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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게시물ID : readers_240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87kcal
추천 : 2
조회수 : 50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2/17 23: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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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언제든 볼 수 있지만 가끔 보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만날 수 없어서 매일 그리워만 하는 사이가 있다. 만날 수 없어야 비로소 그리워하게 되는 것만 한 비극이 있을까.

우 형은 연변에서 태어났다. 포항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쭉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북경어에 능하고 영어와 한국어까지 3개국어를 한다. 그는 순박한 얼굴에 조선족 억양을 가졌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를 말할 때도 조선족 억양이 가끔 묻어나는데 된 발음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several 같은 단어가 그렇다). 

우 형의 증조할아버지는 경남에서 태어났으나 일본 강점기에 연변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제의 핍박에 고향을 등진 이가 많았다고 한다. 돌아올 기약도 없이 쫓기듯 북향했을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으나, 그곳이라고 삶이 편치는 않았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향에서 언젠가는 고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버텼다. 20여 년 후에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았을 때 그는 귀향길을 서둘렀다. 급한 마음에 임신 중이었던 큰며느리와 큰아들(우 형의 할아버지)은 일단 연변에 남겨두고 작은아들만 데리고 남향했다. 그것이 또 한 번의 이별 길이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귀향하고 얼마 안 있어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20년만의 귀향길에 들떴을 그가 다시는 큰아들네를 못 볼 거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전후, 1992년 한중 수교가 있기까지 40여 년이 걸렸다. 그는 20년을 매일같이 그리워하던 고향에서, 40년간 큰아들을 그리워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

홀로 남겨진 우 형의 할아버지는 연변에서 아들과 딸을 여럿 낳았다. 문재가 남달랐던 집안이었으나 그의 아들과 딸들은 문화대혁명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책을 가진 것이 죄가 되고 노동이 최우선이던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시기에 낳았던 큰딸(연변에 남게 된 원인이었던)만이 가까스로 대학 교육을 받았다. 비록 제대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우 형의 아버지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원망스러웠고, 무엇이라도 적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문화 탄압이 심했기에 우 형의 할머니는 아들이 걱정되어 몰래 그의 글을 태워버리기도 했다. 우 형의 아버지는 젊을 적 원고들이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을 자주 안타까워했다. 그는 무엇이든 부족했던 시절, 8 개월 치 월급을 모아 컴퓨터를 살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작가였다. 컴퓨터에 불에 타지 않는 원고를 차곡차곡 쌓으며 언젠가는 그의 가족사를 장편으로 엮어낼 생각이라고 한다.

우 형네 가족사를 들으며, 어쩔 수 없는 삶은 왜 이리도 가여운 것인지, 내내 쓸쓸하였다. 여기에 미처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가여움을, 우 형의 아버지나 3개국어를 하는 우 형이라면 더 잘 옮길 수 있으리라. 그때 그 사람들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충분한 위로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의 도리는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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