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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화단이냐꼬?… ‘무덤’ 아이가 !
게시물ID : lovestory_312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뻑적지근
추천 : 2
조회수 : 135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0/09/16 21:26:29
어떤 이는 무덤이 가장 완전한 곳이라고 했다. 산이 드넓게 펼쳐지고 볕이 가장 잘 드는 양지 바른 땅에 시신이 묻혀서 그런 거라고. 고단하고 긴 여정을 마친 인생의 종착역이기에 그렇다고도 말했다. 누군가는 무덤을 금기의 공간이라 했다. 죽은 이가 누워 있는 무덤은 불완전한 인간들이 들끓는 감정을 토해내는 공간과 분리됐다. 그래서 고요했다. 무덤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는 무덤을 무서운 곳으로 여기게 했다. 그러니까 무덤은 가장 완전하고도 두려운, 금기의 공간이다. 부산 문현동 돌산마을.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곳. 이곳에서만은 무덤과 동네가 뒤섞였다. 현란한 불빛의 도시는 고무공장 여직공, 연탄 배달부, 미장이, 일용직 노동자로 요약되는 빈민 노동자들을 품지 못했고, 이들은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내 집'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공동묘지까지 올라왔다. 무덤과 무덤 사이를 비집고 판잣집을 지었고 여기서 밥을 먹고 배설했다. 무덤가는 늘 술을 먹고 취해 비틀거리는 아저씨, 그리고 아저씨와 싸운 서러운 마누라들의 악다구니와 울음소리로 시끄러웠다. 배운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마을"이라고 했지만 돌산마을 주민들은 그저 살아갈 터전을 찾아 헤매다 무덤에 왔을 뿐이다. "오죽 답답했쓰모 여(기) 와 살겠소?" "1년만 살다 갈라 캤지. 살다 보니 1년 2년 가고, 그러다 이래 된 기지 뭐." "월셋집 살면서 오라 가라 소리 안 듣고. 그래도 내 집이라고 여기 판잣집이 더 좋트만." 내 몸 하나 누일 작은 땅 덩어리를 점거한 사람들은 지금 260여 가구를 이뤘다. 이곳에 사람들이 무허가 집을 짓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말선(67·여)씨 부부도 66년쯤 달세 1500원을 감당하지 못해 묘지에 왔다. 연탄 배달부인 남편 월급은 불과 5000원 남짓이었다. 궁핍했던 부부는 앉으면 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높이의 고깔 모양 판잣집을 지었다. 한 푼이라도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쌀가마니와 비닐 장판으로 바닥을 깔았지만 비만 오면 흙탕물로 범벅이 돼 잠을 자지 못했다. 구청 직원들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무덤 사이 판잣집을 부쉈다. 사연 없는 하꼬방 여자는 없다 공씨는 고깔집에서 딸 하나, 아들 둘을 낳았다. 새벽이면 일어나 자녀 도시락을 쌌고,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고무공장에서 일했다. 집에 와서는 빨래를 해야 했기에 자정 넘어 잠을 청했다. "그래 살았는데 와 돈이 안 붙노.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제. 돈 없어서 빌리고, 일해서 갚고. 아랫돌 빼서 윗돌 막는 기라." 안주도 없이 막걸리를 마시던 남편은 88년 간경화로 숨졌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딸은 그해 열여섯 살에 집을 나갔다. "드라마 '형사 25시'에 맨날 여자들 인신매매하는 거 나오는데 딸은 안 오고 잠도 안 오고. 집 나가 섬에 잡혀 갔나, 어디 몸 파는 데 끌려 갔나. 그때부터 불면증이 생겨서…." 지난 4일 만난 공씨는 인생을 회고하다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했다. 꽃무늬 반팔 티셔츠에 빛바랜 반바지를 입은 공씨는 동네 어귀에 있는 파란색 플라스틱 위자에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 축축한 눈물이 뱄다. 어쩌면 공씨 인생에서 가장 사치를 부린 것인지 모를 누렇고 동그란 순금 귀고리가 반짝이며 흔들린다. 돌산마을에 해가 졌다. 공씨 뒤로 보이는 부산의 쇠락한 중심지(범일동과 서면)에 희고 노랗고 빨간 전등들이 켜졌다. 땅에도 별이 내린다. 집 나간 딸은 94년 어느 날 엄마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했다. 결혼을 한다는 연락이었다. 스물두 살이 된 딸과 예비 사위를 부산역에서 만난 공씨는 명승지 태종대를 구경하고 밤이 돼서야 함께 판자촌으로 향했다. 산복도로(山腹道路)를 걷다 공씨가 예비 사위에게 물었다. "저 위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판잣집 보이제? 저기가 우리 집인데 이 결혼, 괘안나?" "어머니, 집이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만 좋으면 됩니다." 레미콘 기사인 착한 사위는 매달 장모에게 10만원씩 보낸다. 공씨는 장애인학교에서 청소를 해주고 월 20만원을 받는다. 지금도 방 두 칸 판잣집에서 막내아들과 함께 산다.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애들 다 키웠고 남한테 빌러(빌리러) 안 가고 밥 걱정 안 하고 지금은 잘 산다이가. 더 이상 뭘 바래? 인생에 다 끝이 있는 기라." 남들이 보기엔 '인생여전(人生如前)'이지만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도록 된 것이 그에겐 '인생역전(人生逆轉)'이다. 이웃인 정태연(63·여)씨는 4년 전까지 부전동 은아극장(현 은아빌딩) 앞에서 오징어, 쥐포를 팔았다. 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은 생전에 늘 술 먹고 시비를 걸었고 그런 날에는 집이 피범벅으로 얼룩졌다. 정씨 머리가 찢어지거나 입술이 터지거나 이가 부러지거나 멍이 들거나. 그래도 정씨는 인물이 참 곱다. 계란형 얼굴에는 진한 눈썹, 쌍꺼풀 진 눈이 선명하다. "얼굴이 씨카매. 정씨는 바탕이 좋은데 맞아서 얼굴색이 저래 된 기라. 영감 먼저 죽으니까 좋재?" "돌아가신 우리 시어머니가 내 맘 편하게 해 준다고 데꼬 간 기지. 그제 집에서 거울 보는데 금니(남편이 때려 이가 부러진 자리에 금니를 했다)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올라 벽에 걸린 영감 사진 보고 '야 이 ××놈아' 실컷 욕해뿌따." 정씨는 맞고 살던 과거를 안주 삼아 주민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도시 빈민들은 외로웠다. 여자든 남자든 다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했기에 돌산마을의 낮은 밤보다 휑뎅그렁하다. 81년부터 근 30년간 이곳에 산 정씨가 동네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한 것은 불과 4, 5년 전이다. 약을 잘못 제조해 환자가 죽는 바람에 약사 면허가 취소된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하꼬방'에서 보신탕을 팔며 생활한 김분자(69·여)씨, 탈영했다 육군 교도소에 끌려가 실컷 두드려 맞은 뒤 허약해진 남편 대신 행상을 다니며 가족을 돌본 유경자(69·여)씨와 공말선씨가 친구들이다. "나중에 여기 재개발돼서 다들 뿔뿔이 흩어지면 이래 다시 만나지겠나?" 한 친구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죽음 뭐시 두렵노? 죽기 아니면 살기다" 돌산마을에 정착하는 이주민이 점점 늘어나자 무덤 주인들은 묘를 옮겼지만 가난한 이들은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무덤이 지금도 80여기가 남아 있다. 마을 공원 한가운데, 동네 평상 옆, 집 앞 등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생활했지." "죽으면 나도 땅에 묻히잖아. 무덤 하나도 안 무섭다." 이곳 사람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 마을엔 지금도 죽은 이를 찾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잊고 살던 가족 무덤을 찾아왔다 포기하고 돌아가거나, 시멘트가 덮여 길이 된 묘 자리만 서성이다 가는 이들도 있었다. 이장을 못한 무덤 주인들은 지금도 1년에 한두 번 찾아와 과일과 떡을 차려놓고 성묘를 한다. 최근 이곳엔 벽화와 공원도 생겼다. 부산시는 2년 전 노화된 주거지를 정비하고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돌산마을 곳곳에 벽화를 그려놓은 데 이어 지난해 돌산공원도 조성했다. 무덤, 벽화, 공원 이 모두가 삶의 일부다. "여기는 집이 다 붙어 있으니까 나 죽으면 동네 사람이 알잖아요. 아파트는 몰라요. 거기는 수용소야. 수용소." 67년부터 이곳에 거주했다는 건설노동자 정영복(63)씨는 8년 전 인근 현대아파트로 이사하고도 매일 이 동네 평상을 찾는다. 평상에서 잠도 자고, 사람 구경도 하고, 술도 마신다. "누가 뭐라 합니까? 여기서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아랫마을은 뭘 할라 해도 돈이 든다 아입니까?"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던 아내의 소원은 들어줬지만 그는 아파트가 외롭다. 아파트 대신 돌산마을 평상에서 술을 먹고 자노라면 늘 욕쟁이 할매가 한마디씩 하고 간다. "니네 아파트 가서 자라. 와 남의 동네 와서 술이나 처먹고 지랄이고. 마누라한테 혼 안 나나?" 지난 6일 오후에도 평상에서 자던 정씨에게 할매가 욕을 했다. "할매, 알겠따." 그는 말만 그렇게 하곤 또 잤다. 누워 있는 정씨 옆에서 미장이 박막동(69)씨 등 주민 4명이 모여 앉아 무화과를 따먹었다. 좁고 경사지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는 무덤과 평상, 시멘트집과 무화과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65∼67년 베트남전에 참전한 박씨는 고엽제 환자다. 참전 후 다리에 고름이 자꾸 나 전세금 3만원을 빼 이 약 저 약을 사 먹다 돈이 떨어져 72년 이곳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지금은 시멘트집에 산다. "베트남전 참전한 게 후회되냐꼬? 뭐시 후회돼? 안 죽고 살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지. 것보다 오늘 태풍 '말로'가 온다는데 걱정이다." 철근 없이 시멘트만 발라놓거나 판자와 슬레이트로 지은 무허가 집들은 2003년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 대부분 무너졌었다. 문현동 산 23-1번지 돌산마을에 밤이 내리면 마을 아래로 아파트와 상가, 주택에 하나둘씩 불이 켜져 은하수를 이룬다. 어둠은 남루한 것들을 감춘다. 주민들이 사라진 골목에는 시멘트집 벽을 타고 흐르는 금이 난 흔적과 문 밖에 놓인 허름한 신발도 도드라지지 않는다. 집집마다 그려진 벽화 '민들레'며 '열기구', '그네 타는 아이들'만이 돌산마을을 수놓을 뿐이다. 벽화 위아래로 흰색 점박이 고양이나 똥강아지가 어슬렁거린다. "저 아래에 집들이 그래 많은데도 내 껀 하나도 없네." 박씨 입술에는 혼잣말이 맴돈다. 부산=글 박유리 기자, 사진 김지훈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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