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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필이지만 선조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3)
게시물ID : history_115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2
조회수 : 1437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9/09 10:51:50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선조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자신의 즉위 배경에 기인합니다,
 
그는 무언가 해보려고 해도 할수가 없는 뒤를 받쳐줄 세력이 전무한 현실에 따라 철저하게 신권을 이간질 시켜 무너뜨리고 또 토사구팽하며 자신은 늘 그 사건으로 부터 한 발을 뒤로 뺀채, 철저하게 신하들이 서로 물어뜯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선조는 복종을 얻었지만 반대로 충성을 얻지는 못하였지요, 충성을 하려고 해도 기다리는 것은 토사구팽이요, 비참한 말로이니 누가 앞서 충성을 다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유교 질서가 뿌리 깊은 조선에서 일어날래야 일어날수 없는 일이 벌이집니다.
 
바로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신하들의 상소가 그것입니다.
 
유학(幼學) 남이순(南以順)·송희록(宋希祿)이 상소하여 백성들 뜻에 의해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니, 비망기(備忘記)로 일렀다.
 
“전에 동궁으로 하여금 전단(專斷)하게 하도록 전교하였으나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한갓 말뿐이었겠는가.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평소 고질이 있어 날로 심해지는데 40이 되도록 죽지 않을 줄은 평소 생각조차 못했었다.
 
근일에는 두눈이 침침하여 곧 장님이 될 상황이니 비록 그대로 왕위에 있고자 해도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으니 마땅히 전의 뜻에 따라 근신(近臣)을 보내 내 뜻을 유시(諭示)하여 모든 크고 작은 일을 먼저 결단한 후에 아뢰게 하라. 이곳에서는 다만 사대(事大)와 청병(請兵)하는 일 하나만을 조치할 것이니, 이 역시 적을 토벌하는 일이다. 내선(內禪)하는 일 또한 나의 평소 뜻으로서 즉시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이 중국과의 경계여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이지 감히 욕심을 내어 무릅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마땅히 적을 섬멸하기를 기다려 시행해야 하니, 이런 뜻을 아울러 알라.”
 
선조 실록 25년 기사
 
비단 이것은 그의 정치 스타일의 문제만은 결코 아닌것은 사실입니다,
 
전쟁 와중에 국가와 사직을 뒤로하고 피난에 열을 올린것이나 (명으로서도 뭔가 이득이 되야 망명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이건 답이 없는 터라, 양위를 빌미로 명으로 망명 신청을 하려하자 압록강 일대의 배를 모두 치워버리고 시종 십 수명만을 거느리고 건너오라는 즉 암묵적으로 오지 말라는 의사표시를 합니다.)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의 단연코 수탈과 행패의 TOP를 찍은 행동들도 그 원인이기는 할것입니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이제 평양을 이미 탈환하여 명나라 군사가 전진하니 부흥을 기약할 만하다. 다만 거리가 점점 멀어져 소식을 듣거나 책응(策應)하는 등 여러 일이 이 한 모퉁이에 있어 모두 그 편의를 잃었다. 과매(寡昧)한 사정은 지난번에 이미 모두 다 말하였다. 날이 갈수록 병이 고질화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심해지니 하루라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위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라고 늘 말하면서 변명하는 자같이 하겠는가. 거기다가 요즈음은 중국 관원을 접대하는 일 때문에 추위를 무릅쓰고 애를 썼더니 한질(寒疾)이 더욱 심하여 전진하기에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니 승지를 보내어 어보(御寶)를 받들어 먼저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한 다음 빨리 안주(安州)로 나아가도록 하여 협력하여 책응하는 것이 옳다. 나는 뒤를 따라서 출발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26년
 
 
또한 양위를 요청받은게 조선 왕조를 통틀어 물론 선조만은 아니지만 문제는 선조의 태도입니다, 선조는 철저하게 이 것을 정치적인 도구로서 사용했습니다, 임진왜란중 유난히 부도덕하며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선조의 행각중에 단연코 가장 으뜸은 이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인데, 임진왜란 7년을 통틀어 선조가 양위를 뜻하는 선위를 사용한 기록은 물경 20여회가 넘습니다.
 
임시 또는 섭정이라는 단서 하에 수차례 행하여진 이 행위는 명나라의 질책을 피하는 데에도 요긴하게 활용되었으며 앞서 언급된 이간책에 더하여 충성을 끊임없이 재 확인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여기서 선위에 찬성하면 역적도 이런 역적이 없는 신료가 되니 모두가 업무를 중단하고 정청을 열고 모여 선위의 부당함을 목에 피가 맺히도록 부르짖었어야 했으며 그것은 태자인 광해군도 피할길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국난을 극복해야 되는 이 시점에서 조차 선조에게 중요한것은 자신의 손에 쥔 왕권과 자신뿐이었지요.
 
 
좌의정 윤두수, 예조 판서 윤근수,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 대사헌 김응남(金應南), 아천군(鵝川君) 이증(李增), 병조 판서 이항복, 이조 판서 이산보, 이조 참판 구사맹, 우참찬 성혼(成渾), 형조 참판 이희득(李希得), 좌윤(左尹) 정언지(鄭彦智), 예조 참판 이충원, 병조 참의 신점, 대사간 이해수(李海壽) 등이 아뢰기를,
 
“삼가 또 온편치 못한 전교를 내리신 것을 받으니 신들은 황공하고 민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앞뒤로 하유(下諭)하신 말씀의 뜻이 정녕하니 신들이 어찌 성의(聖意)를 따를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회복하는 일이 이미 단서가 열렸습니다. 신속히 옛 도성(都城)을 소청(掃淸)하는 것이 며칠 안에 있을 것입니다. 제반 책응의 일은 모두 전하께 품(稟)하여야 하니 조종(祖宗)의 신민(臣民)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것을 의논하도록 하실 수 있겠습니까. 유 원외(劉員外)와 원 주사(袁主事)가 한번 전하의 거동과 조처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지금 유 원외와 원 주사가 바야흐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이미 먼저 갔는데 만약 이 거사(擧事)가 있었음을 듣는다면 반드시 서로 놀라고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명나라 황제가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고 하여 특별히 명장(名將)을 보내 날랜 군사 수만 명을 통솔하여 왜적을 정벌, 섬멸시켜 강토(疆土)를 수복하도록 기약하였습니다.
 
지난 역사를 낱낱이 살펴 보아도 중국이 외번(外藩)을 대우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성대한 거사가 있었겠습니까. 황제가 부흥시키는 것으로 전하에게 각별히 기대하니, 이것이 어떠한 책임이겠습니까. 더구나 진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이제 시작되었는데 이런 전교를 내리십니까. 아직 책봉(冊封)하는 주청(奏請)도 없었는데 갑자기 전위(傳位)하는 주청을 한다는 것은 사체(事體)를 헤아려 보아도 매우 미안합니다. 재삼 생각하시어 거행하라는 명을 빨리 중지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이 어떤 때인데 말만 하고 있는가. 다시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말고 속히 절목(節目)을 강구하여 교서(敎書)를 짓게 하라.”하였다. 
 
 
선조 실록 26년 기사
 
 
윤두수 등이 세 번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실록 26년 기사
 
 
 
세자가 새벽에 대궐에 나아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신이 어제 엎드려 호소하였으나 아직까지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물러가서 삼가 생각하니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듯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어리석고 용렬함을 다시 하나하나 거론하여 성청(聖聽)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국사로 말씀드리면 노적(老賊)이 아직 변방 지역을 점거하고 있으므로 흉악한 계략을 예측할 수가 없고 중국 장수는 도로에 잇따라 왕래하므로 접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옛것을 복구하고 떠도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비록 성상의 큰 덕과 지극한 인(仁)으로서도 잘 해낼 수가 있을지 걱정이 되는데, 더구나 신처럼 용렬하고 불초한 자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아무리 반복해서 헤아려 보아도 결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죄를 얻는 것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종사(宗社)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며 백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미한 성의를 제대로 아뢰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신이 무상(無狀)한 탓입니다. 움츠려지고 떨려서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 성은(聖恩)을 베푸시어 속히 허락한다는 한 말씀을 내려주소서. 황공하고 망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 땅에 엎드려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지금 역수(曆數)2038) 가 세자에게 있으니 세자는 사양하지 말라. 나는 실로 병이 고질이 되었으니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하루만이라도 물러나 쉴 수가 있다면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나와 세자는 마음이 서로 통하는데 아직도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날씨가 좋지 않으니 빨리 돌아가서 잘 조섭하도록 하라.”하였다.
 
선조 실록 26년 기사
 
 
선조가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이순신을 해임하고 원균을 투입하는 등 신하들을 이간질 시키고 그 들을 꺾는 행동들은 뜻을 이루기에는 심히 비루한 자신의 배경이 문제였다고, 태자를 박대한 행동들은 왕과 태자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떠나 권력이라는 하나의 열매를 두고 대립하는 관계가 될수밖에 없는게 사실이라고 옹호가 가능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각은 옹호할수가 없는게 사실입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직과 국가가 무너질 위기에 봉착한데다, 그 국난을 타고 재야의 인재들이 두각을 보인것은 신권에 대한 어찌보면 히스테릭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그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기에 이렇듯 극단적인 면모를 보인것일수도 있습니다만 그는 필부가 아니라 한 국가의 수장입니다.
 
그렇기에 임진왜란 이후의 무능력한 모습은 감출수도 옹호할수도 없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된 문제는 다음 글에서 또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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