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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가용??ㅡㅡ;;
게시물ID : freeboard_1161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땡땡이빤쮸
추천 : 0
조회수 : 147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04/12/09 09:41:39
8월 19~21일의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몇 주일이 지나는 동안 자칭 트로츠키주의 정치조직들 가운데 국제볼세비키그룹(IBT)만이 유일하게 다음 사실을 인정했다: 쿠데타의 실패로 소련 노동자국가는 종말을 고했다. 쿠데타 실패 이후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우리의 견해가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했다. 쿠데타 실패 며칠 후 옐친의 지시에 따라 고르바초프는 소련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했다. 소련인민대의원대회는 표결을 통해 자체 해산을 결정했다. 12월 옐친은 소련의 해체와 소위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구성을 선언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와 상의도 하지 않고 이 중요한 사안들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연방 정부의 모양새를 갖추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무시당했다. 성탄절에 그는 소련의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크렘린궁에 게양되었던 소련 국기는 내려졌고 대신 같은 날 저녁 짜르 시대의 러시아국기가 올라갔다. 고르바초프가 짐을 싸서 나가기도 전에 옐친은 대통령 집무실로 이사를 했다. 

소련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소련의 주요 정치기관들은 무장 저항 없이 해체될 수 있었다. 기가 꺾였으나 그래도 국가기구를 방어하려던 "강경파"는 최후의 필사적인 정치 도박을 감행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패망하고 말았다. 이들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에필로그(후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붕괴되고 있던 국가경제에 대해 옐친은 지체없이 전면전을 감행했다. 1992년 1월초 그는 식량을 비롯한 다수 품목들에 대한 국가 보조금을 중단시켰다. 이 결과 물품 대부분의 가격이 몇 배나 뛰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중앙 집중적 계획을 무정부적 시장질서로 대체하려는 시도의 첫걸음에 불과했다. 이에 대중은 즉시 저항했다. 이들의 반응을 측정하기 위해 옐친이 전국을 순회했을 때 그는 분노한 군중들과 대면했다. 우즈베크의 수도 타쉬켄트에서는 식량폭동이 발생하여 학생 여러 명이 사망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에 붉은 광장에서는 노동자, 군인, 구 관료들이 새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크렘린궁 앞에는 5천 명의 군대 장교들이 모여 군대를 민족 단위로 분할하려는 옐친의 계획에 항의했다. 2월 모스크바에서는 쿠데타 이후 최대의 시위가 벌어져 5만여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권에 반대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구성은 대단히 잡다했다. 시위대 일부는 붉은 깃발과 레닌, 스탈린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극우 자유민주당을 비롯해 왕당파와 유태인 배척주의자들도 뚜렷이 눈에 띄었다. 현재 코커서스 지역은 소련의 붕괴 이후 민족간 살육의 전장이 되고 있다. 한편 옐친은 새로 수립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정권과 북해 함대의 처리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를 보면 구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는 길은 결코 순탄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옐친의 "물가 개혁"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스타 교수인 제프리 작스의 충고에 따른 것이다. 삭스는 지난 몇 년간 폴란드에 시장 개혁을 도입시켜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장본인이다. 물가 개혁은 국가의 예산 적자를 줄이고 루블화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과거 계획경제에서는 시장이 아니라 경제계획 부처의 사회경제적 결정에 의해 상품 가격이 정해졌다. 루블화는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 노동량에 따른 배급표였다. 일반화된 상품생산체제를 확립하고 국내시장을 세계시장에 개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품 교환 비율을 확립할 보편적 등가물이 필요하다. 이것이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충고이다.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공화국들은 어떤 조건으로 제국주의 "국가 그룹"에 합류할 것인가? 소련의 노동생산성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언제나 크게 뒤 처졌다. 소련의 제품들은 가격이나 품질에서 서방의 제품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서방의 자본가들은 러시아보다 선진적인 폴란드나 구동독의 생산설비에 대해서도 투자를 꺼리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산업시설이 외국 자본가에게 팔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러시아의 "기업인"은 기존의 국가산업시설을 접수만 해서는 돈을 벌기 힘들다. 대대적으로 생산시설을 현대화하고 업그레이드해야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외에서 자본이 투입되어야한다. 그러나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새로 등장한 주요 경쟁국을 위해 돈을 쏟아 부을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서방이 구소련을 위해 책정한 "원조" 액수는 "악의 제국"과 전쟁하기 위해 매년 책정된 예산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액수는 옐친이 저항하는 대중을 통제하는데 드는 비용 정도에 불과하다. 구소련을 위한 마셜 플랜(Marshall Plan)의 재(再)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와 프랑크푸르트 주식시장의 약탈자들에게 구소련의 영토는 가치가 없지 않다. 소련은 석유와 목재 생산에서 세계 제 1위였다. 또한 광물자원, 금속, 곡물 등이 풍부하다. 서방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소련 인민의 교육수준은 높다. 따라서 시장 및 노동착취 잠재력은 엄청나다. 그러나 현재 제국주의자들은 구소련을 주로 원료 및 농산물 생산자로 그리고 미국, 유럽, 일본에서 생산된 제품의 소비자로 바라볼 뿐이다. 자본주의 복귀와 함께 기존의 산업체계가 해체되면 구소련 공화국들은 선진국이 아니라 제 3 세계 국가에 전형적인 경제적 종속과 후진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러나 구소련은 제 3 세계 국가가 아니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은 짜르 제국이었던 소련을 제국주의 착취질서에서 해방시켜 후진 농민국을 공업 강대국으로 변모시킬 기초를 놓았다. 혁명 당시에는 80%가 넘는 인구가 농촌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60%를 넘는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구소련이 국제자본주의 분업체제에 다시 합류할 경우 철강, 기계류, 군사설비, 소비재 등 경제의 모든 분야가 붕괴할 것이며 공업에 의존하는 수천만 노동자들이 궁핍에 빠질 것이다. 

소련의 해체로 수립될 민족국가들은 제 3 세계 국가로 전락하기 전에 먼저 대중의 분노와 폭발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자유시장 "충격요법"으로 인해 대중적 분노가 계속 증대할 경우 옐친은 쉽게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 이미 그는 대중의 압력으로 악랄한 경제 개혁 일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옐친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 역시 옐친만큼 자본주의 복귀에 열을 올릴 것이다. 다만 전술과 시점에서 그와 차이를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반혁명을 분쇄하고 노동자 혁명을! 

노동계급은 반혁명의 대세를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사회 세력이다. 그러나 이들은 수십 년간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지금 혼란과 사기 저하에 빠져있다. 그러나 극도로 허약한 옐친 정권은 대중 투쟁의 폭발과 함께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구소련 혁명가들은 물건의 가격을 멋대로 올려 폭리를 취하고 식량을 사재기하는 자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민영화 정책 전반에 대항하는 무기로 전환시켜야 한다. 노동계급의 직장과 거주지역에서 위원회를 조직할 경우 1905년과 1917년의 소비에트를 재현할 수 있다. 이 인민권력 기구들은 필요한 식량을 공정히 분배할 것이다. 그리고 재산 약탈과 공공소유 기업에 대한 도둑질을 막을 것이다. 또한 노동시간 연동제를 구호로 정리해고에 대항할 수 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노동자국가를 소생시킬 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 

옐친의 긴축 조치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현재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유태인 배척주의 흑백인조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 최근 몇 달간의 시위는 스탈린주의 "애국"자들과 러시아 민족주의 파시스트들을 결집시켰다. 또한 자본주의 복귀는 코커서스, 몰도바 등 구소련 지역에서 민족주의 반동의 유혈사태를 폭발시켰다. 맑스주의자들은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옐친의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반대한다. 동시에 구소련 민족들에 의한 자발적 사회주의연방 수립을 옹호한다. 

노동계급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혁명 지도부를 시급히 건설해야한다. 혁명정당은 노동계급을 결집시켜 옐친과 기타 민족주의자들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민영화를 저지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해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가 탄생한 나라를 다시 레닌과 트로츠키의 혁명적 국제주의로 인도할 수 있다. 

혁명정당을 지향하는 어떤 정치조직도 현실을 인식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991년 8월 반혁명이 승리하여 소련의 노동자국가는 붕괴했다. 이 사실이 현재 국제 정세를 규정하고 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기타 동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생산수단 대부분을 아직 국가가 소유하고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반혁명 집단은 국가소유 해체에 몰두하고있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을 위시한 관료집단의 등장으로 집단적 소유의 창조자이자 옹호자인 노동계급은 정치권력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노동계급에 대한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관료집단은 국가소유 경제를 관리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자본주의 복귀를 저지하여 노동계급의 소유형태를 방어했다. 그리고 내부의 자본주의 분자들을 탄압했다. 깊이 분열되어 있었으며 기가 꺾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8월 쿠데타의 실패로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10월 혁명으로 성취된 집단적 경제체제의 해체를 공언한 반혁명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쿠데타가 성공했을 경우 비록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나마 스탈린주의자들은 반혁명 세력의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외 적들의 자본주의 복귀 기도에 대항해 소련을 방어해온 세력은 옐친에 대항한 쿠데타 지도자들의 정치적 성격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동시에 이들을 군사적으로 방어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를 자임하는 거의 모든 조직들은 소련을 방어하는 마지막 시험에서 실패했다. 대부분은 민주주의의 미명하에 옐친 진영을 지지했다. 또 어떤 그룹은 중립을 선언했다. 이들은 모두 임무를 방기한 변명을 찾아내기 위해 8월 쿠데타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제 제 4 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USFI), 노동자 권력(WP), 스파르타쿠스 동맹(SL)의 반응들을 하나 하나 검토해보자. 

  

USFI: "민주주의자들만 모여 있다" 

지난 40년간 에르네스트 만델이 주도해온 USFI는 좌익의 최신 정치유행에 영합하기 위해 트로츠키주의 혁명 강령을 왜곡하고 축소시켜왔다. "대중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이들은 1960년대에 카스트로와 호지명 등 게릴라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또한 이로부터 10년 후 폴란드 연대노조의 반공 노선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지난 15년간 정치 지형이 우경화하자 USFI는 사민주의의 가장자리에서 비빌 구석을 찾았다. 따라서 8월 쿠데타에서 만델 일당이 천명 정도의 자본주의 복귀 자유주의자 및 암시장 패거리들과 함께 옐친을 지지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국제 부르주아 계급 전부가 일제히 환호한 것과 똑같이 USFI는 국가비상위원회에 대한 옐친의 승리를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USFI의 미국 조직 가운데 하나인 제 4 인터내셔널 경향은 이렇게 선언했다: "쿠데타의 패배는 소련 인민의 진정한 승리였다"([맑스주의를 옹호하는 게시판], 1991년 10월). USFI의 또 다른 미국 조직은 옐친 진영의 승리를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한 러시아 혁명 이후 거의 유례없는 인민 봉기" ([사회주의 행동], 1991년 9월)라고 규정했다. 만델 자신은 이렇게 표현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민주적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거나 억압하려했다....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저지했어야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쿠데타의 실패에 대해 환호해야할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 [국제적 관점], 2월 3일 

잘난 카우츠키주의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만델의 최대의 기준은 역시 추상적 "민주주의"이다. 옐친의 반혁명 세력과 이들을 지원하는 국제통화기금은 사실 "자유"를 그리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잔인한 긴축정책은 연단의 연설이나 선거일의 악수가 아니라 총칼로 대중에게 강요될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계급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맑스주의자들은 다 알고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노숙자와 제너럴모터스사 사장 사이에 실제하는 불평등은 형식적 평등권에 의해 제거되지 않고 숨겨질 뿐이다. 의회체제는 대중의 동의라는 포장 속에 부르주아 정부의 계급적 정책을 숨기고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자본주의의 민주적 자유를 축소시키거나 정지시키려는 모든 기도에 대해 노동계급은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진보라는 기준에서 보면 10월 혁명의 성과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지구 육지의 6분의 1이나 되는 광대한 지역에서 사적 소유가 철폐되었다. 경제 계획에 의해 시장의 혼란상이 대체되었다. 그리고 공장, 은행, 미디어 그룹 등을 소유하지 않은 수백만 인민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사회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민주적" 제국주의의 위선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증오했다. 이들이 소련 노동자들의 정치 권리를 박탈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의 통치가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 혁명의 성과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문제는 소련의 국가 소유체제를 보존하는 문제에 종속된다. 단 한 순간도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바리케이드 저쪽으로 넘어간 USFI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는데 골몰한 세력을 한쪽으로 하고 시장 개혁을 둔화시키고 최소한 잠시나마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세력을 또 한쪽으로 해서 8월 쿠데타의 바리케이드가 형성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자본주의 복귀를 공개적으로 옹호했던 세력은 쿠데타와 이것의 실패가 의미하는 바를 금방 인식했다. 그러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소련을 방어할 의무를 회피하고 자유주의 좌파의 여론에 굴종하기 위해서 현실을 날조해야한다. 따라서 쿠데타 주동자들과 옐친 진영의 정치적 목표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증명하는 것"은 USFI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회주의 행동]의 1991년 9월 호에 실린 글에서 내트 와인스타인은 이렇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고르바초프, 쿠데타 주동자들, 옐친 & 세바르드나제 사이에 분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분열은 시장 중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한편으로 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강경 공산주의자들'을 또 한편으로 하는 분열은 아니다."   

물론 쿠데타 지도자들은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국가소유 경제를 관리하는 국가중앙기구에 소속되어 권력과 특권을 계속 누리려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 지지를 선언한 자들과 대치했을 뿐이다. 만약 쿠데타가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이것에 저항하는 세력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와인스타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기구 내부의 주요 정치경향들은 모두 자본주의 복귀를 지지했다. 자본주의 복귀 정책을 정치적 수단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이 정책이 요구하는 반노동계급적 조치들을 강제하기 위해 철권 독재가 필요한가에 대해 두 세력은 근본적으로 견해를 달리했을 뿐이다." 

이 논리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쿠데타 주동자들과 옐친이 똑같이 자본주의 복귀파이며 이것을 실현하는 정치적 수단에 대해서만 방식을 달리했다면 노동계급은 덜 억압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 분파의 승리를 원해야 한다. 쿠데타 주동자들의 편을 들지 않은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유일한 논리 정연한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두 세력의 정치적 목적이 같았다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 이것이 문제이다. 

옐친이 소련 관료집단의 한 분파를 대표한다고 만델과 와인스타인은 똑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옐친이나 쿠데타 주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복귀시킬 의지와 능력이 있는 지에 대해 만델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소련 관료집단의 규모는 너무 광대하다. 이들의 사회적 연줄은 너무 강력하고 이들이 조종하는 관행, 규범, 방해, 태업 등의 거미줄은 너무 촘촘하다. 따라서 위로부터의 어떤 시도도 이 집단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수 없다....더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옐친도 고르바초프만큼이나 관료집단 상층부의 한 분파를 대표하고 있다. 그의 이력이나 교육적 배경으로 보아 옐친은 국가기구 출신이다. 그가 대중선동가라 하더라도 이 판단을 수정할 수는 없다....애매한 방식으로 계속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고르바초프와 달리 옐친은 자본주의 복귀를 공개적으로 주창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념 고백만으로 정치인의 정치적 성격을 판단할 수는 없다. 실제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사회적 이해집단에 봉사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소련의 청산을 도모하는 옐친과 그의 동맹세력은 관료집단의 한 분파를 대표할 뿐 진짜 부르주아 세력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물론 양자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다." --- [국제적 관점], 2월 3일 

소련의 관료집단 전체가 자본주의 복귀에 골몰했다고 와인스타인은 주장한다. 반면 극우 옐친 분파를 비롯해 관료집단의 어느 분파도 이것을 결행할 의지나 능력이 없다고 만델은 주장한다. 이 두 견해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어떤 조직에서든 열띤 논쟁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같은 정치조직 안에서 행복하게 동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외면적 차이보다 훨씬 중요한 공통점이 두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8월 쿠데타와 이것의 결말이 소련 노동자국가의 생존 문제와 무관하다고 만델과 와인스타인은 동의한다. 또한 이들은 동의한다: 옐친은 민주적 자유의 보존을 원하는 반면 국가비상위원회는 정치적 억압을 선호한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두 사람의 정치적 결론은 같다: "민주적" 옐친을 지지하자. 그리고 이 실제적 결론이 행복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이끄는 USFI는 자유주의 좌파와 사회민주주의의 견해에 편하게 동조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올바른 행동을 위한 지침을 얻기 위해 현실을 분석한다. 반면 기회주의자들은 강령을 왜곡하고 축소시키기 위해 현실을 분석한다. 이들에게는 목적만 같다면 전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옐친 진영과 쿠데타 주동자들: 이해의 충돌 

모든 근거들이 그러하듯이 와인스타인과 만델의 근거도 일말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일말의 진실을 전체 상황을 오도하기 위해 강조한다. 과거의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달리 국가비상위원회는 사회주의에 대한 찬사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 점을 와인스타인은 올바르게 지적했다. 국가비상위원회의 성명서들이 집단적 소유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쿠데타 주동자들은 "수십 년간 존재해온 통합적 국가경제 체제에 대한 점증하는 위험과 직업, 교육, 보건, 여가 등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진행중인 공격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뉴욕 타임즈]지, 1991년 8월 19일). 또 한편으로는 이들은 사적 소유를 비롯해 소련에서 자라난 다양한 소유형태를 존중할 것이며 페레스트로이카를 계속 추진할 것을 다짐했다. 

이 애매한 입장에는 원인이 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어떠한 적극적인 역사적 전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는 고사하고 사회주의 소유형태의 우수성에 대한 신념만이라고 가지고 있던 자는 거의 없었다. 1930년대 초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잡탕이라고 묘사했다. 기회가 오자마자 곧바로 소련을 배신할 철저히 냉소적인 기회주의자에서 진지한 사회주의 혁명가까지, 부텐코 같은 파시스트에서 라이스 같은 노동계급 국제주의자까지 모든 정치경향이 관료집단 내부에 존재한다고 트로츠키는 보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통치시기에 관료집단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정치적 신념을 거의 잠식당했다. 소련 경제가 성장을 멈추자 자기 만족, 냉소주의, 부패 등이 모든 수위의 국가기구를 좀먹었다. 이 타락상은 브레즈네프 자신에 의해 대표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멋진 별장과 외제 스포츠카를 모으는 호사 취미로 악명이 높았다. "강경파"를 분기시킨 유일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소련에 대한 애국심 즉 소련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이 "애국심"은 옐친을 반대한 잡다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었다. 구세대 관료들과 유태인을 배척하는 왕당파는 모두 강력한 러시아 국가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들에게 강대국 소련을 떠받치는 소유관계는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관료들의 공개 발언이나 내심의 생각은 맑스주의적 분석의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사회 계급과 계층의 정치 행동을 설명하는 열쇠는 사회 내의 이들의 객관적 지위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물질적 이해관계이다. 자본가 계급과는 달리 소련의 관료집단은 특정 소유형태의 담지자가 아니다. 스탈린이 권력의 절정에 있을 때나 1991년 8월이나 할 것 없이 관료집단의 특권은 중앙집중적 국가소유 경제를 관리하는 역할에서 나왔다. 국가 중앙기구의 권력이 분리독립을 원하는 민족들, 이탈하는 관료들, 자유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점점 강력한 도전을 받자 국가와 당 중앙기구의 일부 분파가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다시 확인시키려했다.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8월 쿠데타 이전의 당내 권력 투쟁 그리고 8월 쿠데타 시도 자체의 의의가 바로 이것이었다(국제볼세비키그룹(IBT)의 1991년 9월 성명서 "소련에서 반혁명이 승리하다"를 참조하시오). 

그러나 동구의 기형적 노동자국가 대부분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저항도 없이 순순히 타도되었다. 그리고 소련 관료집단 일 분파의 반격은 너무 늦었고 결의 수준이 대단히 낮았으며 행동은 무기력했다. 이 점은 설명이 필요하다. 스탈린주의의 동맥경화증은 1989년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증으로 진행되어 있었다. 

"8인방"이 보존하고자 했던 현실은 수천의 헌법이나 의회보다 소련 및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훨씬 소중한 생산수단의 공공소유였다. 8월 19일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어느 누구도 이 시도가 그렇게 허무하게 찌그러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쿠데타 전에 이렇게 견해를 표명한 바 있었다: 

"관료집단의 지도적 분파가 미래 특정 시점에서 자본주의 복귀 과정을 정지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옐친 진영에 대항해 '보수파'에게 군사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것이다. 스탈린주의 지배집단은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복귀 과정을 정지시킬 경우 생존에 필요한 시간은 벌 수 있다." --- [1917] 제 10호 

8월 쿠데타가 실패한 후에도 관료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만델은 자신의 주장을 진실의 단편들을 통해 강화시킨다. 진정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 및 국가기구의 산물이다. 짜르 시대의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미 개명된 스베르들로프스크의 시당 서기로 전국적인 악명을 떨친 그는 모스크바 시당 서기로 승진했다. 급한 성격에 과대망상증을 가진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강요한 전제적 당 규율에 불만을 나타냈으며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좀더 과감하게 추진하지 않는다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고르바초프의 눈밖에 난 그는 결국 정치국원직과 모스크바 시당 서기직에서 축출되었다. 그러자 그는 곧 공산당을 부정했다. 

그러나 옐친은 다시 정치 생명을 되찾았다. 고르바초프의 가장 유명한 적수라는 평판이 그를 당외 정치세력의 대변인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소련공산당의 정치권력 독점을 종식시키려는 세력들에 의해 그는 공산당 후보를 제치고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러시아 연방 의사당 밖에서 쿠데타 주동세력과 대치하며 탱크 위에 올라섰을 때 그는 외국자본, 민족 분리독립 세력, 모스크바의 포주들, 화폐 투기꾼들, 기타 "기업인" 등의 대표가 되었다. 개인 경호원을 거느린 이들은 옐친 지지 군중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옐친이 공산당 및 국가기구의 산물이라고 만델은 말한다. 그러나 이때 그는 옐친이 노동계급의 적들에게 가담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자발적 민영화"와 관료집단 

관료집단이 아직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만델이 말했을 때 그는 일말의 진실을 하나 더 드러내었다.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관료집단을 구성하고 있던 수백만 개인들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일자리를 잃지도 않았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크라프추크와 카자크스탄 대통령 나자르바이예프는 지역 공산당 서기였으나 8월 쿠데타 이후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구체제 잔당들과 이들이 의존하는 하급관료들은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완전히 발달한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사적 소유를 보호할 확고한 법체계와 억압적 국가기구를 구비하여야 자본주의 복귀는 완성된다. 그렇다면 과거 집단적 소유체제를 유지했던 나라들은 결코 자본주의를 다시 확립할 수 없을 것이다. 

[뉴욕 타임즈]지의 1991년 12월 27일자 보도는 하버드 대학교의 소련학자 그레엄 앨러슨을 인용하여 국영기업 책임자들이 맡아야 할 새로운 역할을 논하고 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국영기업의 책임자이다. 예를 들어 종업원이 1만 명인데 상관은 아무도 없다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상부의 지시도 없고 보고했던 행정부처는 사라졌다. 그러면 나는 회사 재산이 내 것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자재를 비롯한 생산 투입요소를 전혀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과 종업원들을 보살펴야 한다. 때때로 회사의 반을 사들여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외국인을 나는 만난다. 이것은 자발적 민영화이다.'" 

USFI의 [국제적 관점]지 1992년 1월 20일자는 학자이자 모스크바 인민 위원회 대의원 유리 마레니치와의 놀라운 회견기사를 싣고 있다. 마레비치는 옐친 진영의 지역 관료들이 부동산을 비롯한 공공소유의 재산들을 자기 소유로 돌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정권을 맡았으므로 공공소유를 독점에서 해제하여 시장을 통해 경제를 관리하겠다'는 구호로 이들은 선거에 임했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공공소유를 관리할 권력을 얻자 이들은 이 재산들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엄청난 유혹을 받았다. 그리고 정부기관의 직책을 정부 상대 개인기업의 직책과 결합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쉽게 공공재산을 가로챌 수 있었다. 민영화를 감독하는 직책에 있는 자는 자기 구역의 재산을 자기 소유 기업으로 이전시켰다. 이제 공공재산은 자기 것이 되었다. 위원회 집행위원들은 모두 자기 기업을 차렸다. 한 기업은 위원회의 정보서비스를 떠맡았고 다른 기업은 법률서비스를 떠맡았다. 또 다른 기업은 관할구역의 부동산을 전부 넘겨받아 이것의 판매권과 임대권을 독식했다....이 일은 아주 간단하다. 1930년대부터 우리는 화폐를 지불하지 않고 재산을 이전하는 체제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모든 재산은 공공소유였으며 이것이 한 국가기관으로부터 다른 국가기관으로 이전되었다. 당사자들은 모두 국가라는 단일 소유주의 이름으로 거래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 소유주들도 있다. 이들은 같은 절차를 이용하여 지역위원회나 국가기관의 부동산을 개인기업에게 이전했다...." 

마레니치는 이와 비슷한 일이 러시아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추측한다. 구 관료들의 다수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자본가 계급으로 행세할 가능성이 있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을 대체하는 자들은 당분간 공공소유 운영 방식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다른 계급과 계층의 일부로부터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구성되면서 이전 생산양식의 요소들이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체제가 다시 강요될 것이다. 옐친이 8월 쿠데타에 대항해 승리하기 이전에 이미 소련 경제는 강력한 원심력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성을 강조하면서 만델은 쿠데타의 패배가 질적인 변화의 분기점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모스크바의 국가중앙기구가 경제에 대한 행정적 통제력을 행사하는 한 지역과 지방의 관료들은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 소유주의 특권을 누리려는 이들의 욕구는 객관적인 장애에 부딪쳤다. 8월에 중앙 권력이 확실히 깨진 후에야 이들은 "자발적 민영화"를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8월 쿠데타의 실패는 소련 노동자국가의 종말이었다.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는 만델과 와인스타인의 확신은 반혁명 세력과 한편이 된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교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권력(WP): 말로는 소련 방어, 행동은 옐친 지지 

그런데 USFI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실패한 쿠데타의 의의를 인정하는 정치조직이 있다. WP와 이 그룹이 이끄는 혁명적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동맹(LRCI)의 산하 조직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소련 노동자국가가 8월에 망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쿠데타 이후를 "이중 권력" 정세로 규정했다. 관료집단을 대표하는 고르바초프가 옐친 진영과 국가권력을 놓고 계속 경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2월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가볍게 권력에서 밀어내자 WP는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소련은 망했다. 70년이 넘게 자본가들을 괴롭힌 유령은 드디어 땅속에 고이 묻혔다"([노동자권력], 1월 호). 

또한 WP는 소련의 멸망과 옐친의 쿠데타 제압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LRCI 국제서기국이 1991년 발표한 성명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쿠데타를 주도한 분파는 8월 19일의 행동을 통해 반자본주의 소유형태에 기초한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고자했다"([노동자권력], 1991년 9월,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옐친 진영을 이렇게 묘사했다: 

"민주적 민족적 반대 분파들은 '현실 사회주의'를 개혁할 모든 신념을 거의 상실하고 서방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이상적인 모델로 설정했다. 한때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던 이들은 그의 '시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실망했으며 그의 동요와 보수파와의 타협에 분노했다. 결국 이들은 자본주의를 러시아에 복귀시켜 제국주의에 봉사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옐친을 필두로 한 정치연합은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와 세바르드나제 그리고 주위의 군부 및 정치계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특권과 이 특권의 원천인 퇴보한 노동자국가의 방어를 포기하고 새로운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핵심 성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관료집단 분파를 대표한다." 

이렇게 LRCI에게는 8월 쿠데타에서 드러난 대결 세력들의 정체가 명확하다: 한쪽에는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일념으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려했던 관료집단의 분파가 존재하고 반대쪽에는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 민족주의자, "민주적" 지식인, 관료들의 정치연합이 존재했다. 이 대결에서 WP는 편을 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노동자국가를 파괴하려는 자들의 편을 들었다! [노동자권력] 같은 호는 "쿠데타를 정지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앞장을 서야했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호는 "그들의 노래는 끝났다"는 제목의 글을 실어 "쿠데타를 지지한 좌익"을 맹렬히 비난했다. LRCI는 자기 입장에 대한 확고함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그룹인 혁명적 트로츠키주의 경향과 조직적 관계를 최근 단절했다. 후자는 옐친 진영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여 국제지도부의 노선을 반대했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적 곡예를 통해 LRCI는 자신의 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소련 방어주의를 이 노선과 일치시킬 수 있을까? LRCI 국제서기국은 자신의 성명서에서 계속 이렇게 주장한다: 

"이 사건들을 통해 주요한 질문들이 제기된다.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였는가? 보수파의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 반혁명이었는가? 쿠데타가 성공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관료적 탄압이 지속되었을 경우 노동계급은 시간을 벌 수 있었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 이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비상위원회가 '계획에 입각한 소유관계를 방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직 이것뿐이다: 자신이 기생하고 있던 소유관계가 '숙주'인 한에서만 이것의 철폐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 대대적인 사회적 기생충이야말로 관료적 계획경제의 죽음을 가져온 질병의 주원인이었고 이에 대한 대중의 환멸의 주원인이었다. 전체주의 독재를 통해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자기활동, 자기의식, 새로운 전위를 형성할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장애물이었다. 새로운 전위만이 '10월의 성과'를 보존할 뿐 아니라 쇄신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권력], 1991년 9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의 자기활동에 대한 장애물이었고 계획경제에 대한 기생충이었다. 이들은 계획경제를 엉망으로 관리하여 망가뜨렸고 결국 이것을 방어할 능력도 상실했다.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자에게는 기본 상식이다. 계획경제를 보존하기 위해 스탈린주의자들을 타도할 정치혁명이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허약하고 동요하는 쿠데타 세력과 옐친의 오합지졸이 대결했던 당시의 결정적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혁명그룹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양측의 허약성과 혼란상은 역력했다. 이때 노동자권력의 민주적 기관의 지도를 통해 국가소유를 보존할 정치 목표를 가지고 있던 트로츠키주의 그룹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쿠데타 첫날에 당면한 전술적 목표는 러시아 연방 의사당 내부와 주변에 모인 백여 명 정도의 경무장한 옐친 추종자들을 공격해서 해산시키는 것이었다. 

반혁명 분자들에 대한 결의에 찬 선제공격은 페레스트로이카에 염증을 느낀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했을 것이다. 또한 군대 내에서 상당한 부위의 공감을 획득해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분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결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쿠데타를 주동했으나 허우적거린 백발이 성성한 늙은 관료들은 이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노동자권력의 이름으로 수행된 이 지원은 결국에는 이들의 이해마저 위협했을 것이다. 옐친의 어중이떠중이들을 해산시킨 후 모든 공장, 병영, 노동자 거주지구의 대표들에게 러시아 연방 의사당에 모여 진정 민주적인 모스크바 소비에트를 수립할 것을 촉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선제공격의 성공은 소련 전역의 노동계급 투쟁을 촉발시켜 자본주의 복귀세력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소련공산당 관료들의 통제력은 더욱 약화되었을 것이다. 옐친에 대항한 쿠데타 주동자들과의 군사적 동맹은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회복과 충돌하지 않았을 것이다. 1917년 8월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혁명 쿠데타에 대항해 레닌은 케렌스키와 동맹을 맺어 쿠데타를 제압한 후 케렌스키의 부르주아 임시정부마저 타도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옐친의 반혁명 기도에 대항하여 독립적 노동계급 부대는 쿠데타 세력과 함께 총을 옐친에게 겨누어야 했다. 이 군사적 동맹은 노동계급 정치혁명을 수행할 세력을 강화시켜 정치적 억압체제를 복원시키려던 야나예프, 푸고 등 쿠데타 주동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옐친 진영에 대한 선제공격이 성공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싸움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보다는 유혈이 낭자한 패배가 더 나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은 트로츠키주의 정치강령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한 투쟁과 직접적 노동자권력 수립 투쟁은 러시아 노동계급의 발전하는 정치의식을 위해 하나의 모범이자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우리의 패배는 결코 불가피하지 않았다. 올바른 강령과 응집력을 갖춘 소규모 그룹의 개입은 팽팽한 세력 균형을 깨뜨려 반혁명 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소련의 노동계급은 쿠데타 상황에서 독립적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권력 투쟁은 숙주를 보존하고자 했던 기생충 스탈린주의자들과 이것을 파괴하고자 했던 옐친 진영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오직" 기생충일 때에만 집단적 소유를 방어한다고 WP는 불평한다. 그러나 이 조그만 "오직"이라는 단어는 쿠데타 당시 노동자국가의 사활이 걸린 시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었던 세력들의 정치적 실체를 숨기고 있다. 기생충은 숙주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보존할 이해를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결정적 순간에 기생충이 무장했고 숙주가 무장을 하지 않았다면 숙주의 생존은 기생충의 승리에 달려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당연히 계획경제를 파멸시켰고 미래에 이것을 보존할 수 없는 집단이다. 그러나 현상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목표는 당시 노동계급의 이해와 일치했다. 트로츠키는 소련에 대한 무조건 방어를 주창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상실했거나 좀더 유능했거나 양심이 좀더 깨끗했을 때에만 소련을 방어해야 한다고 그가 말하지는 않았다. 

  

옐친이 더 위험했다 

옐친보다 쿠데타 주동자들이 노동계급에게 더 위험 세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WP는 옐친 진영을 지지했다. 이들의 사고는 [노동자권력] 9월 호에 실린 글에 표현되어 있다: 

"국가소유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노동계급이다. 그러나 파업 금지, 심야 통행금지, 검열, 정치활동의 금지 등으로 노동계급이 족쇄로 묶여있을 때에는 행동을 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쿠데타의 승리로 인해 관료집단이 정치적 억압을 유지하는 감옥과 같은 상황에서 '시간을 벌기'보다 차라리 자본주의 복귀의 물결 가운데에서 이에 대항하는 것이 허약한 노동자 조직들에게는 한결 낫다." 

그러나 WP가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민주적" 공간에서의 시간 벌기는 옐친의 통치하에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점은 WP도 인정하고 있다: "옐친이 권력을 잡은 후 새로운 착취계급을 형성하는 상황에서 대중에 대한 완전하고도 일관된 민주적 권리는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위와 같은 글). 결국 민주적 권리와 관련하여 옐친과 쿠데타 주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민주적 권리를 정지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승리했을 경우 스탈린주의자들은 기존의 경찰국가기구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을 탄압했을 것이다. 반면 옐친은 억압기구를 확립하기 위해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며 이 동안 민주적 자유를 정지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빈곤, 높은 물가, 실업, 강도 높은 노동, 사회적 억압, 전쟁의 위협, 농촌과 도시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과'에 대한 유례없는 착취"([노동자권력], 1991년 12월 호와 1992년 1월 호)를 러시아 인민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점을 WP는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복귀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대중의 빈곤보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적 억압이 노동계급에게 더 해롭다는 말인가? 옐친을 지지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WP는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러시아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모든 저작들의 내용에 위배된다. 스탈린주의 과두집단을 타도하는 투쟁은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는 투쟁과 충돌하기보다 이 투쟁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이 투쟁에 종속되어 있었다. 정통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라고 자임하는 WP가 자신의 진짜 입장 즉 러시아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방어할 임무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할 임무에 종속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8월 쿠데타에 대한 WP의 입장은 우리에게 이와 다른 결론을 내리게 할 수 없다. 

혁명을 말하면서 행동은 개량주의인 정치 경향을 중도주의라고 트로츠키는 규정했다. 그렇다면 WP는 100% 순도를 가진 중도주의 조직이다. 이 조직은 정치 사건들과 세력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급진/사회민주주의 여론에 추종하는 정치 경향 때문에 자신의 올바른 분석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 종종 자기 논리에 위배되는 실천적 결론을 도출한다. 기회주의적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만 좁혀질 수 있다. 이 점을 WP는 USFI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USFI는 옐친과 국가비상위원회는 소유형태에 대해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으나 민주적 또는 권위주의적 방식을 채용하는 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WP는 두 경쟁 진영이 상반되는 소유형태를 객관적으로 대표하고 있었다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친 진영을 지지하면서 자신의 분석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일련의 "정통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릇된 논리로 포장하고 있다. 

  

SL: '그놈이 그놈이다' 

제임스 라버쓴의 스파르타쿠스 동맹(SL)과 이 그룹이 거느리는 국제공산주의동맹(ICL) 산하 조직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만이 지구상의 허다한 트로츠키 조직들 가운데 소련을 진정으로 방어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옐친의 승리에 대해 완전한 혼란된 노선을 제시하는 이 조직의 모습과 모순을 이룬다. ICL의 영국조직이 발간하는 [노동자 망치] 1/2월 호에는 혁명적 국제주의 동맹(RIL) 소속 제리 다우닝과의 논쟁이 "RIL: 국가비상위원회도 아니고 옐친도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실려있다. 이 기사는 쿠데타에서 중립을 지킨 RIL을 혹평하고 있다: 

"관료집단의 일 분파와 세계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복귀 세력의 일 분파 사이의 차이를 RIL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스탈린주의를 제국주의와 동일시한다면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항해 관료집단의 일 분파와 군사적 동맹을 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시각에 의하면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동맹을 체결하여 자본주의 동맹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윗 글을 읽으면 ICL 역시 자신이 혹평하는 이 중도주의 조직과 똑같은 노선을 주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도 못할 것이다. [노동자 망치]가 쿠데타에 대해 중립 입장을 취한 어떤 조직도 매섭게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자기 국제지도부의 기관지 [노동자 전위]를 비판할 것을 제의한다. 후자의 8월 30일 기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쿠데타 이전까지는 옐친의 전면적 민영화와 고르바초프의 시장 개혁을 반대했던 선진노동자 대부분이 관료집단의 소위 강경파 '애국주의' 분파에게 눈을 주었다. 그러나 이 환상을 가질 여지는 현재 조금도 없다....쿠데타 주동자들이 선언한 강령은 소련의 해체를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글라스노스트(개방) 없는 페레스트로이카(시장 개혁) 즉 시장은 도입하되 너무 빨리 하면 안되고 토론은 금지시킨다는 것으로 집약된다....쿠데타 와중에 모스크바 노동자 위원회는 이렇게 촉구했다: '사회주의 소유를 보존하고 도시의 사회질서를 보호하고 국가비상위원회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 민병대를 조직하자.' 그러나 국가비상위원회를 비판하는 언사는 한마디도 없었다. 옐친의 반혁명 시위를 분쇄할 노동자 민병대를 촉구한 것은 필요했다. 그러나 국가비상위원회가 권력을 공고히 했다면 노동자 민병대를 해체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후자는 전자의 통제에서 불가피하고 급격하게 빠져나갔을 것이다." 

위의 글을 "국가비상위원회나 옐친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이외의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면 해석의 천재가 필요할 것이다. 옐친과 국가비상위원회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SL의 논리는 USFI의 논리와 유사하다. 다른 조직들을 아무리 혹평해도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쿠데타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소련의 계급적 성격이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SL은 편들기를 거부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 조직의 주장에 의하면 소련은 여전히 건재하며 옐친은 지금도 퇴보한 노동자국가를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만델과 달리 SL은 '싸우는 놈들은 다 뒈져라' 입장을 주창할 수 없다. 1991년 8월까지 이 조직은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항해 스탈린주의자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입장을 주창하면서 좌익의 주류조직들 모두의 비난을 감수해왔기 때문이다. SL은 폴란드 연대노조의 반혁명 세력과 야루젤스키 정권이 1981년 격돌했을 때 후자에 대한 군사적 지지를 올바르게 주창했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은 반동 회교 무자헤딘의 봉기를 진압한 소련군에 대해 군사적 동맹을 주창했었다. 사실 SL은 스탈린주의자들의 편을 너무나 열성적으로 든 나머지 군사적 지지와 정치적 지지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들이 8월 쿠데타에서 중립을 선언한 것은 최후의 최상의 소련 방어주의자라는 자신들의 목소리 큰 주장으로부터 급격히 단절한 것이다. 

  

양심 불량의 중립 선언 

이 노선 전환은 진정한 강령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SL 지도부는 주요한 노선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기를 꺼려왔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논리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발표한 글들의 내용과는 정반대로 자신들이 결코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다고 우긴다. 이들은 쿠데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이 과거의 노선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다양한 유보조항, 애매한 표현, 사실의 왜곡으로 자신들의 노선을 숨기고 있다. 그 동안 자신들이 펼쳐왔던 수많은 주장들과 중도주의 및 개량주의 즉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의 주장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유사성을 숨기기 위해 SL은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한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이들의 뉴욕 본부에서 나오는 불협화음은 더욱 뚜렷이 들릴 뿐이다. 

SL이 그나마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때는 옐친의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반혁명 오합지졸을 국가비상위원회가 해산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매우 의심스러운 주장을 중심 축으로 놓는다. 논쟁을 진행시키기 위해 이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자. 그럴 경우 이 주장은 쿠데타 지도자들이 옐친과 아예 충돌하지 않았다거나 옐친에 대항을 했으나 너무 허약하고 우유부단하여 그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어느 것이 진정한 자신의 주장인지 SL은 명확히 하지 않는다. 국가비상위원회의 권력 쟁탈 시도가 "페레스트로이카 쿠데타"라고 이들이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쿠데타를 "애처롭다"로 표현하던가 또는 쿠데타 지도자들을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8인방"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후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결론을 내리든 이들이 제시하는 논리의 모순은 이리저리 엉켜서 해결될 가망이 없다. 

옐친과 국가비상위원회가 모두 똑같은 정도로 시장 개혁을 찬성한다고 SL은 주장한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소련과 전세계 노동계급은 유례없는 대재앙을 맞았다.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10월 혁명의 나라에 반혁명의 홍수가 일어났다"([노동자 전위], 8월 30일)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에는 일관성이 전혀 없다. 반혁명에 대한 주요한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반혁명의 홍수가 일어날 수 있는가? 쿠데타 지도자들이 대표한 세력이 이러한 장애물이었는가? 아니면 이들이 승리했을 경우에도 반혁명의 홍수가 일어났을까? 이럴 경우 이들의 패배는 왜 노동계급에게 "유례없는 대재앙"인가? [노동자 전위]는 이 질문들에 대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다. 

국가비상위원회가 "개방 없는 개혁"을 목표로 했다는 [노동자 전위]의 주장은 와인스타인, 만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민주적 권리의 문제에서만 옐친과 쿠데타 지도자들이 견해를 달리하고 있으며 특히 후자는 "철권 독재"로 자본주의를 강요하기를 원한다. 생각이 깊은 SL 조직원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소련 노동자들은 개방이 있는 민주적 자본주의보다는 개방이 없는 독재 자본주의에 대항하도록 조직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민주적" 옐친 진영을 지지해야한다. 그런데 USFI과는 달리 [노동자 전위]는 이 주장의 논리를 결론으로까지 추구하지 않을 뿐이다. 

SL의 중립 입장은 또 다른 이유를 들고 나온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옐친 진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관료집단의 일 분파를 대표한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미적지근하고 무능해서 옐친을 패배시킬 수 없었다. 우선 이 판단은 사태가 종결된 후에 내려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와 관련된 사건들은 너무 빨리 진행되어 쿠데타에 대한 [노동자 전위]의 글은 쿠데타 실패가 확정된 며칠 뒤에 나왔다. 쿠데타가 형편없이 찌그러질 것이라는 것을 SL은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할 것인가?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명줄을 다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고르바초프 등장 이전 시기로 소련이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명백했다. 그러나 이 일반적 평가로는 8월 19일 쿠데타 당시의 정확한 계급역관계를 측정할 수 없다. 이것은 실제 행동을 통해서 시험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세력의 승리가 자본주의 복귀의 대세를 일시적으로만 정지시켰다 할지라도 이것만으로도 이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을 이유는 충분했다. 적대 세력들의 결의수준, 전술적 기교, 역량이 아니라 이들의 정치적 성격에 기초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편을 든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옐친의 기도를 파탄시키는데 관심이 있었을 수도 있었고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SL은 이 둘 모두를 원한다. 국가비상위원회가 옐친의 기도를 파탄 낼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일을 형편없이 꾸몄다고 SL은 비판한다.   

더욱이 SL은 "8인방"이 옐친에 대항해 노동계급을 결집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을 통해 비판의 기이한 성격을 더욱 증폭시킨다: 

"'8인방'은 노동계급을 옐친에 대항해 결집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두 직장에서 일이나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8인방'은 폭동을 일으킨 이유가 너무 빈약하여 옐친을 제압할 수 없었다. 이들의 폭동은 '페레스트로이카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옐친보다 더 극악한 반혁명 세력도 패배시킬 수 있었던 노동계급을 쿠데타 지도자들은 동원하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했을 경우 옐친 진영의 반격과 함께 내전이 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노동자 망치] 1992년 1월/2월 호 

위의 글은 이보다 10년 전에 폴란드 연대노조에 대해 SL이 주창했던 입장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1981년의 폴란드는 지금의 소련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스탈린주의자들은 일시적으로 반혁명을 제압하기 위한 조치를 확실히 취했다. 이 중요한 대결 상황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 SL은 모호한 태도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다만 소련의 상황을 폴란드의 상황과 대비시키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 기억으로 야루젤스키는 보웬사에 대항해 폴란드 노동자들을 동원하지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좀처럼 동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료적 특권층의 존재는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점을 SL은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노동계급을 동원할 경우에만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겠다고 요구하는 것은 이들이 스탈린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같은 글에서 [노동자 망치]는 옐친 진영에 대항해 '8인방'이 취했을 어떤 조치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노동자들에게 옐친의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반혁명 오합지졸들을 진압하기 위해 행동했던 쿠데타 세력에 대한 군사적 동맹을 의미했을 것이다....8월 쿠데타에 대한 RIL의 제 3 진영 중립 노선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노골적인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이에 반항하는 관료집단 세력이 대결하는 무장투쟁의 상황에서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의도가 어떻든 집단적 소유에 대한 방어가 일정에 올랐을 것이다. 1938년 이행기 강령에서 트로츠키가 주창했듯이 "자본주의 반혁명의 공공연한 공격에 대항해 관료집단의 일 분파"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군사적 동맹을 체결했을 것이다'." 

1981년 폴란드 상황에서 연대노조는 무장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루젤스키의 탄압은 무장투쟁을 촉발시키지 않았다. 일련의 경찰국가적 조치들을 통해 계엄령이 강요되었다. 국가비상위원회가 좀더 단호하게 투쟁하여 계엄령을 선포했을 경우 SL은 이들과 군사적 동맹을 체결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이 논리에 의하면 군사적 동맹은 스탈린주의자들의 단호함과 기교에 달려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의 사회적 성격, 정치적 목표 또는 이들의 승리나 패배의 결과 조성되는 객관적 상황에 기초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다. 그런데 SL은 스탈린주의 "강경파"가 쿠데타에서 보인 행위를 통해 이들의 정치적 목표와 사회적 성격을 판단한다. 

이 주장은 순환논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옐친과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달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옐친에 대한 적절한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들이 적절한 공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순환논리이다. 관료집단 대다수가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제공하는 국가기구를 방어하는데 객관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잊어버려라. 고르바초프가 옐친과 민족분리주의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여 점점 공격을 받은 쿠데타 이전의 당내 권력투쟁 전체에 대해서도 잊어버려라. 간단히 말해 쿠데타 시도 자체가 옐친 진영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려라. SL은 쿠데타의 동기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쿠데타를 정치적 맥락이나 배경이 없는 사건으로 치부한다. 

  

쿠데타 세력이 옐친을 공격했는가? 

쿠데타 지도자들의 전술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는 현재의 논쟁에서 부차적일 뿐이다. 그러나 국가비상위원회가 실제로 옐친을 공격할 시도를 했는가? 쿠데타가 실패한 다음 밝혀진 사실들이 있다. 비밀경찰 산하 정예 특공대 부대인 알파부대는 1979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아민을 암살하고 친소 아프간인민당이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일조 했다. 이 부대는 쿠데타 당시 옐친의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명령을 거부했다. 이 사실은 옐친 자신이 처음 밝혔으며 나중에 알파부대의 장교들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SL은 무진 애를 써가며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했다. [노동자 전위] 12월 6일자 "왜 그들은 옐친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 소련: 쿠데타의 해부"라는 제목의 기사는 [뉴요커]지 1991년 11월 4일자에 실린 기사를 인용했다. 이 기사는 라버트 칼런이 쓴 글인데 알파 부대 장교들의 말을 부인하고 있다: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뒤 알파부대원들이 한 회견 내용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회견마다 장교들은 자기가 명령을 거부하여 쿠데타를 실패로 만든 영웅이라고 자회자찬했다." 그런데 [노동자 전위]의 기사는 독일 주관지 [슈피겔]지가 출판한 내용의 요약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 독일 주간지의 기사에 의하면 쿠데타 가담자들은 체포된 후 심문을 받았는데 모두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했다. 이상하게 [노동자 전위]는 알파부대 장교들의 주장은 크게 의심하면서 목숨이 걸린 재판에 앞서 쿠데타 음모자들이 부인한 내용들은 너무 신뢰하고 있다. 

더욱이 [노동자 전위]는 칼런이 쓴 [뉴요커]지의 기사를 매우 선택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칼런에 의하면 알파부대는 최소한 한번은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공격하려했다. 이 주장은 공수부대 요원들의 진술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최초의 공격에서 옐친 지지자들이 의사당 영내에 진입한 장갑차를 둘러쌌으며 옐친을 지지한 콘스탄틴 코베츠 장군이 공수부대 지휘관을 만나 공격을 하지 말도록 설득했다고 칼런은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첫 공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국가비상위원회는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의사당으로 접수된 정보에 의하면 쿠데타 주동자들은 의사당을 포위할 능력이 있으며 자기들 명령을 따를 용의가 있는 부대를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의사당 점거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소규모 회의가 국방부에서 열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코베츠 장군이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두 번째 공격은 성사되지 못했다. 칼런은 이렇게 보도한다: 

"이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실패 후에 쿠데타 주동자들의 무능력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이 설명들은 아전인수식이고 모순적이긴 해도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군이 쿠데타 주동자들을 위해 피를 흘리기를 거부했다." 

국가비상위원회가 옐친에 대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SL이 인용한 보도는 거꾸로 SL의 주장을 틀린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옐친의 승리: 반혁명의 승리 

쿠데타 진행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쿠데타 주동자들의 소심함과 무능력을 이들의 부하들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대비시키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이 두 현상은 서로 대비되기는커녕 서로를 보충해준다. 국가비상위원회의 인물들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이들은 기가 꺾여 중앙집중적 권한을 완화하고 시장의 작동에 더 많은 여지를 줄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이미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이들의 행동 의지는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과 옐친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이들은 관료적 통치를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시장 "개혁"을 허용하고자했다. 위험에 처한 국가중앙기구를 방어하기 위해 공격에 나서야겠다고 이들이 결심했을 때는 이미 국가중앙기구는 한참 썩어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군대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요인들은 서로를 강화시켜 결국 쿠데타의 황당한 실패로 결말이 났다. SL은 국가비상위원회와 옐친의 명백한 공통분모를 너무 강조하여 이들의 갈등이 소련 국가권력의 운명에 대한 투쟁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쿠데타의 실패로 관료적 통치의 근간인 스탈린주의 국가기구는 영원히 손상을 입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반혁명의 수문"을 계속 닫아놓으려고 마지막 시도를 했을 때 SL은 이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제 이 판단 착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소련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위험에 처해 있으나 여전히 노동자국가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모습은 악명 높은 애완 동물 가게 주인이 손님을 안심시킨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손님이 최근에 구입한 앵무새가 새장 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자 손님은 환불을 요구한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앵무새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움직이지 않은 채 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SL은 구소련이 아직도 노동자국가라고 단순히 주장할 뿐 이 주장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진지하게 하지 않고 있다. 공개토론회에서나 개인적으로 이들은 다양한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설명들을 제시할 뿐이다. 

우선, 이들은 구소련 경제의 대부분이 아직 민영화되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가 소유로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정부의 포고령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70년이 넘게 구축된 구조와 조직형태와 삶의 습관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1937년 11월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통치의 첫 몇 달간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경제 기초 위에서 통치를 했다....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할 경우 새 정부는 상당기간 국가소유 경제에 기초하여 통치할 수밖에 없다." 

옐친, 크라브추크 등의 승리는 이후 정치권력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명확히 복귀시키는데 헌신할 자들의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의 승리는 반혁명 세력의 승리인 것이다.           

이런 주장에 마주치면 SL 조직원들은 뒷걸음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옐친은 친자본주의 정권을 주도하고 있으나 아직도 국가기구를 장악하지 못했다. 1992년 2월 뉴욕 시에서 열린 SL 주최 공개토론회에서 구소련 군대의 해체를 항의하는 5천여 장교들이 1992년 1월 크렘린궁 앞에서 시위를 벌인 사실을 SL은 강조했다.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공세는 장교들을 분열시켜 상당수가 노동계급의 편으로 넘어올 수 있다고 SL은 주장한다. 이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경우 이것은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이라는 것이다. SL은 여전히 선전물을 통해 노동계급이 정치혁명을 완수하여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지금 진행중인 자본주의 복귀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불안정을 악용하고 있다. 소련의 해체로 등장한 정권들은 확고히 안착된 부르주아 국가를 통치하지 않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은 완성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다. 옐친의 통치력은 허약하다. 그러나 그의 일당은 새로 손에 넣은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반혁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제국주의 세력, 페레스트로이카 백만장자, 암시장 마피아 등이 크렘린궁의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구소련 관료들의 다수는 국가소유 재산들을 크게 도둑질하고 있다. 옐친의 부하들은 군대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자 전위]가 보도했듯이 3월 소련의 복구를 촉구하는 시위대에 대해 모스크바 경찰은 주저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일년 전만 하더라도 국가계획위원회는 계획 지시를 하달했고 군대와 경찰의 합동 순찰대는 거리로 나서서 암시장 투기꾼들을 괴롭히고 페레스트로이카 폭리꾼들을 체포하고 이들의 재산을 압류했다. 이제 국가계획위원회는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폭리꾼들과 백만장자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반혁명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지만 승리하고 있다. 국가권력 장악을 위해 다시 상승하는 노동자 투쟁은 성숙된 자본주의 국가보다 현재의 러시아에서 훨씬 적은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은 암시장 마피아를 일소하고 군대와 경찰기구에서 옐친 추종자들을 제압해야 한다. 또한 민영화 추세를 역전시켜 중앙집중적 계획경제를 회복시켜야한다. 한 달 한 달이 지나갈 때마다 노동계급 혁명이 직면할 과제는 더욱더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SL은 우리가 소련을 방어할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자국가가 멸망했다고 우긴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도 너무 황당하다.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소련 노동자국가가 멸망했다는 사실에 기초해 행동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도 이 쓰디쓴 진실을 인정해야한다. 반혁명의 대세에 저항하는 구소련 노동자들은 언제 국가권력이 착취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는지 알고싶어할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을 지도하기를 열망하는 자칭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그 운명적 순간에 어떤 입장을 제시했는지를 알고싶어할 것이다. 

  

"유리 안드로포프 여단" --- 먼 옛날 먼 곳에서 일어난 일 

SL은 자신들이 러시아 문제와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정치에 정통하고 있다고 항상 자랑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스탈린 체제의 최후 위기 과정 내내 언제나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1989년 후반 동독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봉기가 터졌을 때 이들은 "노동자 정치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자본주의 통일에 대해 노동계급이 충분히 강력하게 저항하여 집권 통일사회당이 분열을 일으켜 이중 상당 부분이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는 노동계급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 전망에 기초하여 SL/ICL은 많은 현금과 동원 가능한 모든 중핵들을 투입하여 사태에 개입했다. 1990년 1월 통일사회당이 SL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베를린의 트렙토우 공원에서 반파시즘 시위를 주최했을 때 SL의 위대한 지도자 제임스 라버쓴은 혁명의 성공에 대해 너무 환상에 사로잡혀 당시 통일사회당 당수였던 그레고르 기지와 회담을 주선하려했다.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대되었던 정치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흡수통일에 저항하는 대신 동독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친자본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동독을 청산시켜버렸다. 동독 의회 선거가 3월에 열렸을 때 통일을 위한 준비는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SL은 여전히 노동자 정치혁명이 진행중이라는 환상을 고집하여 노동자와 병사들이 곧 소비에트를 수립하여 공장을 점거하고 허약한 친자본주의 정권에 맞서 이중권력을 수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SL/ICL 지도부는 수십만 노동자들이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지하여 자신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들의 지도부로 곧 격상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들이 독일맥주애호연합보다 훨씬 더 적은 득표를 기록하였을 때 이들은 진짜 대재앙에 빠졌다.  독일의 대참패는 8월 쿠데타에 대한 SL의 중립 입장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결과는 SL이 그 동안 스탈린주의 정권들에 대해 병적으로 호의를 보인 편향의 절정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공세와 내부 반혁명 기도에 반대해 스탈린주의자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왔다. 그러나 퇴보한 그리고 기형화한 노동자국가는 스탈린주의 기생충들을 몰아내는 정치혁명에 의해서만 장기적으로 방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SL은 군사적 방어와 정치적 지지의 분리선을 너무 자주 침범했다. 1983년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KKK단 반대 시위에 동원된 SL의 시위대 이름은 당시 소련공산당 총서기 안드로포프의 이름을 따서 유리 안드로포프 여단이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는 1956년 헝가리 노동자 정치혁명 때 투쟁을 진압한 장본인이었다. 안드로포프가 사망하자 [노동자 전위]는 일면에 그를 칭송하는 부고와 시를 실었다. 폴란드의 스탈린주의 독재자 야루젤스키 장군의 사진은 SL 뉴욕 본부의 벽을 장식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한 소련군의 군사적 승리를 촉구하는 대신 SL은 크렘린궁의 개입을 "환호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처참하게 붕괴하자 SL의 스탈린주의 정권지지 편향은 대단히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8월 모스크바 쿠데타가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노동자 전위]는 옐친 진영과 SL이 "애국주의자"라고 단순히 부른 관료집단의 보수파 진영 사이에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중용 노선을 걷고 있었다: 

"소련의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자'와 '애국주의자' 사이의 잘못된 구분을 초월해야 한다. 이 두 분파는 반동적이며 기생적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최종적 퇴보의 산물일 뿐이다. 두 분파 모두 세계 자본주의의 이해를 위해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적들이다." --- [노동자 전위], 1991년 3월 15일자 

이 "잘못된 구분"이 노동자들이 편을 들어야 할 대결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노동자 전위]는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결이 정말 8월에 나타났을 때 SL은 과거 주장했던 스탈린주의 정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 경향에서 극단적으로 이탈하였다. 그리고 공공연한 반혁명 세력에 대항해 스탈린주의자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야 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초보적인 전술적 의무를 방기해버렸다. 8월 쿠데타에 대한 SL의 부끄러운 중립 선언과 소련 노동자국가의 멸망을 거부한 이들의 태도는 이들이 그 동안 보유하고 있다고 자임해온 혁명적 지도력의 허세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제 4 인터내셔널의 부활을 위해! 

지금부터 50년도 더 전에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의 혁명 지도력을 확립하는 투쟁은 궁극적으로 인류 문화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 지도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에 헌신하는 투사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74년 러시아 혁명 가운데 경험되었던 승리, 퇴보, 궁극적 멸망 등과 관련된 교훈들을 흡수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현재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은 아주 미약하다. 그러나 강령적 명확성을 위해 투쟁하려는 혁명적 의지와 적극성이 결합될 경우 혁명 중핵들은 다시 결집되어 다시 한번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이 혁명적 재편은 트로츠키주의의 권위를 거짓 주장하는 온갖 개량주의, 중도주의 약장수들의 혼란, 동요, 배신을 정치적으로 폭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격렬한 정치투쟁,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세계정당 즉 제 4 인터내셔널은 부활할 것이다!    

-끝- 

[Soviet Rubicon & the Left]([1917] No.11,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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