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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영화
게시물ID : readers_239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5
조회수 : 6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2/09 16: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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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캐롤>에 관한 글이에요. 스포일러는 없는 것 같아요.



"What a strange girl you are. Flung out of space." 


난생처음 심야영화를 봤다. (솔직히 내가 본 게 진짜 심야영화가 맞나 싶기도 하다. 심야에 보면 무조건 심야영화인 건가) 2월 7일 일요일 오후 11시 50분의 <캐롤>. 혼자였다.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하나 더 붙이자면, 졸업하기 전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티켓을 사면서 좌석을 확인했을 때, G 열 오른편에 있는 자리가 딱 하나 나간 게 보였다. 나는 그 뒷줄 가운데에 있는 자리를 택했다. H 열 9번.

밤이 되었고, 나는 내가 아는 제일 편한 복장을 하고 시간에 맞춰 영화관에 도착했다. 입장한 극장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기나긴 광고가 끝나고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했지만, G 열의 그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넓은 극장 안에서 말 그대로 혼자 생애 첫 심야영화를 봤다. 이따금 G 열의 그 자리를 흘끔거리며.

<캐롤>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몇 년 전부터 몰래 방문해온 어떤 분의 블로그에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Carter Burwell의 "Lovers"라는 곡이었다) 사운드트랙의 앨범 재킷 사진을 보고 개봉한 지 좀 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운 좋게도 아니었다. 친한 언니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했더니 너무 감정적일 것 같아서 싫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서울에서 혼자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내게는 문학과 사람과 글쓰기에 대해 마음껏 (무엇보다,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딱 두 명이 있는데, 이 친구가 그중 한 명이다. 카페에 가는 길에 친구가 내게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말을 꺼낸 순간, 나는 그 영화가 뭔지 바로 알아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도 <캐롤> 보고 싶었구나. 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우리는 영화를 함께 보지 못했다.

영화를 잘 모르기도 하고, 그냥 내 눈에 보인 것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캐롤>에는 수많은 창이 나온다. 유리창 너머에 있는 캐롤과 테레즈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김이 서려 뿌옇게 보여도, 창이 닫혀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도. 오히려 선명하지 않기에, 정확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에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화에는 눈이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 그리고 바라보는 눈, 둘 다.


Therese.jpg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중에 처음으로 눈물이 핑 돌았던 장면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러 차에서 내린 캐롤을 향해 테레즈가 눈을 맞으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장면. 나는 캐롤을 몰래 찍는 테레즈의 마음이 어쩐지 이해가 됐다. 추워서 빨개진 열 손가락마저도 이해가 됐다. 이해가 됐기에, 이해한 순간 떠오른 어떤 기억 때문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영화를 보는 중에 여러 번 떠올랐던 시가 있다. 아마도 가장 근래에 그 시인의 작품만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김소연 시인의 「눈물이라는 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암늑대는 노란 지빠귀를 올려다보고, 노란 지빠귀는 늑대를 내려다보았대.
둘은 눈을 떼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대. 그래서 겨울밤은 감옥이 되기 시작한 거래."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바라볼 때, 자꾸만 그 구절이 머릿속에서 읊어졌다. 그리고 저게 감옥이구나 싶었다. 겨울밤을 닮은.

기어코 어떤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을 때, 조금 소리 내어 울었다. 극장 안에 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았다. (몇 번쯤 감탄사를 내뱉기는 했다. '우와' 같은) 게다가 그 장면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끝나버려서, 울다 말았다. 울 타이밍이 아니었나 보다.

<캐롤>은 그렇게 캐롤로 끝이 났다. 테레즈를 바라보는 캐롤을 바라보는 테레즈를 바라보는......

영화가 끝났을 때는 새벽 두 시였다. 영화관에 나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입구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연세가 좀 있으신 부부 한 쌍과 함께 타게 됐다. 같이 영화를 보신 것 같았다. 두 분의 모습이 따뜻했다. 하지만 나란히 서 계신 뒷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려 숙소로 뛰어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시계를 보니까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두 시간도 채 안 되더라. 침대가 혼자서 자기엔 너무 큰 게 분명 문제였다. 이불 속에서, 테레즈를 만지는 캐롤의 손이 정말 부드러워 보였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다음 영화에 나오는 여러 손에 대해 생각했다. 쓰다듬고 쓰다듬어지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그리고 무슨 마법처럼, 한국에 온 첫날, 공항에서 나와 탄 버스 좌석의 팔걸이를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려 했던 게 떠올랐다. 마음이 아파서였다. 그러다가 '쥐고 싶은데 자꾸만 미끄러지는 팔걸이 위 손가락을 느껴본 적 있으세요?', 대충 그런 문장을 떠올리며 나중에 소설에 써먹을까 고민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아프다는 걸 잊으려고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르겠다.

<캐롤>은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캐롤보다 테레즈가 훨씬 예뻤다. 내 눈엔 그랬다.


심야영화.jpg



다시 기숙사에 왔어요. 비행기 두 번 갈아타고, 고속버스 한 번, 마지막으로 택시. 샤워하고 보니까 몸도 팅팅 붓고 다리는 멍투성이네요. (짐가방이 세 개였거든요) 비행기 타고나면 항상 이래요. 아무튼, 쉬거나 밥 먹는 것보다 글이 쓰고 싶어서 한국에서 본 영화에 대해 써봤어요. 극장 하나를 혼자 쓰는 진귀한 경험을 했네요. 아니, 다들 한 번쯤은 그런 경험 해봤으려나.


고작 열흘이었지만 한국 가길 잘한 것 같아요. 떠나기 전에, 한국에 있는 동안 신세를 진 언니한테 문자로 그랬어요. 뜬금없이. '난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라고. 언니가 '뭔 소리야?'라면서 되물을 줄 알았는데, 바로 '응'이라고 대답해줬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행복하면 글 못 쓸 것 같아서 행복하기 싫다고 심각해 했는데. 친구도 그러더라고요. 행복해도 꼭 글 쓸 수 있을 거라고.


영화관에서 제대로 울지 못한 걸 떠나기 전 공항에서 풀었어요. 아빠랑 영상통화 하면서. 사람도 그렇게 많았는데. 하나도 안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벌건 눈을 하고서 당당히 화장품을 사러 갔습니다.


올해 11월에 졸업 잘하고, 또 놀러 갈게요.

출처 https://youtu.be/nyhHil49kHA

http://blog.naver.com/rimbaudize/22062206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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