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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 의원의 필리버스터에 나온 김남주 시인을 무작정 찾아갔었어요.
게시물ID : sisa_6726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뚱아저씨1219
추천 : 36
조회수 : 2183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6/02/28 17: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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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요즘 채널 64번으로 고정입니다. 우리집 국회방송은 채널 64번이기 때문입니다.
 
아.. 진짜 이번 필리버스터는 재작년인가 드라마 중에 유일하게 봤던 '별에서 온 그대'보다도 훨씬 더 흡입력이 있네요. 게다가 필리버스터 하는 의원들 한 분 한 분마다 다 자기의 장점과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서 아무리 오래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학영 의원꼐서 필리버스터를 하고 계시는데, 거기에 김남주 시인의 시가 몇 개씩이나 인용이 되는 것을 보고 울컥 지금은 고인이 된 김남주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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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후반 당시 김남주 시인은 학생운동을 했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분은 시인이기도 했지만 전사이기도 했었죠.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1979년에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실형 1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습니다. 저희가 한참 대학을 다닐 때 김남주 시인은 복역중이었는데 그 분이 썼던 시집 '농부의 밤' '나의 칼 나의 피'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특히 시집 '나의 칼 나의 피'를 처음 서점에서 접한 순간 선 자리에서 손을 덜덜 떨면서 그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그리고는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고 그 시집을 꾹 움켜쥐고 집으로 와서 뛰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또 한 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나의 칼 나의 피'는 대학시절 나의 성경과도 같은 시집이 되었었죠.
 
시간이 흘러 1988년 겨울에 김남주 시인이 가출옥을 한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시집으로만 만나뵈었던 그 분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김남주 시인은 예정대로 출옥을 해서 영어의 몸에서 벗어났고, 출옥하자 마자 9년을 옥바라지하던 연인 박광숙씨와 광주의 문빈정사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마 그 때 주례를 봤던 스님이 '지선' 스님이라고 정말 화끈한 스님이었어요. 말을 어찌나 과격하게 하셨던 분인지. ㅎㅎ
 
당시 대학을 막 졸업할 무렵의 저는 김남주 시인을 꼭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인이 계신 곳을 알아낼까 하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가 김남주 시인이 소속된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곳을 알아내고 그곳으로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00대학교 학생인데 김남주 시인을 꼭 뵙고 싶어서 계신 곳을 알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시 전화를 받았던 분께서 "학생들에게 그런 전화가 몇 번 왔었다. 그런데 김남주 시인께서 지금 조용히 쉬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연락처를 알려드릴수가 없다."
 
그 때 저는 실망을 했지만, 어떻게든지 시인이 계신 곳을 꼭 알아내고 싶었고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정말 무작정이었어요. 아마 지금 같으면 감히 그런 엄두를 못냈을 터인데 그 때는 마치 스타를 좋아하는 팬의 팬심과도 같은 그런 마음으로 무작정 보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시집 '나의칼 나의피'의 맨 뒷편에 시인의 약력에 대해 쓴 페이지에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화리 000번지에서 출생'이라는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 때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로 바로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기로 맘먹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김남주 시인의 시에서도 자주 나오는 어머님도 뵐 수 있고, 동생 덕종씨도 뵐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는 해남을 내려갔습니다. 그 때는 서울에서 해남을 한 번에 가는 차가 없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중간기착지인 광주로 내려가서 1박을 한 후에 다음날 아침에 다시 그곳에서 해남으로 시외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화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혹시 김남주 시인의 집이 어디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곳의 주민분께서 알려주시더라구요.
 
당시 김남주 시인의 동생은 농사도 지으면서 해남농민회 활동을 하셨던 매우 호탕한 분이셨어요. 서울에서 대학생이 형님인 김남주 시인을 만나러 왔다니까 껄껄 웃으면서 "잘왔다. 막걸리나 한 잔 하고 저녁 밥먹고 여기서 자고 내일 나랑 같이 형님 만나러 가자"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기대하지도 않고 무작정 찾아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시인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뛸듯이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아우 덕종씨(저보다는 17살쯤 연배이신 큰 형님뻘 되시는 분)와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 참 많이 나눴습니다. 생가의 그 집에는 아우 덕종씨와 함께 시에서도 자주 나오는 늙으신 '어머니'도 함께 살고 계셨는데 대학생이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하니까 무척 반겨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거기서 묵고 다음날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광주에는 김남주 시인의 처남, 즉 부인인 박광숙씨의 오빠가 계셨어요. 그 분은 전남대학교 교수셨습니다. 동생이 갑자기 왠 대학생이랑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사연을 묻더니 김남주 시인께서는 껄껄 웃으면서 "잘됐다. 나도 오늘 마침 서울 올라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점심먹고 같이 올라가자"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졸지에 김남주 시인의 처남집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김남주 시인과 함께 동생이 운전하는 승합차를 타고 차가 약간 막혀 6시간 정도되는 거리를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오면서 정말 얘기 많이 나눴어요.
 
시인께서는 출옥하고 나서 처음만난 대학생이 바로 저였던지 요즘 대학생들의 대학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시고, 저도 시인에게 궁금한 것 참 많이 물어봤습니다. 그러다보니 6시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늘 건강하시라고 인사드리고 헤어져서 집으로 오는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저의 대학생활, 아니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김남주 시인을 재야 단체등에서 주최하는 '김남주 시인 초청 시와 문학의 밤'이라는 행사에서 몇 번 더 뵈었습니다. 그 때 마다 저를 알아보곤 "너 또 왔니? "하고 반겨주시던 김남주 시인.
 
아.. 지금 살아 계신다면 벌써 몇 번은 찾아가서 세배를 드렸을텐데.. 아.. 정말 그립고 또 그리운 그 분입니다.
 
.
.
.
 
 
 
나의 칼 나의 피
 
만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그대 살찐 가슴 위에 언덕 위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 위에 나는 심는다
평등의 나무를
 
그러나 누가 키우랴 이 나무를
이 나무를 누가 누가 와서 지켜주랴
신이 와서 신의 입김으로 키우랴
바람이 와서 지켜주랴
누가 지키랴, 왕이 와서 왕의 군대가 와서 지켜주랴
부자가 와서 부자들이 만들어놓은 법이
법관이 와서 지켜주랴
천만에! 나는 놓는다
토지여, 토지 위에 사는 농부여
나는 놓는다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는 놓는다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
고개 너머 평짓길 황톳길 위에
사래 긴 밭의 이랑 위에
가르마 같은 논둑길 위에 나는 놓는다
나는 또한 놓는다 그대가 만지는 모든 사물 위에
매일처럼 오르는 그대 밥상 위에
모래 위에 미끄러지는 입술 그대 입맞춤 위에
물결처럼 포개지는 그대 잠자리 위에
투석기의 돌 옛사랑의 무기 위에
파헤쳐 그대 가슴 위에 심장 위에 나는 놓는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오 평등이여 평등의 나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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