공하다(空)고 나는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 인과 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물은 여러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하다. 그런데 이 공함도 또한 다시 공한데, (이렇게 공함도 다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공하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과 공함도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에 의해) "있음(有)"과 "없음(無)"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나기에 중도(中道)라 이름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97%B0%EA%B8%B0_(%EB%B6%88%EA%B5%90)


텍스트를 다시 자세히 읽어보면...
고정된 성품이 없다 -----> 그러므로 공하다(없음) ------> 그런데 이 공함(없음)도 다시 공하다 왜냐하면 "공하다"라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을 벗어가니에 중도라고 이름한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고정된 성품이나 실체가 없기에 공하다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그자체로의 없음nothingness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없음이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자체로 없음이라기보다는 언어에 의해 표현되어진 "가명"으로서의 없음이 되는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이중적 부정의 형식은 헤겔의 자기관계적 부정  다시말해 부정의 부정과 유사한 구조를 이룹니다.  

헤겔에 의하면  최초의 순수존재가 있음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부정되어야 합니다. 있음(순수존재)이 부정(없음)되어야 있게 되는 구조.. 왜냐하면 사실 언어적 규정이전의 순수존재는 규정이전의 존재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있다고 한 순간 그것은 규정이 됩니다. 그런데 그 규정성이 전제하는 것은 있음으로 구별되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간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최초의 부정성이 출현합니다.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고 스피노자가 말한바 있는데 헤겔에서도 규정은 곧 부정입니다. 있음이 성립하는 순간 구별이 성립함을 의미하고 그 구별은 부정에 의한 규정성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최초의 부정에 의해 있음은 없음으로 이행합니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타자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있음이라는 자기동일성은 타자와 자기간의 구별을 통한 동일성인데 이 동일성은 타자에 대한 부정성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어야만 확보되는 있음이죠. 그러나 이때의 없음은 그자체로의 순수한 없음이 아닙니다. 수리적으로 표현하면 +A다음 -A가 나와서 영이되는 (+A) + (-A) = 0 것과 같은 형식논리적 없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때의 없음은 엄밀히 말하면 없음으로의 있음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타자관계인 동시에 자기관계적기에 없음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있음)을 지시하는 순환구조안 포섭되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없음은 "없음이 있음으로서 없는" 것이다.  이때의 없음이라는 부정성은 자기관계적이면서 언어적으로 매개적인 부정입니다.   이런 자기관계적 부정, 매개된 부정을 헤겔은 부정의 부정이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다시 정리하면 부정은 타자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기도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부정 즉 자기관계적 부정입니다. 부정이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는 타자관계와 자기관계사이의 연관을 확보하게 됩니다. 다른말로하면 '연기'가 되는 것이죠. 순수한 있음도 아니고 순수한 없음도 아닌 "중도"라고 표현되는 없음.  

지젝은 헤겔의 이러한 부정의 부정을 정반합과 같은 속류화된 변증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차원적인 종합으로서의 제 3항의 탄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정의 부정은 오히려 부정의 급진화, 부정의 근본화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재확인되는 자기관계는 없음으로서의 있음이므로 그것은 라캉적 상징계(있음)의 균열을 없음이라는 언어로 지시하는 실재계의 공백이 됩니다.  헤겔의 절대지가 지시하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실재계의 공백과 같은 것이되죠. 반성되고 매개된 자기관계적 부정성.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자는 "실체로서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한다"라고 했을때의 반성된 부정성인데 이게 헤겔 변증법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지젝은 구조내의 공백, 상징계의 균열의 지점에 자리잡은 공백에 주체를 위치시키게 되고 이러한 주체에 기초하여 자신의 급진적인 정치적 주체를 제시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지젝의 급진주의 정치학까지 이야기하진 않겠고 불교와의 유사성 혹은 관련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다시한번 정리해봅시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에 의하면 모든것은 공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공은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에 의하면 없음도 있음도아닌 "중도"로서의 공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중도조차도 언어에 의해 표현된 공에 대한 가명입니다. 다시말하면 공이라는 비실체성을 언어적으로 간접표현한 것이죠.  붓다처럼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되기도 하지만 수행의 과정을 통해 이것을 체험할 수 없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공이랄지 중도랄지 하는 언어적 표현으로, 헤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부정의 부정과 같은 언어적 표현으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의 진상 혹은 본질은 그자체로는 알수없지만 언어에 의해서 공, 중도, 물자체, 절대지, 실재계 등과 같이 간접적으로만 표현되는  무엇입니다. 불교는 그것을 번뇌를 버리는 수행과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중관사상같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득할수있다고 본 것이고 ,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반성철학을 통해,  헤겔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논리를 통해,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명확히하는 언어적 전회를 통해 이 세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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