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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이 본 기독교 [超超 스압]
게시물ID : religion_116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qing香
추천 : 17
조회수 : 1389회
댓글수 : 24개
등록시간 : 2013/03/02 12:48:57

불교인이 본 기독교 

1.서론 

언제인가 한 기독교 친구는 나에게 "너는 기독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나가는 이야기로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글로 쓴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종교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청탁 받았을 때 선뜻 승낙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라는 문제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와 불교의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종교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럴 수 없는 벽을 서로가 확실하게 아는 일일 것이다. 기독교에 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실일지라도 불교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에게 신(神)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불교인들은 교리적으로 <절대자(神)>의 존재를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인들에게 신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와 같은 신의 개념에는 도달시킬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글은 토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교인이 기독교와 접하면서(특히 성경이나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을 그대로 말해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 글을 가능한대로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듣기 거북하고 또 충격을 줄 수 있는 표현이라 해도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인이 기독교의 여러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신의 창조문제 

만약 불교인들에게 신과 인간의 창조문제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는가 않는가라는 것은 아예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문제 역시 문제로 제기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불교인들이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읽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진지한 것으로 나타날 리가 없다. 일종의 신화, 또는 동화와 같은 것으로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계관이 판이하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지구는 우주의 중심도 아닐 뿐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세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태양계(지구가 아니고)같은 것이 1000개 모여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이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 다시 이 중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다. 

그러므로 이 대천세계는 우리 태양계 같은 것이 10억개 모인 것을 가리킨다. 우주에는 이와같은 대천세계가 역시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들은 어떤 에너지(業力)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가(成), 그런 상태로 유지되다가(住), 그리고 파괴되어(壞), 원자상태로 분해된다(空). 이와같은 성, 주, 괴, 공의 운동은 끝없는 시간에 걸쳐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 우주적인 흐름속에서 생(生)과 멸(滅)을 되풀이 하면서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같은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인들에게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창조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불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인들은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을 읽으면서 신의 인간창조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심한 반발을 느끼게 된다. 

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도, 신의 사랑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신의 무지(無知), 무능(無能), 무자비(無慈悲), 독선(獨善) 같은 것만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부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 저지른 그 한번의 잘못으로 인해 신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들도 한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은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같은 아담과 이브에게 <먹으면 반드시 죽을> 그 위험한 선악과 나무(그것이 상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를 그들 곁에 심어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신이 진정으로 그의 자식과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장래를 생각했다면 그런 나무는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고, 그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어 부득불 만들었다면 일이 잘못되고 난 뒤에 한 것처럼, 미리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무슨 장치를 설치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신의 뜻에 반해 그 과일을 따 먹었다 하더라도 신이 그들의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옳고 그름>(선악)조차도 모르는 상태의 아담과 이브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벌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단 한번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해 그 일과는 관계도 없는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한 벌을 내린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게다가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신 자신은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곁에 위험한 농약 병을 두었다가 아기가 그 농약을 마시고 탈이 났을 경우 그 부모는 어린애를 벌 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농약 병을 아기 곁에 둔 그 부주의에 대해 그들 자신이 책임을 느낀다. 에덴동산 이후의 일들도 비슷하다. 


신이 미리부터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할 줄 몰랐다고 한다면 신은 전지한 존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거나 전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받게되는 인상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전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전능) 존재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자기의 창조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 후에도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신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한 뒤 곧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라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들을 홍수로 모조리 쓸어 버리거나, 유황불로 태워 버리거나, 또는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한다. 


구약에서는 신이 그의 피조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싸움을 하느라 고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을 읽으면, 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신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 사랑등의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은, 앞뒤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편애, 자기 일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잘못을 저지를 때는가차없이 벌을 주는 무자비, 독재적이고 폭군적이고, 옹고집장이 노인의 모습이다. 

불교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은 구약의 그 내용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신상(神像)으로 부터, 어떻게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3. 구세주로서의 예수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교인에게는, 그 창조자가 보내었다는 구세주도 받아 들일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붓다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꼭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신이 보낸 메시아인가,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뒤 3일후에 부활 했는가>라는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문제로 제기조차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모든 활동이나 그것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황당무계>한 일에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어하기까지 한다. 

불교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자신들만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 내에서도 그를 신이 보낸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예수를 <무염잉태(無染孕胎)>했다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친형제들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 예수가 고향에서 가르치자 그들은 <그분(예수)이 정신이 나갔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까지 했음을 본다. 예수와 오랜동안 함께 살았던 고향사람들도 그를 <고작 장인(목수)>정도로 보았을 뿐 구세주와 같은 특별한 존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이 보낼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려온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수에게서 진정으로 구원자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리 완고하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그렇게까지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던 것은 예수가 <사기꾼>으로서 그들의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사기꾼을 처단하는 것이 신을 더 잘 섬기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예수가 직접 선택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가르쳤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가 하면, 어떤 제자는 부활한 예수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믿지 못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확인까지 해야했다. 그리고 예수의 처형앞에서 보인 제자들의 비겁함과, <빈무덤>앞에서 보인 그들의 반응에서도 그들이 예수의 존재를 얼마나 믿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제자들은 두고서라도 당사자인 예수 그 자신조차도,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던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모든 인류를 구한다는 크나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가, 그리고 죽으면 삼일 후에 부활되어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겁을 내고, 고통스러워하고, 또한 절망했을까. 

제자들에게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그가 이 지상에 오기 전에 이미 예정된 그 죽음 앞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죽음의)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살려 주소서>라고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다가, 끝내는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망해 버리고 만다. 이와같은 사실들은 예수 자신이 부활도, 메시아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것이다.


초점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죽음 앞에서 예수가 보인 모습은, 인류역사상에서 보통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사상 또는 신의 등의 이유로 죽게 되었을때 보여주는 그 떳떳한 모습과 비교가 된다. 

우리들 가까이에서 예를 들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안중근의사, 사상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 그들은 죽은 뒤 부활이나 천당에서의 영생과 같은 약속이 없었는 데도 예수만큼 큰 고통과 고문을 견디면서 떳떳히 죽음 앞에 섰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그 피흘림을 기독교인들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 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 자신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타의에 의한 것 같이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배우>, 또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다면 예수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는가. 배우로서, 또는 심부름꾼으로서는, 아무리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자 또는 심부름꾼으로서만의 공로뿐일 것이다. 

아니면 예수의 위대성이 그의 가르침의 내용에 있다는 것인가, 짧은 기간의 그의 활동에 있다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 <구원>에 대한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인들에게는 신을 통한 구원의 가르침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위대성을 그가 행한 활동에서 보아야 한다면, 예수가 인류역사상의 위대한 종교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특출한 종교적인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때,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모습이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상에 파견한 구세주라는 말은 불교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인들에게 무엇보다도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그 불투명한 예수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와같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의 상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4. 기독교의 사랑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위대한 종교치고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은 그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교등에서도 증오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히 기독교만을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보다 특별하게 뛰어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편협하고 왜소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 그대로 자기와 가까운 <이웃에 대한>, <이웃만의>사랑같이 보인다. 

먼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다. 독선적이고, 편애적이고, 무자비한 모습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에덴동산에서 신이 인간에게 했던 첫 행위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혹한 <시험>이었다. 우리같은 보통인간이라해도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그와같은 치명적인 시험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사랑 그 자체>라고 하는 신이 그렇게 무자비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이 선악과 나무의 시험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으로서 우리는 신의 성격과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 일에서도 우리는 신의 편애, 무자비를 볼 수 있을 뿐, 거기에서 사랑은 볼 수가 없다. 그 뒤에 일어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서 어떻게 아브라함 가족만을 골라 그 자손들과만 계약을 맺고 그들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구약의 하나님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무서워하고, 존경하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조차도 항상 유치하고 무자비한 시험(예를 들면 이사악을 제물로 요구하는 따위)을 내린다. 그들이 신의 말을 잘 따를 때만 약간씩 도와준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하면, <너와 네 식구들을 죽이겠다>, 또는 <나는 그 도읍과 그 민들을 송두리째 파멸에 넘겨 버리겠다. 비록 한 집에 열 사람이 살아남는다 해도 기어이 그들 모두가 죽고 말 것이다>라고 무자비하게 위협한다. 위협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들에게 가차없는 벌을 내리곤 한다. 

구약에서의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교육하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같은 모습의 신이 아니라, 피조물들을 자기의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공갈협박을 하고, 그들과의 싸움에 힘겨워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감, 분노, 질투, 무자비한 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같은 한 민족에 대한 편애는 볼 수 있어도 인류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은 볼 수가 없다. 

신이 인류구제를 위해 그의 독생자인 예수를 이 지상에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게 한 것을 기독교인들은 신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인들에게는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의 입장에서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신의 독선처럼 보인다. 에덴동산에서 했던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시험처럼 보인다. 신이 인간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었다면 인간들에게 신의 독생자의 피를 손에 묻히게 하는 그런 시나리오는 마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그의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구상했던 것이 그와같은 피비린내나는 사건과 이상야릇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인 <부활>과 같은 방법이어야 했단 말인가.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푼 지극한 사랑의 행위였다는 말인가.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불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이와같은 하나님의 행위와 모습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고,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행위와 그 가르침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느낌과 반응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몇몇에 대한 사랑>, 또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라는, <받고 주는 사랑>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수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받는 사람들 뿐이었다. 예수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의 대리자로서 전 인류를 구제하러 왔다고 한다면 어느 계층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병들고 가난하고 핍박받은 사람들은 다음 세상에서 구제받기 쉬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반대했던 제사장들, 율사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 그리고 권력층의 사람들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착한 제자가 아니라 유다와 같은 악한 제자였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번을 일곱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면서도, 그 자신의 반대자들에게는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일은 한번도 없었던 것같이 보인다. 처음부터 그들은 적대시하고 <원수>로 대했었다. 제자들에게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예수는 자신의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한 일은 볼 수 없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그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마음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흔아홉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쳤지만, 막상 예수자신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에게는 어떻게 했는가.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만류하고 설득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저주하고, <네가 하려는 짓을 하라>고 부추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신약에서의 예수의 사랑은, 보편적이고 범인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반대자, 원수, 또는 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 자기 편,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기 편이 아닐 때는 배척하고 증오하고 복수했다. 배타적인 사랑이었다. 이와같은 기독교의 사랑은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피를 흘리게 한 근본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그리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세아 등에서 기독교가 이르는 곳에서는 모두 싸움이 있었고, 피를 흘렸거나 흘리게 했다. 그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와같은 철저한 <배타적인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 왔을때는 많은 피를 흘렸다. 이것도 같은 원인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이처럼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대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이 왜소하고, 편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처럼 말해지고, 또한 그렇게 행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어이없어해 하는 것이다. 


5. 예수의 기적과 부활 

<그때 세존(붇다)께서는 물 위로 걸어 다니시는데 발이 물에 젖지 않으셨다. 카아샤파는 멀리서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문(沙門,수도자)은 물위로 다니는구나'>(증일 15,2)


<난다는 곧 그것(한 덩어리의 떡)을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바쳤다. 그래도 떡은 남았다. 난다는 사뢰었다. '아직 떡이 남았나이다. ' . . . 그때 세존께서는 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 떡을 가지고 여승들, 남자신도들, 여자신도들에게 주어라. '그런데 여전히 

떡은 남았다. '너는 이 떡을 가져다 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래도 떡은 남았다. >(증일 20,28)


이것을 읽으면서 기독교인들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경전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모든 종교에서는 그들의 교주나 성인들과 관련된 이와 비슷한 기적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종교에서 그들의 교주가 행한 기적만이 참된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들은 가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들이 모두 가짜이거나, 아니면 모두 진짜여야 할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말한다면 기독교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기적만이 <진짜 기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행한 기적만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인들에게는 그 기적 이야기들이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한 신이 파견한 존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해준다든지,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쫒아내 준다든지, 몇 덩어리의 빵으로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였다든지, 물 위로 걸었다든지 하는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앙징스럽고 유치한 기적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예수의 존재를 왜소하게, 또한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할 뿐이다. 예수의 부활문제에 대해서도 기적에서와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부활이야기를 하고 있는 종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모두 가짜이고 예수의 부활만이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만약 다른 종교의 부활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부활이 가능한 것이 되므로 예수의 부활은 별 의미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이 부활사건은 성경 그 자체의 기록에 의해서 보더라도 별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두고라도 예수를 직접 따라다니면서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수 없이 보았고 죽은 후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를 몇번이나 받았던 제자들조차도 <빈 무덤>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리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메시아가 올 것을 오랜 세월동안 기다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예수가 부활 운운한 것을 <고약한 사기>라고 보고, 그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묘지를 단단히 지키게 한 사실등에서도 그 사건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허황되게 보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이 단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는 하나의 희화처럼 보일 뿐이다. 부활사건 자체의 역사성 여부는 두고라도,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불교인들에게 신이 그의 대리자를 지상에 파견하고,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그를 되살려 주었다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하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불교인이 놀라는 일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일들이 아니라, 이와같은 보잘것 없고 허황한 사건들이 어떻게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위에 말한 바로 이점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결론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문화, 기독교가 이룬 업적,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여러가지 활동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또 기독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접할 때는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뿐만 아니라 거부반응까지 가지게 된다. 

이 글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러나 막상 좀 더 가까이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대하면서 놀랐던 것은,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 교리가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라든지, 편견, 몰이해와 같은 이유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도 어느정도 작용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붉은 안경을 낀 사람에게는 세상이 붉게 보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붉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푸른 안경을 낀 사람의 설명이 통할 리가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의 관점이 더 옳은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불교의 교리가 <진짜>이고, 기독교의 것이 <가짜>라든지, 반대로야 아무런 해결도 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유익한 일도 아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한 종교에 대해 확고한 입장에 서 있을 때는, 다른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이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름대로의 이해>라는 것은, 붉은 안경을 끼고 세계를 붉게 보거나, 푸른 안경을 끼고 세계를 푸르게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 뿐이다. 

그러면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글의 시작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렇게 할 수 없는 벽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이와같은 생각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6월 13일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강연 내용-


불교인이 본 기독교 - 윤호진 교수(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경남 울산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교 대학원 졸업.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 철학과 졸업. 종교학 박사.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tern84&logNo=130020529790&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불교인이 본 기독교"라는 제목이지만 사실, 기독교를 제외한 불교와 기타 모든 종교 그리고 무신앙인과 무신론자들의 견해처럼 보이는 건 함정.ㅋㅋ


이런 글에 맞추어, "기독교인이 본 불교" 같은 글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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