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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게시물ID : sisa_6696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메탈리카님
추천 : 6
조회수 : 23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2/26 08: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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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새벽녘에 잠시 선잠에 들었다가 깬 뒤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오늘은 마음먹고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한번 써보려 합니다.
비록 개인적인 넋두리이지만 평소 시사게시판에 저와 비슷한 고민과 성찰을 가진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게시판은 시사게시판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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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그 이 후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할 근 2년의 시간.
 저의 시간은 세월호 사건 이 후로 그대로 멈춰있습니다. 희한하게도 세월호가 터진 그 즈음에 잘 다니고 있던 회사마저 폐쇄되었고 그렇게 백수가 되었습니다. 워낙 제가 있던 업계에서는 빈번하게 있는 일이고 이직율도 높은 업계라 가뜩이나 피곤했던 김에 몇개월 푹 쉬고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지금까지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백수신세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해가 있을까 혹시나 싶어 미리 밝히지만 저는 세월호 유가족이거나 유가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멀찍이서 뉴스를 접하고 답답해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슬퍼했던 이름없는 소시민일 뿐입니다. 금수저도 아닌지라 그 이후로 몇 번 호구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 고민 저 고민해보고 이런 저런 일도 도모해보려 했지만 도통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삶의 욕구가 사라진 듯 했습니다. 맛있다는 걸 먹어도, 즐겁다는 걸 보아도, 재밌다는 걸 해봐도 남의 얘기일 뿐 마치 저의 우뇌가 통째로 뜯겨나간 듯이 제 감정의 시냅스는 여전히 작동하지 못하고 고장난 채 허망함만이 가슴에 암처럼 전이되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우뇌까지 마비시켰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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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지독한 상실감의 시작은 정확하게는 세월호부터는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2012년 겨울부터였던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마'하며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조직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까지 무너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제가 지지하지 않았던 개인적으로는 혐오해마지 않았던 후보가 당선되어 결국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비록 국정원에 의해 대선개입이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발생되었지만 적어도 저를 포함해 그녀를 반대했던 절반 가까운 국민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사회에 물론 그 지위가 매우 높다 하지만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해서 그리 쉽게 이 누적되어온 사회시스템이 무너질까 싶은, 오히려 반대로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가 있었던 것이 그나마 스스로 위안으로 삼는 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저와 생각이 다른 절반이 넘는 다른 시민들이 선택했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이유와 명분이 있을 것이고 그것도 어쩌면 역사의 한 부분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차라리 저의 우려를 불식시켜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다독이고 있던 스스로를, 제 이성적 판단을 모두 얼어붙게 만들어버린 것은 세월호 사건이었습니다. 애써 위안으로 삼고 있던 작디작은 위안은 마치 거대한 댐을 위태롭게 막고 있던 작은 구멍의 돌맹이가 된 마냥 터져버렸고 분노와 절망을 위태롭게 막고 있던 댐벽은 그대로 참담하게 무너져내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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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나지 않는 의혹과 실종분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금 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의 마음에 천만분의 일도 달하지 않겠으나 그 당시에 느꼈던 제 개인이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뭘 해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그대로 팽목항으로 달려가 자원봉사라도 해볼까하는 생각도 했으나 비겁하게도 팽목항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그 절대적인 절망감이 두려워 감히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팟캐스트로 이상호 기자를 위시한 각 대안언론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가슴을 졸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벌어진 정부와 여당의 행태들은 굳이 이 글에 열거할 필요도 없을 거 같습니다. 그저 실망과 분노의 연속이 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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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해 10월 마왕이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운명처럼 주어진 그의 생을 그대로 마감했다면 혹은 우연적 사고에 의해 생을 마감했던 것이라면 그저 애도와 아쉬움을 달래는 마음 정도로만 기억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밝혀진 사실과 의료사고의 당사자 행태는 저에게는 세월호 사건의 판박이었습니다. 부정하고 증거를 인멸하고. 아니 백번천번 양보해서 최소한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잠시잠깐이라도 인면수심의 짐승가면은 벗고 진정성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의무적 조치는 행해지지 않고 자신의 권리와 안위만을 주장하는 모습에 치를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이르러 저는 조용히 그간 지인들과 작은 교류의 장으로 사용했던 모든 sns도 탈퇴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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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다음 해 메르스가 터졌습니다. 낙타고기와 젖을 먹지 말랍니다. 뜬금없이 국내에서 나고자란 동물원들의 낙타는 영문도 모른채 감금되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확진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저 대신 불평 한마디 없이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던 착한 와이프에게 마스크를 씌워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진실은 종편과 장악된 공중파로 인해 묻히고 국가의 주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국민들은 진실에 가려진 공포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대응체계는 엉망이었고 사익만을 추구했던 대형병원들에는 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음압병상이 없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전염병의 공포에 의해 마치 아포칼립스가 온 듯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멀리하고 선을 긋기 시작합니다. 마스크를 씌워 출근시켰던 와이프가 한 여름 냉방병에 걸려 퇴근길에 기침 몇번 했다고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세월호부터 이어진 대한민국의 민낯이 흉측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흉측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력하게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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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이제는 거대 정부 여당이 자신들의 권력영속을 위해 민간인 사찰을 넘어 정적 탄압용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는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기 목전입니다. 그리고 더민주와 정의당을 위시한 야당과 야당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저와 같은 시민들은 또다시 무력하게 어떤 분들의 의견이 그렇듯 그저 결국 결과적으로 통과될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필리버스터'라는 결과의 의미론으로서는 시간지연 정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월호 때 그랬고 마왕의 허망한 죽음 앞에 그랬고 강정마을이 그랬고 밀양송전탑이 그랬고 쌍용자동차가 그랬고 메르스가 그랬고 세모녀 자살 사건이 그랬고 최저임금합의가 그랬고 국정교과서가 그랬고 위안부 합의가 그랬고 노동 악법 추진 앞에 그랬고... 그랬고, 그랬고... 결과론적으로 보면 어이없는 결정이 내려지는 이 상황, 심지어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서 과연 내가 혹은 우리가 국가의 주인인가, 국가 주권이 정말 나에게 있기는 한 걸까하는 의구심 앞에 무기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슬프지만 결과론적 사실이 그렇습니다. 적어도 결과론적으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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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제가 고등학생 때 전남 광주에 친구들과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남도 깡촌에서만 지냈던 저와 친구들이라 당시의 광주는 남도에서는 그래도 광역시였고 가장 번화한 금남로가 당시 우리에겐 현재의 명동, 압구정같은 곳이었습니다. 길을 몰랐기에 택시를 잡아탄 제 일행은 금남로까지는 가는 길에 전남대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왠일인지 길은 막혔고 택시 운전수 분도 막히는 길에 시골촌놈들이 혹시라도 쭉쭉 올라가고 있는 미터기에 표시되는 택시비가 있을까 염려하고 계셨던 그 때 남도 깡촌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엔 형님누나들이었을 전남대 학생들이 시위깃발을 높이 들고 소위 '데모'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때 어쩌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될 택시 운전수 분의 얘기를, 당시로서는 그 시골촌놈 고딩들이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씀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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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너거덜이 나중에 크거들랑 그래도 쟈들에게 감사혀라. 지금 당장은 길이 맥혀서 불편허고 그래도, 그래도 결국 쟈들이 원하는대로 가고 있는겨. 길이 맥혀도 찬찬히, 찬찬히 가면 되는 것잉께. 알긋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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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길이 막혀 불편했고 답답하기만 했던 어린 저로선 당시에는 운전수 분의 말씀을 이해못했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떠올려보니 그렇습니다. 박주민 변호사의 좌우명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1cm만이라도 돌리자" 라고 했다지요. 이제 위에 열거했던 저의 무력감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열거해보겠습니다. 일제 폭압에 항거했던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 세대가 그랬고, 6.25를 거치고 버텼던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그랬고, 4.19가 그랬고 지금으로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인권말살 조건 하의 산업시대였지만 노력해왔고, 장준하선생이 그랬고,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고, 문익환 목사가 그랬고, 전태일 열사가 그랬고,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그랬고, 6월 항쟁이 그랬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고, 그리고 지금 바로 지금 결국엔 무력하게 테러방지법이 통과될 지언정 새볔을 밝히고 있는 필리버스터링 야당 의원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리고 2-3만명의 필리버스터 시청자 분들이 그렇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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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논쟁의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의 진일보는 항상 더딥니다. 이 이유는 단순히 무엇이 나에게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이 무엇이 우리에게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은 나를 넘어서는 우리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를 넘어서는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나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디고 느리고 답답하고 때론 개개인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장의 결과론을 놓고 보자면 실패이고 패배입니다. 아마 이제 26일이 밝았고 야당과 야당을 위시한 저를 포함한 사람들은 어쩌면 오늘 또 한번의 무력감을 느껴야 할지도 모릅니다. 수십시간, 열댓명의 야당의원이 이어온 힘겨운 필리버스터 투쟁은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실패와 패배의 이유와 복기를 통해 다음 라운드의 패배를 답습하지는 말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이 실패와 패배가 결과론만에 의해서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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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이번 필리버스터에서 저는 그간 잃어버리고 있었던 우뇌의 작용을 은수미의원의 10시간 마라톤 연설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되찾은 기분이 듭니다. 또한 10여명 의원들의 절절한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시사게가 활발해지고 몰랐던 야당의 원석과 같은 의원들의 발언을 보고, 즐거운 정치패러디가 난무하고, 그를 후원하는 물줄기가 생기고 또 그 힘이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는 이 상황이 저는 그냥 즐겁습니다. 그 누구도 심심한 위로의 말을 심지어 친한 지인조차 저의 어두운 아우라에 밀려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 위로의 말을 이 상황을 통해 듣게 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기는 하지 맙시다. 포기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답답하고 더디고 힘들고 어렵지만 잠시잠깐 무력하게 느껴지시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처럼 우리는, 개개인은 강하지만 약하더라도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두려움에도 나를 넘어서 우리가 한발짝씩만 나서고 그 신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사회는 분명 변화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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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다시한번 제가 제작한 은수미의원의 필리버스터 헌정영상을 링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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