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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무슨날인지 아세요?
게시물ID : sisa_1174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로롱
추천 : 2/2
조회수 : 40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09/28 19:22:13
1950년 9월 28일 6·25전쟁중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되었던 수도 서울을 되찾은 사건. 북한 공산집단의 6·25남침으로 말미암아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국군이 참전 유엔군과 더불어 북한 공산군을 무찌르고 석 달 만에 수도 서울을 되찾았다.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시작한 북한 공산군은 선제 기습의 이점과 전투력의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사흘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점령한 다음, 한강을 넘어 7월 20일에는 다시 대전을 점령하였다.

한편, 전쟁 초기에는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이 사실상 맨주먹이나 다름없었던 국군은 필사적인 지연전을 벌여 적의 진출을 늦춘 다음, 9월 초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물러나 불퇴전(不退轉)의 결의 아래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적은 최종 목표를 눈앞에 두고 아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리하게 여러 차례의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적과 아군 간의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적의 주력은 아군의 지상 화력과 공중 폭격으로 소진되어 초기의 우세를 상실하였다.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 여러 나라의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국군과 유엔군의 전력은 적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 15일에는 인천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루어져 전세를 뒤엎게 되었다.

상륙 부대의 선봉에 선 미국 해병 제1사단과 국군해병대는 9월 18일 김포 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넜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해병대의 뒤를 따라 진격한 미군 제7사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시흥·안양·과천 등을 점령하고, 관악산을 끼고 돌아 서빙고와 뚝섬 맞은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한강을 건너갈 채비를 갖추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들어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0일부터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경부가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면서 북상하던 미군 제1기병사단의 선발대는 9월 26일 오산 북쪽에 이르러 남하중이던 미군 제7사단 선발대와 합류하였다.

곳곳에서 퇴로가 끊기게 된 적의 패잔병들은 험준한 산악을 타고 38선 이북으로 달아나기에 급급하였다. 9월 20일 새벽 행주나루터를 강습하여 강을 건너간 한미 해병대는 이튿날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 변두리를 감싸고 있는 안산·와우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다.

적은 9월 23일까지 사흘 동안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4일 한미 해병대는 함재기(艦載機)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받아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이튿날인 25일 마침내 이 고지들을 빼앗았으며, 그곳에서 서울시가를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와 뚝섬 일대에서도 한강 도하작전이 진행되었다. 미군 제7사단 제32연대가 남산과 왕십리 쪽으로 돌입하는 사이 국군 제17연대는 서울의 동쪽 용마산 일대의 능선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 망우리고개를 점령하였다. 시가전은 마포·남산·왕십리 등 여러 곳에서 동시에 있었으며, 밤이 깊어지면서 시내 한복판으로 좁혀졌다.

이날밤 북한 공산군은 퇴로가 완전히 봉쇄될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을 사실상 포기하고 주력을 의정부 쪽으로 퇴각시키면서 후위 부대로 하여금 저항을 계속하게 하였다. 적의 패잔 부대를 소탕하기 위한 시가전은 26일에도 시내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9월 27일 새벽 국군 제17연대와 해병대 용사들은 중앙청으로 돌입하여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그 잔당을 소탕하고 9월 28일에는 적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시민을 완전히 구출하였다.

반격이 개시된 지 2주일이 채 안 되는 9월 28일 정오,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결국 북한의 남침으로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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