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나르샤에서는 내일 예고편을 보니 선죽교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온 이방원과 정몽주가 만나
하여가와 단심가를 나누는걸로 나오네요.
그런고로 실제 역사에서는 어떠하였는지 가볍게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왠지 다 쓰고나니 드라마내용보다 역사내용물이 많네요. 역게로 가야하나 'ㅅ';;;)
[당시 역사에 기록된 내용]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멀쩡히 돌아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이성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에 방문했다.
기록으로는 이때 이방원과 술자리를 했고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자, 단심가로 화답했다고.
이 부분을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이성계가 낙마한 것처럼 꾸며서 정몽주가 일을 도모하게 한 후, 개경으로 귀환한 이성계가 정몽주를 용서함으로써 한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으나 실패한 것으로 각색했다. 또, 같은 사극에서 이방원과 서로 시조를 읊는 이 장면이 등장하는데, 구구한 말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딱 시조만 주고받도록 깔끔하게 처리한 명장면이다.
이 두 시조는 한국인이라면 대다수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시조.
어쨌든 이것으로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신왕조 수립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부하 조영규 등을 시켜 선죽교(선지교)에서 암살했다.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조영규가 먼저 말을 공격해서 말이 넘어지자 정몽주도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달아났는데, 이것을 고여가 쫓아가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성계 낙마~정몽주 피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내용으로 남아있어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하다. 다만 대부분의 기록은 정몽주가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계획에 대해서 알았다는 점에서 공통되며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죽을 줄 알면서 병문안을 갔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거리이다. 하여튼 이 난리 중에 정몽주의 동생도 형과 같이 죽음을 당했고 다른 동생은 유배되었다. 이 선죽교에서의 죽음은 이후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먼 후대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 본인의 제자였던 권우나 권근의 저술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당대 사람들의 증언도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으로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이 설은 권근이나 권우가 머슴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정몽주는 이 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일 사람 얼굴을 봐서 뭐하겠나라는 설도 있고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되는데 그 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것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것과, 수행하던 종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종이 그것을 거부하고 함께 죽은 것 등이 그러하다.
이방원의 [하여가]
如此亦如何 (여차역여하) 이런들 또 어떠하리
如彼亦如何 (여피역려하) 저런들 또 어떠하리
城隍堂後垣 (성황당후원) 성황당의 뒷담이
頹落亦何如 (퇴락역하여)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吾輩若此爲 (오배약차위) 우리들도 이 같이 하여
不死亦何如 (불사역하여) 죽지 않은들 또 어떠하리
정몽주의 [단심가]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일백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토 되어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寧有改理與之(영유개리여지) 가실 줄이 있으라
[선죽교(선지교)] 개성특급시에 있는 돌다리로 북한 국보 159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정몽주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옛 주소는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 262번지이다.
원래는 난간이 없는 다리로 알려졌으나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부가로 설치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현대에 와서 북한 측이 행인들을 위한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기도 했다.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리었는데 말 그대로 '착한 땅의 다리' 라는 뜻. 후일 정몽주가 이 곳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후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 가지가 솟구쳐 나오게 되었다고 하여 선죽(善竹)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있다는 낭설이 많으나 붉은빛을 띄는 돌로 재건해서 현재는 붉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선죽교 서쪽에는 정몽주를 제향(祭香)하기 위해 세웠다는 숭양서원(崇禳書院)이 있으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와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참고로 경상북도 영천시 에 가설 선죽교가 있다. 영천이 다름아닌 정몽주의 고향이기 때문.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임고서원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