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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도리
게시물ID : panic_865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ngbi
추천 : 11
조회수 : 191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2/29 20: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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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선풍기의 고갯짓은 계속됐다. 우는 아기를 달래듯 세심하게, 동시에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느긋하게. 타이머가 돌아가는 180분간 한없이 도리질 쳤다. 덕분에 나는 숙면이었다.

문제는 180분 후였다. 타이머의 최대치인 180분. 오직 그 시간만을 온전히 잠들 수 있다. 딸깍, 소리와 함께 타이머가 멈추고 선풍기가 정지하면 이내 뒤척이고, 뒤척이다 뒤집고, 뒤집다 걷어차고, 걷어차다 결국 깨어나고야 만다. 다시 타이머를 돌리고 도리도리 선풍기가 몸을 훑어 댈 때야 비로소 잠들 수 있다. 고로 나는 180분에 한 번씩 깨어나는 것이다. 불편하지만 그나마의 최선.

선풍기가 없다면 한여름의 밤을 견디기란 몹시 괴롭다. 8월의 땅덩이란 마치 거대한 프라이팬 같아서 기나긴 낮 지글지글 달구어진 열기가 좀체 식지 않는다. 8월의 밤은 그저 검은 낮 일 뿐이다.

참 다행으로, 우리에겐 선풍기가 있다. 그리하여 선풍기는 희망이고 축복이며 평화다. 심지어 신이다. 축적된 복사열이 스멀스멀 등판을 감싸 쥐는 여름 밤, 우리의 기도는 하늘보다 미풍 약풍 강풍의 나란한 버튼 위로 먼저 닿으며 자비로운 회전 버튼이 실내 온도를 구원한다. 모두들 선풍기를 찬양하자. 선풍기의 도리질 안에 충만하며 윙윙거리는 속삭임은 천국의 노래처럼 감미로울지니. 아아, 미풍 약풍 강풍의 이름으로 에이 맨.

 ***

하지만 맙소사. 깊은 신앙에 대한 시험일까? 풍느님의 목소리와 손길에 매일같이 몸을 던진 결과, 방금 전, 그분이 멈추어 서고야 말았다.

도... 리, 도도리, 도돌이리리리릴리리리.... 파드닥, 푹.

세심하게 나를 훑던 고결한 목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하느님 맙소사. 그제야 하느님을 찾는다. 그러나 기도는 하늘에 닿지 않는지 아무리 기도하고 애원해도 선풍기는 기어코 움직일 줄 모른다. 선풍기를 꼬옥 끌어안는다. 창살 가운데 동그란 외눈에 키스한다. 감긴 눈은, 그러나 떠지지 않는다. 뜨거웠던 엔진은 싸늘하기만 하다.

망연히 망가진 선풍기를 보며 꾸욱 눈가를 누른다. 송골송골 맺힌 눈물이 떨어져 선풍기 날개로 흘러 든다. 돌지 않는 날개는 뚜욱뚜욱 눈물을 그저 받아내고만 있다.

 ***

그날 저녁, 의사가 찾아왔다. 의사는 청진기로 선풍기의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는 불안해진다. 종이 아닌 횡으로 움직이는 고개 때문에. 의사는 커다란 왕진 가방을 열고 몇 개의 드라이버를 꺼낸다. 이곳저곳을 살피던 의사가 한 참 후 말한다.

“가망이 없군요.”

도리도리. 도리질 치는 의사의 고개. 나는 선풍기를 바라본다. 애처로운 고개의 까딱임. 선풍기의 날재짓에 귀 기울인다. 그렇군. 언젠가 약속했듯 존엄적 죽음을 선사할 시간. 나는 울 것 같은 눈으로 선풍기를 바라본다. 선풍기의 고개가 살짝 까딱인다. 결국, 종으로. 뚜욱. 부러진다. 정확히는, 부러짐 당한다. 그건 오래전 우리의 약속이자 선풍기의 의지였다. 의사가 성호를 그으며 애도를 표한다.

미풍 약풍 강풍의 이름으로 에이 맨.

 ***

다음날, 고물상 리어카에 선풍기를 묻고 나 역시 의사가 그랬듯 정갈한 성호를 긋는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길, 

새 선풍기를 구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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