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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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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께소
추천 : 5
조회수 : 47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2/03 12: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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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물 마시는 걸 싫어하는 내게 물을 먹이는 계절. 한낮에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게 되는 계절. 그리고 자연스레 눈이 먼다는 건 무엇인지 상상하는 계절. 그러나 밤에는 결국 고개가 하늘로 향하게 되는 계절. 매미의 울음소리가 아닌 매미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계절. 땅속에서 7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 끝에 길어봤자 한 달 동안 울다 죽는 그 곤충을 따라 울고 싶은 계절. (지금 7년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떤 기사를 읽었는데,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여름에 세상 밖으로 쏟아지듯 나온 매미는 달콤한 사랑을 한 달 정도 나눈 뒤 생을 마감한다.") 쉽게 지치는 계절. 하지만 맨몸에 걸친 티셔츠 한 장에 행복해지는 계절. 비를 맞으며 텅 빈 야외수영장에서 혼자 수영하고 싶은 계절. 내 인생 속 모든 도서관이 떠오르는 계절. 내 이름을 일부러 잊는 계절. 내가 태어난 계절.




겨울


아이스크림을 먹는 계절. 내가 손이 따뜻한 사람임을 감사하는 계절. 그래서 잡아줄 누군가의 손을 찾는 계절. 내겐 마음 편히 머무를 곳 하나 없는 한국이 떠오르는 계절. 소설보다는 시를 읽는 계절. 혼자 걷고 싶은 계절.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싫은 계절. 내리는 눈마다 이건 어떤 이의 첫눈인가 궁금한 계절. 그리고 눈을 그리워하는 계절.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계절. 사랑에 빠지는 계절. 결혼하자는 말을 듣는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계절. 어쩌면 내가 먼저 용기 내어 결혼하자 말할지도 모를 계절. 누구에게도 주기 싫다고 생각한 적 있는 계절. (만약 진짜 내가 이 계절을 독차지하게 된다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만큼 시린 세상에 홀로 서 있어도 웃을 수 있을 거다) 그만 좋아할 거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사랑하는 계절. 나의 계절.



지금 한국에 있어요. 공항에서 나왔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춥지 않아서 놀랐네요. 미술관도 가고, 서점도 가고. (김소연 시인의 <눈물이라는 뼈>를 샀어요. 원래는 <수학자의 아침>을 사려 했는데) 지하철, 버스, 기차, 택시. 다 골고루 타고. 시간이 빨리 가서 아쉽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한국에 있는 동안 눈 내리는 거 보고 싶었는데, 안 올 것 같아요. 아, 제 글 읽어 주시는 분들이랑 같은 하늘 아래에 (외국이어도 같은 하늘이지만, 그래도 훨씬 더 가까운 하늘이니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짜, 정말 기쁘더라고요. 나 혼자 그런 거지만, 그래도요.

미술관에서 하얀 종이가 날아다니는 듯한 작품을 봤어요. 하얀 종이 하나하나가 정확히 어떤 재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거워 보이는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나 자신에게 하얀 종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하얀 종이가 조금 무서운 것 같아요. 구겨질까 무섭고, 손가락 베일까 무섭고, 연필로 뭘 쓰고 지우면 그 자국이 남을까 무섭고. 그래서 무거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채워나갈 글에 설레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에, 야외수영장에서 비를 맞으면서 혼자 수영을 한 적이 있어요. 비 때문에 수영장 안에 사람이 저밖에 없었는데, 그게 정말 좋았어요. 가끔 목욕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지금 머리 위로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보니까 수영장 안 가본 지 오래 됐네요.

아직 월요일 아침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뭘 더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려고요.

제 사전 속에 든 단어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저랑 지금 무지 가까운 하늘 아래에 계신 분들.
출처 http://blog.naver.com/rimbaud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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