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연일 '권력자'라는 표현을 쓰며, 마치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듯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서청원을 비롯한 친박계 인사들이 발끈하면서 일제히 반박에 나섭니다.
공천을 앞두고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양상인데, 과연 김무성은 박근혜 대통령과 정면승부라도 벌일 생각일까요?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글쎄?.... 라는 생각입니다.
김무성이 박근혜와 전면전을 벌일 정도의 배짱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김무성의 지지층이 박근혜 지지층과 상당부분 겹치기 때문입니다.또,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라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처럼... 지금까지 박대통령 앞에서 김무성이 보여왔던 납작 엎드리는 행보를 볼때, 그럴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무성이 전면전을 벌인다면, 야권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지요 ).
이와 관련하여, 작년 10월 12일 김무성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총대를 메고 나선 다음날... 김무성이 취하고 있는 스탠스와 전략에 대해 분석한 글을 서프 게시판에 올린적이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김무성이 유독 박대통령 앞에서는 왜 그렇게 낮은 포복을 해왔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 참, 그런데 오늘에서야 지난주 파파이스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영입인사인 디자이너 김빈 씨가, "우는 새 이야기 혹시 아세요?"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김어준 총수도 그렇고,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셨을 것 같은데... 마침 제가 쓴 글에 그 얘기가 있어서, 다시 한 번 올리는 바입니다( 김 빈씨가 설마 그 글을 읽고 말했던 건 아니겠지요? ^^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흔히 일본인들 사이에 ‘전국(戰國)시대 3대 영걸’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다. 그들 모두 한 때나마 천하를 제패했지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방식은 서로 전혀 달랐다. 그래서 에도시대 말기부터 일본에는 이런 시조(하이쿠)가 전해져 내려온다.
‘누군가 두견새를 보내왔다. 그러나 두견새는 울지 않는다.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목을 쳐버려라. (오다 노부나가)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울게 만들어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여기에서 ‘울지 않는 두견새’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세력이나 정적을 뜻한다. 결국 해석하자면, 오다 노부나가는 무조건 정적들을 죽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갖 수를 써서 내편으로 만들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내편이 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렸다는 얘기다.
( 좌측으로부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 wikipedia)
‘인내의 화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장 먼저 천하통일의 꿈에 도전했던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하극상과 참혹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에 일본통일의 초석을 깔았다. 그 다음을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천하의 주인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통일을 굳건히 유지하고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백65년 동안의 에도(江戶)시대를 열었다. 3인의 인물 중, 최후의 승자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던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 ~ 1616)는 한마디로 말해서 ‘인내의 화신’이었다. 왜냐하면 인내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그의 삶 자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아이치 현에 해당하는 지역의 오카자키성 성주였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불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매우 소심하고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서쪽으로는 오다 가문으로부터 압박을 받았고, 동쪽으로는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점점 세력이 위축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살에 불과한 나이에, 그는 어머니와 헤어지는 불행을 겪는다. 어머니의 친정이 오다 가문과 연합을 하자 그의 아버지가 이마가와 가문의 눈치를 본 나머지, 이혼을 하고 말았던 것. 그것을 시작으로 불행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여섯 살부터는 무려 13년간을 인질신세로 살아야만 했고, 무능했던 아버지는 가신에게 암살을 당했으며, 가문의 영지가 모두 이마가와 가문에게 몰수당한 채 가문이 멸문을 하고 만다.
그러다 전국시대 3대 야전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오카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하자, 극적으로 인질 신세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에 남아있던 장인과 장모는 자결을 해야 했고, 가신들의 가족들은 십자가에 묶인 채 창에 찔려 죽었다.
그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맺으며 비로소 정치적인 위상이 회복되었으나, 또 다른 참담한 비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적과의 내통을 의심한 오다 노부나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에야스 스스로 자신의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장남에게는 할복하라는 명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끔찍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그는 절치부심,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 三猿像. Three wise monkeys - wikipedia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리는 사당인 일본 닛코 도쇼구(東照宮, 동조궁)에는, 각각 손으로 눈·귀·입을 가리고 있는 세 마리의 원숭이 상(像)이 조각되어 있다(三猿像. 영문으로는 ‘Three wise monkeys’라고 번역). 함부로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말라는 뜻이다. 그 험난한 세월을 인내로 이겨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슴에 새겼던 의미심장한 처세훈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후의 한 판 승부 세키가하라 전투, 이에야스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다
오다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의 주인이 됐다. 원래 미천한 집안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맨 처음 맡았던 일은 ‘조리토리(草履取り)’였다(조리토리란 무가(武家)에서 주인의 짚신을 들고 따라다니던 하인을 가리킨다. 그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늘 짚신을 가슴에 품고 다니다가 따뜻하게 덥혀서 건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처세술과 권모술수에 능한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실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갑자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머나 먼 낯선 땅 간토(關東)지방의 다이묘로 임명한다. 겉으로는 치하하는 형식이었으나 사실상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20만석에서 250만석의 넓은 영지로 옮겼다고는 하나, 멀리 중앙의 정치무대로부터는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 게다가 그 지역 주민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저항감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이를 무마시키는데 온힘을 쏟아야만 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은밀한 계략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이에야스에게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비록 권력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컴플렉스로 작용했다. 천하를 지배하거나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뭔가 남들을 능가할만한 뛰어난 업적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륙침공이라는 허황된 목표를 세우고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이 때 여러 다른 지역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넓히기 위해 앞 다투어 임진왜란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홀로 군사력을 축적한다. 영지의 혼란이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는 핑계였다.
그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유일한 실력자가 됐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다이묘들을 회유하여, 차츰 자신의 휘하세력으로 그들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복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대를 모집하고 이에야스와 대치상태에 돌입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600년 음력 9월 15일, 지금의 기후 현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서 역사가 뒤바뀌는 최후의 대격전이 펼쳐진다. 전국의 모든 다이묘와 병력들이 참가한, 그야말로 대규모 전투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전국시대가 마무리되고 에도 막부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동시에 중세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구(舊)일본육군 참모본부가 발간했던 《일본전사》(日本戰史)에 따르면,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82,000명이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은 104,000명이었다. 한마디로 이에야스의 병력이 수적인 열세였던 것. 게다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만 8천여 병력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실제로는, 동군보다 서군이 두 배 가까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규모였다.
( 세키가하라 전투 병력 배치도. 붉은색이 동군, 푸른색이 서군, 주황색은 서군 내부에서 배반한 부대 - wikipedia )
포진한 형세 역시, 이에야스에게는 지극히 불리했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넓게 학익진 형태로 동군을 포위한 반면, 이에야스의 군대는 골짜기에 갇힌 채 범의 아가리로 병력을 투입하는 것과도 같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형국이었다. 병력의 규모나 형세로 볼 때,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기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이에야스의 동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내막은 이렇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부터, 중앙정치무대는 두 개의 세력으로 패가 나뉘어 대립과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도요토미 정권 수립에 군사적으로 기여하고 임진왜란에도 참가했던 무장 세력인 ‘무단파’(武斷派)와, 행정·경제·병참·종교 등 전투 외적인 분야에서 활약했던 ‘문치파’(文治派)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미쓰나리는 전투경험이 거의 없는 행정가 출신이었다. 때문에 미쓰나리 진영의 무장들은 미쓰나리에 대한 복종심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짧은 시일 내에 갑작스럽게 모인 군대였기에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이에야스는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실전경험이 거의 없어서 여러 장수들과 자주 충돌하곤 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야말로 도요토미 정권을 위태롭게 하는 간신이고, 도요토미 정권의 원로로써 이를 두고만 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참전 경험이 있는 무장 세력의 다수가 이에야스의 동군에 포진하게 된다. 그리고 미쓰나리 진영에 속해있던 다이묘나 장수들에 대한 회유작업 역시, 사전에 치밀하게 진행됐다.
명성이 부족한 관계로 미쓰나리 대신 총대장으로 내세웠던 모리 테루모토의 부대조차, 전투가 시작된 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꼼짝도 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 미쓰나리가 열을 내며 싸움에 참가하지 않은 무장들에게 참전할 것을 독촉하는 봉화를 올렸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학익진의 우측 날개에 해당하는 5개 부대가 배반을 한 채, 아군인 서군을 갑자기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선이 급격히 무너져버린다.
특히 학익진 우측에 위치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도요토미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정유재란 때 총대장직을 수행하며 전투에 참가했었다. 그런데 전투실패에 대한 미쓰나리의 비난에 의해, 영지의 일부를 몰수당하며 치욕을 겪었었다. 그래서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 점을 간파하고 치밀하게 접근했던 이에야스에게 이미 배반을 약속한 상태였다.
이에야스의 회유작업에 넘어간 장수들 때문에, 서군은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동군의 공격 앞에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병력 숫자와 지형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동군인 이에야스의 부대가 맹렬히 공격을 가하자 압도적인 승리로 결국 끝을 맺는다. 결론적으로, ‘싸움은 숫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격언이 실제로 입증된 전투였다. 일본 전체의 병력이 집결한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에야스는 천하를 호령할 유일한 권력자로서 최종적으로 우뚝 서게 된다. 에도 막부시대 265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대’가 꼬랑지를 내린 이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박근혜 대통령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작년 10월 16일, 이른바 ‘상하이 개헌발언’때 부터였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발끈해서 공격에 나서자 김무성 대표는 그 다음날인 17일, 단 하루 만에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사과를 했다. 이때부터 언론에는 “김무성 대표가 꼬랑지를 내렸다”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무대(무성 대장)’라는 별명답지 않게, 왜 그렇게 굴욕적인 사과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종편방송 채널A가 뒤늦게 11월 3일 방송을 통해 관련내용을 보도했다.
( 김무성 대표가 상하이 개헌발언 하루 만에 사과한 이유 - 채널 A 방송화면 캡처 )
김무성 대표의 개헌발언이 알려지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김무성 대표에게 질책성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노(大怒)한 나머지, 진행되고 있던 외국에서의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사태가 그렇게까지 흘러가자, 김무성 대표가 결국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핵심내용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화가 났던 것은, 단지 외유중이라는 시점상의 문제뿐이었을까? 사실 그 동안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측면이 있지만, ‘시점’보다는 ‘내용’이 더 큰 문제였다. 당시 김무성 대표가 주장했던,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가 바로 그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선출된 대통령이 외치(外治)를 담당하고 총리가 내치(內治)를 담당한다. 그런데 말이 권력분점이지, 대통령보다는 총리가 훨씬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한다. 의원내각제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대통령은 다수당 대표가 정해준 각료를 그대로 임명만 할 뿐이다. 모든 행정은 총리가 담당하고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도 대통령이 아닌, 총리가 참석한다.
만약 김무성 대표의 구상대로 2016년 4월 총선 이전에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로 개헌을 하게 된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그야말로 ‘식물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이 어찌 ‘대노(大怒)’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때 김무성 대표는 속마음을 들켰을 뿐만 아니라, 기 싸움에서도 박대통령에게 밀린 것이다. 그래서 김무성 대표가 “당·청은 공동운명체이자 한 몸으로, 박근혜 정부의 성공이 곧 새누리당의 성공이다”라고 아무리 외쳐도, 대통령이나 청와대는 이를 믿지 않는다. 한마디로 박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는 근본적으로 화해가 불가능한 사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이후로도 당청관계가 삐걱 거릴 때마다 김무성 대표는 굴욕적인 후퇴를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오픈 프라이머리에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지만 스스로 실패를 인정했고, ‘안심번호 공천제’와 ‘우선 공천제’ 등으로 거듭 후퇴를 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픈 프라이머리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그는 정계은퇴 선언을 했어야 했다.
김무성 대표의 거듭된 후퇴, 정말 최후의 일전을 위한 것인가?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하는 그의 행보는, 평생을 ‘인내’로 버텼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략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물론 김무성 대표가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참고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양보하고 굴욕적인 상황을 겪더라도, 결국 최후의 일전에서만 승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행보를 보면, ‘무대’의 세키가하라 전투가 과연 가능할지 참으로 의문이다. 혹시 ‘시간은 결국 우리 편’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전혀 ‘무대’답지 않은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비박계 의원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 우선 문제다. 안심번호 공천문제가 불거졌을 때, 청와대와 친박계 의원들이 번갈아가며 일사분란하게 김무성 대표를 공격했던 반면, 비박계 의원들 대부분은 그저 침묵하면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는 김무성 대표가 정말로 대통령과 일전을 불사할지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의 견고한 지지층과 높은 지지율이, 최후의 일전을 결심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의지’의 문제다. 만약 이번에도 끝까지 양보를 거듭한 채 후퇴하는 모습만을 보인다면, 비박 진영 내부에서부터 그의 리더십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권에서도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매번 ‘작전상 후퇴’만 거듭하며 끝내 싸우지 못하는 장수에게, 과연 국민들이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 최후의 일전을 전제로 하지 않는 거듭된 후퇴는, 그저 싸움이 두려운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
그런 의미에서 갑자기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와 호흡을 맞추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의 총대를 메고 나선 이유 역시 참으로 궁금하다. 우리는 어쩌면, ‘무대’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영영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