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장르: 드라마
감독: 이나정(연출), 유보라(극본)
주연: 김향기, 김새론
개봉: 2015. 3. 1 종영(2화)
0. 평점과 한 줄 평
8.5
눈밭 위에 발자국으로 새긴 길. 우린 그 뒤만 따라가면 된다.
1. 줄거리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1944년, 중학생 쯤 되는 ‘최종분’의 집은 ‘강영애’의 집과 가까이 지냈다. 종분의 집은 영애의 집보다 못살았고, 본인은 학교를 가지 못했다. 반면 동갑내기인 영애는 학교도 다니며 넓은 집에서 멀끔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영애는 종분이 자신의 오빠 ‘강영주’를 좋아하는 것을 막으며 종분을 깔봤다.
반면 현재의 종분은 무슨 일에선지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영애의 혼과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제는 할머니인 종분은 옆집에서 비행청소년인 ‘장은수’를 눈여겨본다. ‘장은수’는 연고도 없이 학교 자퇴서까지 받아드는 지경이다.
영애와 종분은 납치되어 중국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성노예를 하게 된다. 종분이 영애의 자살 기도를 막으며 둘은 가까워지고, 기회를 틈타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영애는 도중에 죽고 종분은 정부가 나눠주는 성노예 피해자 보상금을 타기 위해 문서가 남아있는 영애의 이름을 대고 살아가게 된다.
은수는 종분의 과거를 들으며 종분의 진심을 알게 된다. 이후 조금씩 생활을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2. 사회적 무관심과 행정 공백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만들어진 극이니 당연히 주제는 성노예 피해자 분들께 맞춰져 있다. 하지만 단순 진행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피해자 할머니가 비행 청소년과 마주치는 것을 동시에 진행시킨다. 이 두 플롯을 엮은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은수는 부모님과 헤어져 살고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 때문에 주민센터의 직원들의 만류에도 은수는 지원을 거부한다. 종분은 그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다.
반면 종분은 해방 직후 위안부 피해자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 건너간 사실이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은 영애로 남은 평생을 살아간 이유다.
과거에 이만큼 힘든 사람들이 있었으니, 지금의 사람들은 조금 힘들어도 불평 말아야 한다? 이 드라마를 그런 꼰대 짓을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란 힘들고, 내 생각에는 행정 공백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성노예 피해자들을 주 피사체로 그대로 두지만 당시, 그리고 현재의 사회적 무관심과 행정 공백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비행청소년들이, 정확히는 비행청소년일 수밖에 없는 청소년 분들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행정공백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사회적 무관심과 정부의 능력 부족은 하나의 현상으로 이어진다. 개인이 개인일 수 없다. 즉 인권 실종으로 이어진다.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친구의 행세를 할 때 양심에 못을 박아야만 했고, 소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어서 자기를 깎아 내렸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살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유흥업소에 들어가기 위해 성년인 것처럼 행동해야만 하는 점에 있어서, 소녀의 삶은 자기 삶을 살 수 없었던 할머니와 꽤나 정확한 대칭을 이룬다.
3. 누군가는 앞서 갔다.
그 대칭은 공감으로 이어졌다. 은수는 자신을 지켜주려는 종분의 진심을 알고 방황을 끝냈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이렇게 적혀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국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베트남 할머니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분들이 맞잡은 손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타인의 아픔이 조롱거리가 되고, ‘공감’이 ‘능력’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사회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약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보듬고 연대하는 모습을 통해 이 척박한 현실에도 희망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행정 공백과 사회적 무관심은 결국 공감이 결여된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개인의 비극을, 구조적 문제점을, 공감의 필요성을, 사회적 연대의 방법을, 이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분들께서 보여주셨다. 그분들이 눈밭 위에 발자국으로 새긴 길. 우린 그 뒤만 따라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