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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살이세요?''24살입니다''연애 해보신적 있어요?''아직, 없습니다'. 별말 안 했는데, 눈빛에 다양한 생각들이 읽힌다. 측은지심인지, 은근한 우월감인지, 나에 대해 다 알겠다는 것인지 모를 미묘한 표정들. '너가 키가 작아서 그래''너 몸에 문제 있어?''전 경험 없는 남자 싫어하는데''공부만 해서 사회성이 떨어지는거 아니야?'. 오가는 대화 속에서 난 사회성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고독한 학자나 예술가로 치부되기도 하고, 유난히 까다로운 사람이나 신체적으로 결함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선의를, 혹은 아무 생각 없음을 내세우는 사람들 앞에서 난 분석되고, 대상화된다. 그곳에 인간으로서의 나는 아마 없다.
연애는 인간끼리의 관계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근대에 들어 결혼과 핵가족이 '정상 행위'가 되었듯이, 연애 또한 현대의 '정상 행위'가 된다. 연애를 안/못 하는 사람은 '비정상'으로 취급된다. 어린 남자일 경우 그의 키와 외모, 혹은 성격이 주목된다. 나이 든 남자의 경우 학벌과 직업, 집안이 논란거리가 된다. 여자의 경우 언제나 외모가 문제가 된다. 비非연애자들은 훌륭한 '수컷 침팬지' 혹은 '아리따운 디즈니 공주님'이 될 것을 요구 받는다. 신민아는 뚱뚱하지 않아야 한다. 박보검은 적어도 잘생겨야 한다. 만약 '솔로들'이 그런 조건을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인 경우 그에겐 일종의 '발언권'이 생긴다. '난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거야''난 눈이 높아''난 진정한 사랑을 꿈꿔'.
어찌어찌 연애를 해도 연애 행위자들은 '성별 각본'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 받는다. 남자는 자상하면서 동시에 리더십도 있을 것을, 여자는 협조적이고 고분고분할 것을 요구 받는다. 남자는 보호하고 여자는 보호 받는다. 근사한 데이트는 남녀가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을 채우는 특별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장소를 가서, 어떤 식당에서 먹고, 어떤 문화 공연을 보는 등의 '기획'이 필요한 이벤트이다. 그리고 그런 기획의 역할은 대체로 남성인 '가부장'들이 떠안는다. 훌륭한 데이트를 치르고 아마도 남자는 생각할 것이다. '나 일 잘하고 있지?'.
언젠가부터 연애란 것은,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이 맞닿은 곳의 향기를 느끼는 일이 아니라, 힘든 세상살이 더불어 살아 갈 공동체를 가꾸어내는 경험도 아니라, 각자의 환상으로써 대상화 한 서로를 탐닉하고, 서로의 여러 특질들을 자랑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애정을 획득하거나 하는 '소비행위'가 되었다. 페이스북에는 '연애중'을 올리고,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른다. 관계의 근원은 사랑이지만, 우리 사회 연애의 근원은 '소유'라는 것은, 실제로 해 본적도 없으면서 연애를 드라마나 웹문서로만 접한 사람의 넋두리에 불과한 것인지?
'인간'인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집단은 어디에도 없다. '넌 키가 작으니 몸이라도 좋아야 연애할 수 있다''찌질하게 공부만 하지 말고 어디라도 좀 가봐라'고들 한다. 난 노는 것 보다 책 읽고 공부하고 토론하는게 더 재밌다. '남자답다'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술자리에서 '잘 놀고' 말도 잘하고, 분위기 띄우고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면, 난 남자이길 그만둬야겠다. 그 외 '남자다움'에 덧씌운 모든 작위적 기준들도 마찬가지다. 사랑할 줄 모르는게 아니다. 감정이 메마른 것도 아니다. 난 항상 그대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그런데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언제야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허위와 가식일랑 모두 벗어던진 '아사달 아사녀'처럼 '부끄럼 빛내며 맞절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