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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이발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게시물ID : history_117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2
조회수 : 5951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3/09/23 10: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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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가단 차발불가단 吾頭可斷此髮不可斷 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수 없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말로 단발령에 항의하는 최익현 선생의 상소문에서 발췌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머리카락에 대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훼상효지시야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 효의 시작은 부모가 주신 내 몸을 아끼는 것인데 어찌하여 몸과 털과 살을 훼손할수 있겠는가

효경에 나오는 역시나 매우 유명한 말입니다, 사실상 유교라는 것이 하나의 사상을 떠나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 기저에 폭 넒게 깔려있던 조선에서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것이 현대의 다양한 사상과 서구화된 인식을 받아들인 우리들로서는 다소 답답하고 이해할수 없이 보이지만 그 때에는 도리어 지금의 우리들을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매우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족이지만 얼굴이나 몸에 문신을 새겨넣는 것 등이 굉장히 치욕스러운 형벌일수가 있었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자면 따라서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로는 조선 시대 사람들은 땅에 끌릴정도로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할수 있고, 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구한말 사진에서 위화감과 궁금함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과는 다르게 그렇게 평생을 기른 머리칼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아니 길수가 없는게 당연합니다. 이게 어쩌면 굉장히 맹점인 부분으로 머리카락이라는 것도 수명이라는게 존재합니다.

성장기, 퇴행기, 휴지기라는 나름의 순환을 가지고 보통 5~6년 이면 그 수명이 다하여 자연스럽게 빠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알아서 빠지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더욱이 조선 시대에는 현대보다 대개 칼로리 섭취를 비릇하여 식생활적으로 상당부분 불균형적이었고, 머리카락에 대한 관리라는 것이 좀 심할지 모르나 매우 미개하였습니다, 따라서 땅에 끌리는 것은 둘째치고 허리 춤에 오기도 힘든게 사실이지요.

무엇보다 이 상투라는 것은 당겨서 묶는 헤어 스타일입니다, 머리카락의 수명을 단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셔도 무방할정도이지요.

그렇다면 아예 이발이라는게 없었나 하면 그건 아닙니다, 조선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현실과의 타협과 절충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크게 네 가지로 볼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삶이고 둘째는 돈, 세번째는 종교 끝으로 네번째는 죄인입니다.

머리카락이라는 것은 보온의 효과가 매우 뛰어난 기관입니다, 머리카락이 긴 분들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여름철에 긴 머리카락이라는 것은 매우 괴로운 고행을 종종 야기시킵니다, 하물며 이러한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땡겨 묶어 올린다고 생각해보십시요,.

그렇기에 조선에서는 정수리 부분에 보통 동전만한 크기로 머리를 밀어냈습니다, 이른바 배코 친다고 하는 행동으로 상투를 짜 올리는 편의성과 쾌적함을 위하여 암묵적으로 시행되던 행위이지요.

이는 보통 상투라는 것이 정수리 주변의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정수리 부근에서 묶는 것이기 때문에 정수리 부분이 시원해도 외관상 크게 문제될것이 없었기에 큰 저항이 없던 행동인데, 덧붙이자면 대머리라도 상투를 트는데 별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여기에 기인합니다, 보통 탈모라는게 정수리로 부터 시작되니 말이지요,

두번째의 사유인 돈은 먹고 살기 고달픈 서민들에게서 주로 발생한 일입니다, 이렇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주로 망건과 가채에 쓰였습니다,
망건이라는 것은 상투를 틀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이마에 두르는 물건으로 머리띠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신축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주로 말총이 쓰였으나, 있는 집 분들 즉 양반 들은 사람의 머리칼을 선호했습니다.

똑같은 단백질 섬유인 털이지만 부러지기 쉽기 관리가 어려웠던 말총 보다는 질기면서도 유연한 사람의 머리칼이 좀더 편안하고 좋았던 것은 당연한터라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망건 그 자체를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기에는 재료의 수급이 매우 어려웠던터라 주로 헤진 망건을 수리하는데 쓰였다고 합니다.

여담을 하자면 이 망건이라는 것은 향락을 죄스럽게 여기던 조선에서 존재하였던 몇 안되는 패션이었습니다, 가령 크기를 조절하는 작은 고리를 의미하는 관자는 신분에 따라 금이나 은, 상아 그리고 옥등 다양한 재료로 꾸며졌는데,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성종때 백성들의 폐해를 걱정하여 이러한 장식을 금지하는 왕명이 내려지기도 하였습니다만 이후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것이 특별히 지켜진다거나 반복해서 내려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왕실에서 예법을 지킨다면서 하얀 말총으로 엮은 망건을 쓰는 경우도 있었지요.

이러한 경우는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도 존재하였습니다, 바로 가체였는데 머리 위에 얹는 일종의 가발이었던 이 가체는 당시 여성들의 생각이 크기 = 아름다움이었던 만큼 매우 화려하고 크기도 컸습니다, 또 그 만큼 가격도 비싸서 싼 것은 논 몇마지기 에서 비싼 것은 집 수 채의 값을 치뤄도 살수 없었고 여기에 이 가채를 치장하는 장신구들까지 합한다면 정말 엄청난 수준의 가격대를 자랑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여성분들의 명품 가방, 명품 옷 과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쉬우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값을 치룰만큼 매우 중요했던 가채는 사건 사고의 구설수에서 좀 처럼 빠지지 못했습니다.

있는 집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 까지 유행하게 되면서, 지금의 우리가 차를 보고 그러하듯이  그 집의 경제력을 판단하는 일종의 수단이 되는가 하면, 왕실에서 가체를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을 수집하여 백성들을 고단하게 하였고, 어느 집에서는 13살 새색시가 갑자기 방에 들어오는 시아버지를 보고 일어나다 가채의 무게를 못이기고 목이 부러져 죽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영조때에 이르러 가채 금지령과 함께 이를 족두리로 대체하라는 명이 내려오지만 그것이 쉽게 지켜질리는 만무하였고, 옛 사진에도 종종 보이듯이 꽤나 오랬동안 암암리에 남아있었던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발은 비단 머리카락에만 국한 된것은 아니고 면도 즉 수염에도 같이 적용되었습니다, 머리 카락과 마찬가지로 수염이라는 것도 똑같은 털이라 수명과 한계가 있어 관운장 같은 미염공은 말 그대로 이야기 속의 기인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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