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월 ##일
골목에서 덕선이를 우연인척 만났다.
그 애의 하얀손에 들려있는 하얀봉투...
봉투에는 뭐가 들었고 어디로 갈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덕선이는 그렇게 택이와 나를 엄마처럼 챙겨왔다.
그런데 오늘은 살짝 질투가 났다. 택이새끼의 뜬금없는 선포때문인가???
장난처럼 다가가 붕어빵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한 팥고물이 뜨겁게 입속을 자극했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우리 동네에서 덕선이의 붕어빵을 처음먹은 것은 내가 아는한 나다.
택이도 정환이도 선우도 아닌.... 나다.
쓰다보니 씁쓸한 웃음이 난다. 그깟 붕어빵이 뭐라고...
88년 ##월 ##일
경찰서에 갔다.
비참했다.
여지없이 친구들이 왔다. 엄마 아빠도 왔다.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골목에서도 항상 조연인 나에게 오랜만에 관심이 쏟아졌다.
사고는 괴물같은 놈들 사이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장난이 덕선이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듯이...ㅠㅠ
그들의 관심에 집중할수록 점점 내 삶엔 관심이 없어진다.
점점 더 비참해진다.
94년 ##월 ##일
몇일째 잠이 안온다.
포레스트 검프를 본날 덕선이는 잘 들어갔을까?
잠깐이나마 같이 있고 싶어서 차에 태웠지만 그러는게 아니었다.
그냥 바람맞았을꺼라 생각했는데 왜 다른 여자와... 또 하필 그자리에 내가 있었을까? 나쁜놈
라디오에선 DJ가 의미없는 사랑공식을 읊어대고 있다.
사랑은 타이밍이고 1%의 확률에 승부를 걸어야 한단다.'
웃기는 이야기다.
승부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견뎌낼 자신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
그 1%의 확률 때문에 난 20년째 진담같은 농담조차 못던졌다.
나의 고백으로 덕선이와 서먹해져서 그애를 못 볼지도 모른다는 그 1% 때문에....
눈을 감고 잘했다고 애써 자위해본다.
그날 달려가지 않음으로써 나는 덕선이가 늙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94년 ##월 ##일
미친새끼.. 나는 미친 놈이다.
일을 마치고 문을 닫으려는 데 덕선이가 왔다.
회식에서 한잔하고 왔다는 그녀의 볼에는 사과꽃이 피어있었다.
덕선이는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오늘따라 말이 많았고 나는 그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니 계속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야 했었다.
택이 이야기,정팔이 이야기만 하는 덕선이가 너무 야속했다
탁자위에 소주뚜껑으로 반지를 만들어 덕선이 손에 끼워주며
"이제 나도 좀 봐 주지?"라고 했다. 정말 이 말만 했다.
덕선이가 살짝 쳐다보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럽게 소리내어 울던 덕선이가 조용히 일어나 가버렸다.
그렇게 걱정하던 1%... 그날이 온거같다.
장난이 지나쳤었다고 이야기하면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