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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Massacre in Korea '신천 학살' 혹은 '신천군
게시물ID : history_250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5
조회수 : 110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1/18 11: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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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거다...가 우세했지만

요즘은 한국내 좌우대립중에 벌어진 참사로 많이들 애기하시더군요


http://www.huffingtonpost.kr/2014/09/30/story_n_5905104.html

이것은 피카소가 그린 반공청년단의 학살이다

게시됨: 2014년 09월 30일 18시 08분 KST 업데이트됨: 2014년 09월 30일 18시 22분 KST




massacre in korea

이것은 피카소의 그림이다. 제목은 Massacre in Korea이다. 해석하자면 '한국의 학살'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도에 이 그림을 그렸다. 1950년에 발생한 '신천 학살' 혹은 '신천군 사건' 소식을 듣고 나서 그린 작품이다.


신천 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1/4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신천 학살이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당시 서구 사회는 경악했다. 


파리에 머물던 피카소가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게르니카'를 그렸던 것처럼, 신천 학살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말이다.

오랫동안 피카소의 그림 속에 갇혀 있던 신천군 사건이 한국에서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2001년 소설가 황석영이 신천군 사건을 소재로 한 '손님'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이 소설에서 신천군 사건은 기독교 우파와 좌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벌어진 일로 묘사됐다.

지난 2006년 한겨레신문이 인용한 이북5도민회 산하 신천군민회의 '10·13 동지회’는 신천군 사건, 혹은 신천 학살은 "신천군내 반공청년들"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지회 회원 중 한 명은 "미군이 오면 빨갱이를 살려둘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에 나선 것"이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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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B2%9C%EA%B5%B0_%EC%82%AC%EA%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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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한국 전쟁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조사위원회는 북한 정부의 요청으로 북한 땅을 방문, 평안도와 황해도강원도 등 북한 지역을 돌며 ‘코리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1] 조사위원회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의 이른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한 조사 작업을 증거수집에 천착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고, 1952년 3월 31일에 작성한 보고서의 ‘제4장 대량학살, 살해 및 기타 잔혹행위’에서 이들은 황해도 신천의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 7일,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해리슨(신천 미 점령군사령관)은 그의 휘하에 있던 미군 부대와 이승만의 원군 장교들에게 철수는 ‘일시적’이며 ‘전략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주민들에게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하라고 명령했다. ‘남아 있는 자는 모두 실질적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이다.’ 그는 모든 ‘빨갱이’ 지지자들을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인민군 병사의 가족들과 부역자 가족들은 빨갱이로 간주되었다. 그의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날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했다. 건물 안에는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 있었다. 미군들은 이들의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건물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두 아이를 창 밖으로 밀어냈다. 한 아이는 총에 맞았지만 한 아이는 도망쳤다.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다. 해리슨과 다른 장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2]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작성한 해당 보고서를 들어 북한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미군이 점령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 예하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신천군 한 군에서만)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음을 주장하였고[3] 희생자 대부분은 좌파 운동가들의 가족이었다고 주장하였다.

2001년 11월,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서 한국 전쟁 중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59구의 유해가 새로 발굴됐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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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08/005000000200308062253088.html

‘신천 비극’ 좌우대립설 설득력


△ 이북 5도민회 소속 신천군민회 등 월남자들은 이런 북한 주장에 대해 ‘과장됐다’고 말한다/ 신천박물관 해설강사가 1950년 10월에 벌어진 ‘신천대학살’의 전체규모를 설명하고 있다.

반공청년단 주도 증언…미군 묵인 가능성

미군에 의한 학살인가, 국내 좌우 대립의 상처인가

북한은 신천 대학살이 ‘해리슨’을 중대장으로 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한 내부에서는 이 주장보다 ‘좌우 이념 대립의 결과’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런 주장은 특히 작가 황석영(60)씨가 2001년 5월 장편소설 〈손님〉을 발표하면서 크게 힘을 얻었다.


〈손님〉은 신천 대학살의 당사자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외래 손님’에 물든 사람들을 꼽는다. 이들이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서로 피를 보는’ 악순환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황씨는 1989년 신천을 방문한 경험과 199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서 신천 학살과 관련된 사람을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신천 문제’를 소설화했다고 한다.


신천 대학살을 다룬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망각의 전쟁편〉(2002년 4월 방영)도 ‘좌우 대립의 결과’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작품을 만든 조준묵 피디는 “당시 미군은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어 신천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며 “‘미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밝힌다. 


그는 이어 “신천지역에 반공청년단이 꾸려지고,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면서 이들을 추인했다”며 학살은 이들 반공청년단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현재 이북5도민회 산하 신천군민회에는 ‘10·13 동지회’가 꾸려져 있다. 1950년 10월13일 신천군내 반공청년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동지회 회원인 오준식(가명·70)씨는 “신천 사건의 발단은 북한 쪽에서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당시 북한 진영이 후퇴하면서 지주 등을 예비검속으로 검거한 뒤 처형했다”며 “반공청년단 등이 이에 맞서 10월13일 봉기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군이 오면 빨갱이를 살려둘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에 나선 것”이라고 학살의 경과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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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uffingtonpost.kr/2014/09/30/story_n_5905104.html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08/0050000002003080622530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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