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못 봐서 장님 지렁이
팔다리도 없어서 병신 지렁이
모가지가 잘려도 살고
또 살아가고
이빨도 발톱도 없어 물지도 할퀴지도 울지도 못해서
울지도 못해서
밟아도 밟혀서 속이 터져도 그저 꿈틀 한 번 하고 떠났다
지렁이 지렁이 병신 지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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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써 봅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요즈음 당신 얼굴이 이상하게 창백하다고, 제발 병원에 가 보라고 몇 달을 사정하신 후에야 찾아간 병원에서 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절반이 훨씬 못 되는 헤모글로빈으로 살고 계셨다더군요. 의사 선생님은 저희 아버지가 그런 몸 상태로 대체 어떻게 살아 있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앞으로도 3 개월 이상 살면 기적이라는 말도 하셨고요. 그래도 저희 아버지는 꽤 오래 사셨습니다. 제 기억에 1년 조금 더 사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엄청난 게으름뱅이에, 엄살쟁이에, 무디고 둔한 분이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선 불쌍하지만 가장으로선 존경스럽지 않은 사람이었죠.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하신 후 아버지가 회사에서 잘린 후로 제가 태어나기 2년 전까지, 아버지는 오랫동안 백수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는 그 동안 어떻게든 생계를 꾸리셨습니다. 패물도 아버지 몰래 처분하셨고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가 어머니의 결혼 반지를 잃어버린 것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자랐습니다.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도 서투셨습니다. 혼내고, 놀리고. 그래도 그 이상으로 저를 아껴주셨습니다. 놀아주시고. 부모님이 운영하던 작은 치킨집 뒤에 제가 놀 수 있는 평상을 만들어주시고.
그런 분이 항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예방접종 주사도 무서워하셔서 어린아이처럼 병원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던 아버지가, 치킨을 튀기다가 기름 한 방울만 손등에 튀겨도 가게를 뛰쳐나가 겨울 바람에 꽁꽁 언 쇠파이프에 손등을 대고 계시던 아버지가.
화 한 번,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치료를 견디다 돌아가셨습니다.
막대사탕 하나면 담즙을 빨리는 곰처럼 미련하게, 제가 대학교 입학하고 졸업하는 걸 꼭 보고 싶으시단 이유만으로 견디다가.
완벽함과 거리가 먼 분이라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작 아버지 돌아가실 때엔 눈물 딱 한 방울 흘린 게 전부였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아버지가 보고싶습니다. 수험생인 자식을 배웅하는 아버지들을 볼 때, 친척의 결혼식 때, TV에서 아버지와 첫 쇼핑을 나온 또래의 여자애가 나올 때. 자꾸 그리울 일이 생길 때. 아직도 아버지의 번호를 휴대전화 전화부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