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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중에서 -
게시물ID : history_254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때그인간
추천 : 1
조회수 : 847회
댓글수 : 22개
등록시간 : 2016/02/26 13:07:55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중에서 -

 

: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일제의 조선 총독부가 민족사의 편찬과 자료 수집을 위해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 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총독부 총독 직할 기관이었다. 조선사 편찬 위원회 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 편찬 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이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취조국을 두었고, 그 역할은 1915년 중추원 편찬과, 1922년 조선 총독부 직할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학자들이 자료 수집과 집필에 참여하였고,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1938년 <조선사> 35권,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편을 편찬하였다. 1945년 8·15 광복으로 해산되었다. 편수회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고 나중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취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의 민족 역사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일제의 관청이 협력에 동원되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가 조선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국 민족사를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단군 조선’을 단순한 신화로 격하하여 사료에서 없애고 민족적 기상이 돋보이는 주요 역사 사실에 대한 축소 및 왜곡이 있었다.

 

특히 조선사 편찬 이후 전국에서 모은 역사 사료 원본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고 일부 사료들을 없어 버려 해방 이후까지 민족사의 왜곡이 이어졌다. 이 편수회에 참여한 부역 학자들이 해방 이후 역사학계에 자리잡아 한국사 왜곡을 더욱 조장하는 등 조선사편수회는 오랫동안 민족사 연구에 해독을 끼치고 사학자들의 민족사 연구를 크게 제약하는 부정적 기능을 한 원천이 되었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한국사 바로 잡기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출처 : 네이버 기관단체사전_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 대한제국 시절 국사교과서 - “성덕이 높아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을 삼아 단군이라 하고 비서갑(非西岬)의 여자를 택해 왕후로 맞았다.”

- 47대 단군의 이름도 나옴.


○ 조선사편수회 위원회

- 1929년 12월 23일 3회 위원회에 최남선 처음 참석.

- 1932년 3월 31일 통일신라 이전, 신라통일시대 총 3권 출간. - 최남선 6~8회 위원회에서 고대사 부분 강력 항의.

- 1932년 7월 21일 6회 위원회에서 <삼국유사>의 ‘석유환인’부분 지적하며 ‘천인의 망필’이라 울분. 이마니시 류의 박사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 ‘국’자 위에 ‘인’자를 칠하여 경망스럽게 개찬하였다.

 

“단군, 기자가 적어도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조선사’에 채입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다.”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년체 형식이어야 하는 데 어느 왕, 몇 년, 월, 일인지를 모르므로 수록할 수 없었다.”

 

수천년 전 고대사를 편찬하면서 몇년 몇월 몇일에 그런 사실이 있었느냐 자료를 제시하라는 것은 억지이다.

- 1935년 7월 5일 9회 위원회(마지막) 최남선 불참.

 

<조선사>35권, 총 24,111쪽 중 ‘단군’은 단 한번 고려국운이 쇠퇴하여 홍건적, 왜구 창궐로 고난 겪는 부분에 기록했다.

출처 http://cafe.naver.com/wehistoryworld/3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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