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미아가 되다.
친구에게 말하듯 편안한 말투로 써볼께. 불편하면 패스해주시면 감사하겠어.
내가 1992년, 러시아 개방 직후에 초에 미국 유학을 떠나 랭귀지스쿨을 다니다가 여름방학때 우연히 미국 교포 2세들 10명과 함께 한 달간 러시아여행을 하게 되었지. 모스크바 쌍뻬쩨르부르그(레닌그라드) 체첸국경마을까지 간 적이 있었어.
단촐하게 갔는데 정말정말 재미가 있었어. 당시는 달러-르불화 환율이 아주 좋아서 저렴한 가격에 아주 즐겁게 여행을 할 수 있었지. 더없이 좋았던 것은 내가 여행 부단장 비슷한 직책을 갖고 참가를 해서 난 공짜로 얹혀갔다는 사실이야. 그 경험 뒤로도 나는 모집인으로 공짜 해외여행을 많이 했어. 여행객을 사람을 15인 이상 모집하면 공짜티켓이 나오기 때문에.
재미난 경험들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래. 모스크바 구석구석 관광. 볼쇼이서커스단 공연 관람(볼쇼이발레단 공연도 꼭 봐. 수준이 장난 아냐). 도저히 넓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에르미따주 박물관 관람(나중에 꼭 가봐. 엄청나). 침대열차로 편도 장장 39시간짜리 러시아 남북횡단여행.
내가 갔을 때에는 러시아가 개방 직후라서 그런지 먹을 게 아주 부족했는데, 신기한 것은 당시에 캐비어(철갑상어알)이 너무 흔했고, 특히 르불화-달러화 환율이 너무 좋아서 기차여행을 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끼도 캐비어를 먹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거야. 신선도도 좋아서 전혀 비리지도 않았어. 러시아인들의 기본 식사메뉴가 이랬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캐비어를 얹어서 먹고, 달걀과 생쪽파를 반찬처럼 곁들이고, 흑차로 입가심. 이게 기본이었지. 지금은 러시아에서도 아주 부자들 아니면 캐비어 먹기 힘들대. 한국에서 사람들과 고급 호텔부페에 가면 가끔 캐비어 나오는데, 다들 먹는 방법 몰라서 그냥 접시에 캐비어를 덜어와서 먹고 마는데, 그나마 짜고 비리니까 잘 안 먹어. 그런데 내가 작은 바게뜨 빵조각에 버터 바르고 그 위에 캐비어 얹어서 회초밥 접시처럼 내오면 사람들 완전 감동. 정말 고소해. 장담하건대 원수를 내편으로 만들 수 있어. 한번은 아내를 위해서 한국에서 캐비어를 구매해봤지. 가운데 손가락과 엄지손가락 끝을 붙여봐. 동그랗게 말아지는 손가락 두께의 빈 공간에 들어갈 만한 양이 한국 돈으로 4만원 정도해. 둘이 두 조각씩 먹을라면 20만원 든다. 아웅 나도 흙수저라 두 번 못해.
사이다는 이게 아닌데, 본론으로 돌아가볼게.
사건은 우리가 모스크바공항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생했어. 우리가 탈 비행기가 러시아 국적항공기 아에로플로트였는데 캐나다를 경유해서 가게 되어 있었어. 그런데, 러시아 캐나다 대사관 직원이 출국심사를 하는 거야. 환승 중에 캐나다로 밀입국하는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서야. 그런데 이넘들 때문에 출국심사가 지연되더니, 비행기 출발 20분을 앞두고 딱 나만 승선거부를 하는거야. 미국 애들은 진즉에 비행기를 탄 상태고 나만 러시아에 덜렁 남은 거지. 결국 비행기는 날 남겨두고 떠났어.
날 승선거부시킨 캐나다대사관 직원에게 나는 그럼 어떻게 미국으로 돌아가냐고 물으니 냉정하게 대답하더군. “I don't know. I don't care.”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라는 거지. 그리고 계속 따져 물으니까 하는 말이, 같이 여행했던 친구들 중 하나가 나는 가난한 친구라고 얘기했다는 거야. 취업을 위해서 캐나다로 밀입국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지. 그게 사실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그렇게 걔 중에는 나랑 안 친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남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릴 고약한 심뽀를 가진 아이들은 아니었거든.
난 한순간에 국제 미아가 됐지. 당시 모스크바공항이 얼마나 후졌냐면, 지방의 허름한 고속버스 터미널 수준이었어. 넓기만 넓었다 뿐. 더 심각한 건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었어. 난 일단 모스크바 시내에 사는 통역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 나이도 비슷한 고려인 친구였어. 한국말은 못했어. 영어로 통했지. 그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일단 나를 데리러 공항으로 오기로 했어. 그런데 워낙 러시아가 넓은 곳이라, 그 친구가 공항까지 오는데 두 시간이 걸려. 나는 그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
그런데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 외무부에서 교육을 받은 내용이 생각나더라고. 지금은 그런 게 없지만, 당시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된 지 얼마 안된 시기였기 때문에, 여권을 만드는 과정도 약간 더 복잡했고, 여권을 발급받기 직전에 해외여행에 관한 정부교육을 받아야 했어. 그 교육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여권을 나눠줬지. 젋은이들이 들으면 신기할거야.
그런데 모스크바공항에서 고민고민을 하다 보니 그때 교육받던 내용이 기억나는 거야. 만약 내가 타고 가려는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서 출항을 못하면 그 항공사 사무실에서 endorsement라는 걸 받을 수 있어.
광범위한 뜻으로 사용되는 말인데, 이 경우 자기네 사정으로 비행기 탑승을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도장을 의미해. 그 도장이 찍힌 항공권을 갖고 있으면 내가 원하는 어떤 항공사의 어떤 비행기라도 대신 타고 떠날 수 있어. 단 자리가 있는 경우에. 그리고 여기서 발행하는 항공권 차액은 원래 계약했던 항공사가 지불하게 되어 있지.
이 내용이 떠올라서 아싸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 경우는 아에로플로트의 문제가 아니었잖아. 그래서 그쪽에서는 엔도스먼트 찍어주는 것을 거절할 가능성이 있었지. 그래도 시도해보기로 했어. 그런데 말이지, 진짜 러시아 공항에서 영어하는 사람 찾기가 어렵고 대략들 불친절해서 아에로플로트 항공사 사무실을 찾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렸어.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천국의 문을 찾은 것 같았지.
나는 심호흡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갔어. 딱 한 남자가 있더군. 다이하드1에 나오는 악당 두목 알란 릭맨 같이 생겼었어. 구렛나루 턱수염도 있었는데, 회색 머리와 수염이 날카로운 인상을 주더군. 나는 긴장하며 물었어. “Can you speak English?” 모스크바공항에 영어하는 사람이 너무 드물었기 때문이었지. 그 친구가 대답하더군. “약간 할 줄 알아” 사실은 영어를 아주 잘했어. 나랑 비교할 수 없이. 지금 생각하면 아주 미안해. 그 질문으로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는데, 아주 품위 있게 대해줬어. 나는 사정을 설명하고 엔도스먼트를 찍어줄 수 있냐고 물었지. 그 친구는 너무 쉽고 편안하게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더군. 항공권에 아에로플로트 도장을 받고 보니, 한 시간 반 동안 긴장했던 게 완전히 풀리더군. 내 몸이 물 밖의 낚지가 된 기분이었어. 나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왔어.
이제 내가 타고갈 항공사를 고르는 일만 남았지. 나는 젤 비싼 비행기를 골랐어. 짜잔. 델타항공. 당시로서는 젤 비싼 비행기였어. 델타항공사 사무실로 갔더니, 다행히(?) 그 사무실 직원도 영어를 하더군. ㅋㅋ. 사정을 설명하고 나는 비행기 스케줄을 확인했어. 다음날 떠나는 비행기에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나는 일단 예약을 했어. 그리고 한 번 더 욕심을 내서 당일 떠나는 비행기는 없냐 물었지. 있기는 하지만 자리가 다 찼다고 하더군. 그러나 가끔 결원이 생기기 때문에 아주 급하다면 출국 게이트 앞에서 대기(stand by)하라더군. 예약자 중에 비행기를 안타는 사람이 생겨서 자리가 나면 타고 가라고. 그런데 비행기는 빈 자리 없이 다 채워졌고 모스크바를 떠났어. 난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모스크바에서 지내야 했지.
난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친구를 기다렸어. 내가 기다리는 동안 쓴 시간이 많이서 많이 기다리지 않고 그 친구를 만났지. 그리고 그 친구 아파트로 돌아가 하루 묶었지. 거기서 몇가지 재미있는 일이 또 있었어. 우선 그 친구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준 순두부를 먹었지. 귀한 거였어. 두부 조리법을 일제 강점기부터 잊지않고 보존해온거지. 두 번째로 그 친구의 기타 연주를 들었는데, 수준급이었어. 그런데 기타가 참 신기하게 생겼더군. 현대식 기타는 네크(neck)와 바디가 평평하게 붙어 있잖아? 그런데 그 기타는 마치 바이올린처럼 네크가 바디 위에 떠 있는 형태였어. 얼마주고 샀냐 했더니 5달러줬대. 당시 미국 알바 시급 수준이었지. 내가 10달러 줄테니 팔라 했어. 그랬더니 안 된대. 당시 러시아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물건이 없어서 그런 제품을 구하기 힘들다는 거야. 워낙 오픈마켓의 사정이 열악해서 러시아 남자들의 능력은 블랙마켓에서 물건을 조달하는 능력으로 평가되는 분위기라고 하더군.
내가 델타항공을 타게 된 거 말고 두 가지의 사이다가 더 있어.
우선 하나는, 그 친구 집에서 머무르면서, 당시에 모스크바 여행에 동행했던 러시아 처녀랑 장시간 통화를 하게 되었다는 거야. 통역사 친구가 다른 전화기를 들고 통역을 해줘서 가능했지. 정말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어. 인형같이 생긴 러시아 처녀였지. 그 통화 덕에 아주 친밀감이 높아졌어. 그 처녀가 미국에 오게 되었고, 미국에서 한 일주일간 감동적인 데이트를 했지.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만나기로 했었는데, 한국에는 안 왔어. 다른 친구에게 들었는데, 그녀가 러시아 국적인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국적인이고, 러시아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러시아인 남자랑 결혼하기로 했대. 첨엔 사이다 나중엔 보드카야. 그 얘기를 듣고 국내에서 최초 개봉한 Intergirl이라는 영화보고 울었어. 영화내용은 그 여자친구랑 전혀 관계없지만. 러시아어만 들어도 눈물이 나던 시절이 있었지. 나는 그 여자애를 찍은 실물크기의 사진을 준비해뒀었지. 유화 캔버스 천에 코팅해서 제작해뒀었어. 대형 원통에 둘둘 말아서 보관하고, 펼치면 압정으로 벽에 꽃아 둘 수 있는 예술적인 사진이었는데, 갖고 있으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한국에 온 친구에게 들려 보내줬어. 원본 필름하고 같이. 오래 지나고 나니 다 좋은 기억이야.
또 하나의 사이다는 말이지. 델타항공 비행기였어. 우리가 미국에서 모스크바로 타고온 아에로플로트는 완전 거지같은 비행기였어. 바닥에 카페트가 왕창 벗겨져서 알미늄 바닥 끄는 소리가 났지. 여행시간 동안 거의 환기를 안 해줘서 방귀냄새가 비행기 안에 가득차고. 장거리 여행 많이 한 친구들은 무슨 얘긴지 알거야. 비행기에서 먹는 음식이 똑같은데, 환기를 안 하면 그 음식이 소화된 특유의 방구냄새가 온 객실에 가득해져 식사시간 후부터. 식사도 형편없었지. 딱 기본식사만 나왔어. 식사후 물과 탄산음료 쥬스가 전부였어. 주류는 돈주고 사먹어야 했으니 가난한 나는 당근 불가. 당시로서는 최저가 항공사였으니.
반면 내가 갈아탄 델타항공은? 젤 비싼 비행기를 운용했으니 당연 모든 것이 완전 차원이 달랐지. 여관급과 호텔급의 차이였어.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럭셔리하게 썰어낸 과일모둠을 서비스하더군. 러시아에서는 전혀 먹어보지 못한 거야. 그 중에서 특히 깔끔하게 썰어서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최고급 그레이프후르트(자몽)는 나로 하여금 오르가즘을 느끼게 만들었어. 나 승무원에게 부탁해서 자몽만 열 개를 먹었어. 마지막 사이다는 말이지. 비행기 이코노미석 자리가 꽉 차서 내가 비즈니스석까지 탔다는 거야. 당시 한국-뉴욕 왕복 비행기가 80만원 하던 시절에, 수백만원짜리였던 비즈니스석. 다리 쭉뻗고 왔지. 신선한 고급과일 연신 먹어댔지. 포도주 한 없이 먹었지. 인형 같은 승무원 아가씨랑 내가 공항에서 겪은 얘기하면서 노닥거렸지. 신라면 끓여달라고 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 비행기 여행이 완전 짜릿했어. 그 후로 아직까지 비즈니스석은 못타봤단 말이지.
미국에 돌아와서 미국 친구들에게 은근히 꽤 자랑했지. 걔들 리액션 솔직하잖아? 무지 부러워하더군. 러시아 여자친구 미국와서 나랑 친하게 지내고 돌아다니는 거 보고 참 신기해하더군. 내가 걔중 키가 젤 작고 비쩍 말랐었거든.
아래에 러시아 노래 두 곡 링크해둘께. 함 들어봐. 내가 젤 좋아하는 노래들이야. 러시아 여자친구들이 잘 부르던 노래인데, 지금 들어도 낭만에 젖어.
https://www.youtube.com/watch?v=LpYpWlm7f6U&list=PLdwFS8_UdLozY2y4B7GBaDgoUDUEoGfe3&index=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