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한 아이. 하물며 살갑지도 않은 까칠한 아이.
그런 니가 엄마가 친정 다녀왔을때 상대적 허탈감을 느끼자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동룡의 조언을 얻어
형의 손을 냄비에 지지(이건 좀 너무하더라 ㅋㅋ)고 엄마를 불렀으며, 아버지가 연탄 갈고 있는 현장을
가서 우산으로 밀어 박살을 내고 다시 엄마를 불렀지. 덕분에 엄마는 친정가기 전의 엄마로 되돌려놨었어.
아빠는 모든 가족들이 자신의 말이나 이야기에 관심 없음을 느끼자 의기소침해진 날이 있었지.
그때도 넌 동룡이에게 조언을 얻어 그렇게 질색을 하던 "아이고 김사장 반갑구만 반갑습니다"를 했었어.
덕분에 엄마가 가져다준 김치는 안먹고 라면만 먹으며 버티려던 아빠 마음을 녹여 지상최고의 조합이라는
김치라면을 먹게 해줬지.
목걸이 문제로 학교 선배가 선우에게 뭐라고 하자 "그거 잠깐 점 빼면 안돼냐?"며 까칠게 굴던 너는
3인방과 영화를 보러가고 결국 동룡아버지에게 걸려 영화를 못보고 돌아오는 길에 학주의 일방적 선우사랑에
그 선배에게 밑보이게 되고 패륜적인 말을 씨부릴때 아구창을 날리며 "뚫린 입이라고 말이면 단줄 아냐"고 했었지.
부모님 여행 가실때 여권 영문이름이 잘못되어 바꿀때 전화 걸어 엄마에게 영문이름을 물어봤고
영어를 모르던 엄마는 뻘쭘하게 말하며 혀를 내밀곤 "나 사실 영어몰라 아들 미안"하는 엄마에게 조용히
야식을 사들고 들어가 건내주곤 나왔었지. 그리곤 그 여권에 한글로 엄마의 영어이름을 써줬고 말이야.
수학여행 간날 기억하니? 덕선이와 벽에 낑겼을때 썸을 타기 시작한 후, 넌 덕선이를 많이 좋아 했었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넌 여전히 행동으로 보여줬지만, 덕선이는 그게 와닿지 않았었지.
이후로 소개팅 가냐고 묻는 덕선이에게 "가지마 소개팅"을 일갈한 후, 덕선이도 니 마음을 알게 되었을거야.
근데 웬열? 택이가 덕선이를 여자로 좋아한다네? 넌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사랑을
밀어내기 시작했어. 그래 사람마다 감정이 다를수 있지만 한참 우정에 목메는 시점이 중고등학교 시절이지.
사랑보다 우정일수 밖에 없었던 걸까? 넌 결국 덕선이의 대시를 계속 밀어내고 있었고 집요하게 이문세
콘서트장을 가자는 덕선이의 말에 더이상은 뺄수 없었을거야. 난 그렇게 니가 덕선이를 받아줄거라 생각했고
유일하게 너에게 셔츠를 선물한 덕선이 마음을 니가 모를리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정봉이 미옥에게 선물받은
덕선이가 너에게 선물한 똑같은 셔츠를 입고 나온 날, 덕선이는 너무나 화가 났을거야.
그런 덕선이한테 변명을 못한 너 자신에게 더욱더 화가 났겠지.
대학진학 문제로 엄마에게 실망을 준 덕선이는 계단에서 울고 있었어. 그런 덕선이에게 갈까 말까 망설이다 가려는데
그때 택이가 덕선이를 부르지. 그런 모습을 보고 넌 미련없이 니네집 대문으로 들어 갔어. 아팠니? 아팠지?
택이가 덕선이와 영화 보기로 하기 전 넌 실수로 택이 집에 지갑을 놓고 왔어. 그러고 나서 택이는 덕선이와 영화를
안보게 되었지. 알잖아? 택이는 친구들과 약속을 어기지 않아. 항상 까먹는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뭐하나 까먹은 적이 없지.
피자 먹고 싶다면 피자를 사왔고 양주 먹고 싶다고 해서 그것도 가지고 왔었으니 결과적으로 생각으론 까먹긴 해도
약속 날자에 약속한걸 어긴적은 없었지. 그런 아이가 덕선이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 아이가 덕선이와 영화약속을 깼다는건
상상할수 없었을꺼야. 그래서 애들과 축구하러 간날 택이 한테 물어봤던거 아니니? 그리고 택이의 말이 거짓말이란걸 알지
않았어? 거기서 넌 더 힘들었을거야. "이 녀석도 나만큼 힘들게 참고 있구나"하고 말이야.
선우가 덕선이를 좋아한다고 느꼈을때도 둘 이야기를 엿들을 만큼 니 마음은 불안했고 동룡이와 덕선이 둘이 있는 모습만 봐도
둘이 뭐하냐며 묻던 니가 유일하게 덕선이가 택이한테 갈땐 힘든 표정만 짓고 이야기 하지 않는데 내 속이 다 뭉글어지더라.
그렇게 세월이 흐른 94년 택이 생일날 니들은 다시 택이 방에 모였어. 서로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
과거와 달라진게 있다면 고등학생시절엔 늘 라면에 택이가 가끔 사다준 피자를 먹었다면 이젠 맥주를 마실수 있었단 사실이야.
5년의 세월이라면 글쎄 나같아도 첫사랑의 기운을 잊어버렸을거 같긴해. 그러나 내가 한가지 간과한게 있더군.
너와 덕선이는 단 이틀만에 5년을 워프했어. 그러나 난 그걸 받아드릴 준비하는데 고작 이틀밖에 주어지지 않았지.
서로 좋아하는건 감으로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5년의 세월에 흐릿해지는 첫사랑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잠시 그 생각을 망각했던거야.
덕선이 남자친구를 극장에서 본 너는 이승환 콘서트장 혼자 가있을 덕선이 생각에 포레스트 검프와 동룡이를 과감하게 버리고 달려갔어.
그래 어쩌면 이때가 너에게 마지막 온 기회였을지 몰라. 덕선이를 좋아해서 간건지 너의 츤츤한 우정 오지랖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넌 조바심을 가지고 달려갔어. 그때 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참 아팠겠지? 그래 우정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미련이었나봐.
그리고 뒤늦게 계단에서 울고 있던 덕선이에게 다가가려 했을때도 오늘도 넌 그 누구도 모르게 뒤돌아 설수 밖에 없었을거야.
차안에서 너 혼자 곱씹었던 말들 기억하니? 타이밍이 늦었다고 생각했지? 난 이때 잠시 실망했어. 고작 타이밍 때문일까?
아니야 넌 덕선이한테 고백할 시간이 충분했어. 첫 데이트 아닌 데이트한날 덕선이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내가 왜 왔는지 생각해봐"라고 했던 날도 니 입으로 말했으면 됐을거고, 덕선이가 소개팅 하냐고 묻는날도 그랬고
잼콘서트장 가서 사진 찍었을때도 말할수 있었어. 이때만 해도 택이가 덕선이를 좋아하는지 몰랐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과연 타이밍만의 문제였을까? 항상 타인을 배려하지만 무뚝뚝한 너의 마음을 덕선이는 알길이 없었어.
게다가 셔츠에 대한 오해도 풀지 못했고 말이야. 하지만 뒤늦게 택이가 대국을 포기하고 이승환 콘서트 가서 덕선이를
만난걸 알고 넌 눈물을 흘렸지. 그리고 나의 절실함 보다 택이의 절실함이 더 컸다고 깨끗하게 인정을 했어.
택이에게 대국 포기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야. 아빠와 친구4인방을 제외하곤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기도 했었는데
그걸 포기할만큼 덕선이에 대한 절실함이 너를 넘어섰다고 느꼈던거지.
잠시 실망할뻔했던 와중에 마지막 너의 절실함이 택이보다 못하다고 했고, 너 자신이 결국 용기가 없어서 얻지 못했다고 인정
했을때 너란 놈 정말 멋지더라.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 덕선이와 택이의 행복을 위해서 넌 역시나 그 오지랖을 버리지 못하고
과감하게 첫사랑의 족쇄를 벗어 던지기로 마음 먹었던것 같아.
결국 넌 그 동안 고백하지 못했던 너의 진심을 술집에서 친구들과 만나 장난삼아 덕선이에게 고백했고, 덕선이의 미묘한
미소는 본인도 알고 있었단 의미였을거야. 너와 덕선이만 알수 있던 추억속의 이야기를 다른 친구들은 모르기 때문에
웃으며 넘겼지만, 덕선이만은 니가 말한 모든 이야기가 그 당시 진심이었단걸 알기에 그런 미소를 지어줬던거겠지.
"맞아 그때 정환이가 그랬어.."라며...
그렇게 씁쓸한 고백을 하고 난 뒤, 넌 사천으로 내려갔고 택이는 너를 만나 "사실 그때 지갑"이라고 말하자
"야 언제적 이야길하냐? 여러사람 피곤하게 하지말고 덕선이 잡아" 했을때, 좀 감동적이더라.
덕선이에겐 단 한번도 고백 못했던 니가 택이가 나쁜놈이길 소원으로 빌었을만큼 니 사랑도 절실했을텐데
니 마음을 놨다는 표시로 택이에게 덕선일 잡으라고 말하는데 와.. 정환이 너 정말 덕선이를 놨구나 생각에
지금까지 너라 믿었던 내가 너한테 한방 먹은 기분이었지.
만일 택이가 사천에 내려가서 널 만난날 니가 덕선이에 대한 마음을 접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택이도 너에게 덕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러 간건 아닐까? 어쨌든 넌 깔끔하게 택이에게 덕선이를
잡으라고 했고, 덕분에 덕선이와 택이의 사랑은 순탄하게 이뤄지게 되었지.
비록 내 예상은 틀렸고 정환이 너는 사랑을 잃었지만, 친구는 잃지 않은 방법을 선택했고, 그에 따른 너의 행동엔
후회가 없어 보였기 때문에 난 정말 행복했다. 사실 니가 아쉬워하거나 힘들어 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모싸고 밑딱지 않은 기분이었을거야. 난 오히려 기존 응답시리즈를 예측하고 너도 누군가와 연결되겠거니 했는데
아주 담백하게 잘라버렸어. 보라 결혼식날 와서도 택이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불편해 하지 않는 니들 모습 보면서
그래 정환이 너는 첫사랑을 진심으로 놨고 후회 없이 장난고백도 했던걸로 너 자신과 쌍문동 친구들을 지켰던것 같아.
누군가는 아쉬워하고 누군가는 슬퍼하고 누군가는 아파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정환이 니가 결국 모든 이들을 챙겼고 배려했으며 후회없이 고백도 하고 그 첫사랑의 족쇄를 벗어버렸기 때문에
사랑을 잃은게 아니라 우정을 지켰던거라 생각해. 그래 넌 아무것도 잃은게 없어.
너란 녀석 표현은 서툴지만, 처음부터 모든걸 지키고 싶어 했던 모습답게 끝까지 배려해준 넌 참 멋진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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