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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탄]차 예법 이야기와 선녀와의 소개팅.
게시물ID : humorstory_1978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ickyo
추천 : 3
조회수 : 51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0/09/13 00:59:21
 
옛날에는 차를 마시는 데에도 예법이라는 게 있어서,
차를 마실때에는 자세를 어찌하고, 순서는 이렇게 되어있고 같은 것 따위가 있었드랬죠.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왜 그런것들 있잖아요. 현대로 말하자면 고급 레스토랑의 드레스 코드라든가, 양식이나 일식을 먹을때의 젓가락, 포크, 나이프 사용법과 먹는 방법같은거. 어쨌거나 옛날에는 그걸 모르면 교양있는 성인이 아니라는, 그런 인식이 있었는데요. 뭐 요새사람들이나 옛날 사람들이나 먹고살기 힘든건 똑같아서 그런지, 실제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그런 풍류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이말입니다.

한번은, 옛날에 돈만 모으기 좋아하던 부잣집 대감이, 풍류를 한번 즐겨보려고 사람들을 모아서 한다는 것이 차의 색깔을 내려고 찻잎이 아니라 콩가루를 끓이고, 거품을 내려고 세탁할때나 쓰이던 세제대용의 나무껍질을 끓여 사람들에게 대접하니, 사람들이 참 고역이더라 이말입니다. 풍류를 한번 즐기고 나면 속이 아파 죽겠는데, 이거 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서로 이상하다 말도 못 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이 어르신이 차는 본디 함께 즐길 다과가 있어야 한다고 내놓는것이 딱딱하게 굳은 떡 아니겠습니까. 어디서 차 예법에서 먹는 다과는 까맣고 단단하다는 말만 들어서는 떡을 굳혀버렸으니 맛이 있을 턱이 없지요. 이런 차 예법회를 매주 열어대자, 사람들은 한두번 꾸역꾸역 예법을 지킨답시고 먹다가도, 이내 배가 부르다는 핑계로 다 굳어버린 떡을 싸와서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있는 절간에 시주랍시고 버리고가는 겁니다. 그 떡들이 시주로 들어오면 매주 절을 관리하는 스님이 '또 차예법이구먼..'하며 한숨을 쉬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도 그럴게 매주 주는 떡을 버릴수도 없고 꾸역꾸역 먹었어야 할 테니 참으로 불쌍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뭐, 이런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이 살면서 그렇게까지 괴로움을 참는 예의를 갖출 일이 있겠나 싶었지만, 저에게도 결국 난감한 일이 생겼드랬지요. 왜 옛날에 마을의 어르신이 차예법으로 풍류를 즐기자고 하면 마을 어른들 모두가 갑자기 어디가 아파서 못간다고 하듯이 저도 풍류와 예법을 모르는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수가 없는겁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게 현대의 풍류 '소개팅' 이었단 말입니다. 게다가 저같이 얼굴도 안되고 돈도 안되고 그렇다고 딱히 특기도 없는 잉여에게 첫 소개팅을 주선해 주는 사람이 하필이면 독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라, 아프다고 하면 꼬치꼬치 캐묻고, 바쁘다고 하면 차일로 약속을 잡고, 안될거 같다고 하면 섭섭하다느니 왜그러냐느니 물고 늘어지니, 어쩔 수 없이 창피를 당할 각오를 하고 나갔더라 이말입니다.


그렇게 지하철을 덜커덩 덜커덩 타고 도착한 카페의 테이블 앞에는 완전 이쁜 백색 원피스의 여성분. 싱긋 웃으며 긴 생머리를 찰랑일때에 심장 박동수는 분명 정상수치 곱하기 둘 하고도 쩜 오 정도 되었을걸요. 어쨌거나 머리속에는 '대박이다 대박이다 어쩌지'만 계속 리플레이 되는 와중에, 주선자가 뒤늦게 도착하더니 헉헉대며 간단히 소개를 해주더군요. 그리고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주선자의 차를 타고 어딘가의 근사한 스카이 라운지 정통 레스토랑에 가더라 이말입니다. 주선자 형이 워낙에 잘사는 사람이고 그 친구라길래 그런가보다 했지만, 고작해야 금요일들 레스토랑이나 귀빈들 레스토랑, 혹은 뒤로나가라 고기집 정도를 최대한도로 잡은 저에게는 당황스러운 장소였죠. 내렸더니 고개를 쳐 들어도 끝이 안보이는 호텔이라니.. 심지어 벨보이가 꾸벅하며 문을 열어주는데 이걸 내리면서 팁이라도 줘야 하나 싶고 아주 식은땀이 뻘뻘뻘 나는겁니다. 가뜩이나 차 안에서 긴장되서 멍청한 질문과 답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초조했지요. 일단 내려서 팁을 주자! 결정하고는 천원짜릴 한장 쓰윽 내미니, 벨보이의 표정을 잊을수가 없네요. 당황과 어이가 반반씩 섞인 아수라백작이랄까요.


어쨌거나, 스카이 라운지에 올라간 우리들은 정말 멋진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코스요리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둘이서는 아주 익숙한 듯 떠들고 있는데, 저는 이게 음식이 입에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지요. 인터넷에서 필사적으로 외운 포크놓는 법이나 입가를 닦는 법, 와인을 마시는 법등을 어줍잖게 따라하니, 지금 생각하면 그 꼴이 얼마나 우스웠겠어요. 처음부터 아 이 여자는 천상의 여자이지 나같은 구렁텅이속 인간과 어울릴 그녀가 아니구나 싶었는데, 막상 여기 오니 청바지에 티를 입은 제가 너무 너무 없어보이고 가시방석같이 불편하더라 이말입니다. 그러고도 그녀는 사람이 착한건지 성실한건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취미는 뭐냐, 자주 하는건 뭐냐, 대학생이냐, 공부는 재미있냐, 자기는 어땠고 저쨌고 말을 걸어주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먹던 고기를 턱쯤에 두번 부딫혔더랩니다. 물론, 한번 부딫힐때 웃는 모습이 이뻐서 두번째는 좀 노리고 하긴 했습니다만.


식사를 어찌어찌 마치고, 알 수 없는 이름의 디저트는 먹는 방법이 따로 있을 것만 같아, 점원에게 배가 너무 불러서 못먹겠다며 사양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겠다는 안도감에 빌지를 슬쩍 봤는데, 값에 0이 두개쯤 더 붙어보이는 겁니다. 너무너무 당황스러워서 이걸 어쩌나 하고 있는데 우리 구세주 형님이 언제 디저트를 다 드셨는지 이 자리는 자기가 계산하겠다며 총총 들고가는 것이지요. 대체 이 사람은 둘이 데이트 하면 딱 좋을텐데 왜 데리고 나온거야 싶었죠. 크아. 아무튼 0 두개에 심볼이 쪼그라 드는 경험은 영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직원 식당이 멤버쉽 카드라며 한장씩 주더라구요. 다음에 오면 할인과 서비스를 제공해준다고. 사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맛있지도 않았지만 이 값을 내고 여기 다시오는일은 세번 죽고 네번 깨어나 해적왕이 되어도 없을거라고 다짐했기에 아무 의미도 없었지요.


식사를 끝내고 내려와 우리는 로비에서 웃으며 헤어졌습니다. 여성분께서는 그래도 연락처를 물어봐 주시며 다음에 또 만났으면 좋겠다는 멘트도 날려주셨고, 덕분에 제 가슴이 맹덕콩덕 했지요. 솔직히 말하면, 그 말 한마디에 형 차 말고 나랑 2차 가자고 꼬시면 천리장성을 쌓을 수 있게 되는거 아닌가 하는 망상이 들었는데 이미 너무 심신이 지친 상태라 빨리 집에 가고 싶더라구요. 결국 있지도 않은 팔촌의 사돈의 팔촌의 급한일을 만들어 반대방향으로 가야한다며 애써 둘을 보내고, 콜로 택시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지갑에 현금을 확인하려고 꺼냈는데 지갑에 아까 그 스카이 라운지 멤버쉽 카드가 있더라구요. 


처음에는 이걸 친구들에게 자랑이나 해볼까 하기도 했지만, 영 꼴도 웃기고, 카드 디자인도 별로 안이쁘고, 여기 다시 올 일도 절대 없으리란 확신이 들어, 그냥 도로 앞 화단에 휙 하고 던져버렸더랩니다. 그리고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호텔 직원으로 보이는 한 청소 아주머니가 화단을 빗질하시는데 이게 왠일, 그 멤버쉽카드가 수장? 기십여장이 쏟아져 나오는겁니다. 그리고는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또 라운지 카드구만 아이고.."하시는 겁니다. 저처럼 다른 사람들도 맛없는 음식에 말도 안되는 값에 카드를 던져버렸다고 생각하니, 아주머니 힘드시게 화단에 무단투기한 제 죄는 생각도 못하고 푸하하 하고 웃어버렸지요. 아, 역시 사람은 맞는 옷을 입어야 해. 하며 그날 저녁 편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해장국 한그릇씩 먹었더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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