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는 분명 종교적인 성격이 있다. 우리는 자연과학을 불가해한 대상으로서 존경한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비주의자들처럼 자연과학에 대한 대중의 경외에는 숨겨진 것, 마술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동반된다.
자연과학에 대한 내 믿음은 양가적이다. 흔히 전통주의자들의 자연과학에 대한 포괄적 견해─예컨대 동양의 전통적인 인체관에는 독자적인 과학성이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서구의 자연과학의 수학적 기초와 경험주의적 탐구방식은 분명 하나의 정합적인 진리 체계로 발전해왔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는 것 역시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문헌학적 탐구의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창조에 대한 하나의 가설로서 읽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그렇지만 자연과학이 사회과학으로 그 시선을 돌릴 때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게 된다.
흔히 계량적 방법론으로 대표되는 사회과학의 연구방식은 사물에 대한 양화(quantification)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이나 인구학, 그리고 보건 통계학 같은 경우는 이러한 양화에 알맞는 학문이다. 그러나 양화를 통한 연구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무리한 양화를 시도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도착적인 시도를 하는 사회과학적 태도들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예컨대 법경제학이나 사회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이 나는 과연 얼마나 유효하게(valid)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을 파악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늘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자연과학의 경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존재론적으로 확장시켜 버리게 되면 회의적인 시선을 넘어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이 문제에 평소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은 어째서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지 와 닿지 않을 것이다─대표적으로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주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이나 진화생물학의 신봉자들, 그리고 가상의 인물로는 빅뱅이론의 주인공 중 하나인 셀든 리 쿠퍼 같은 인물들의 주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분명히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존재양태들을 도식적으로 지정(designate)할 수 없고, 시각화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허구적 픽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 증거와 논리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직관에도 손쉽게 어긋난다.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하이데거로부터 나왔다─하이데거의 중요성이란 이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나의 견해─하이데거는 과학적 세계관의 공간중심적(혹은 시각중심적)인 특징을 비판하면서 변화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시간성의 세계관을 복원하려고 한다. 나는 하이데거의 통찰에 더하여 상황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고의 문맥을 제시하고 싶다. 상황성이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게 뭐야?” 라고 물을 때 그것은 애정의 표현일 수도 있고, 호기심의 표현일 수도 있고, 비난이나 배척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발화의 상황 맥락에 의존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과학이란 상황성의 맥락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텍스트 <중용>에 나오는 “君子而時中”이라는 표현을 나는 그래서 몹시 좋아한다. 나는 이 표현을 “군자는 때(時)에 따라서 그 중요성(中)을 분별할 줄 안다”고 이해한다. 사회현상의 가치와 중요성은 상황적 맥락과 역사적 맥락에 두루 걸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