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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민주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게시물ID : sisa_6749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gelinus
추천 : 6
조회수 : 221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03/01 02: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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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정당도 아니었다.
02년 대선때 노무현을 지지할 것인가 권영길을 지지할 것인가로 학생운동 내부에서 진통이 많을때
아마도 그때가 내가 민주당에게 가진 기대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나는 진보정당의 의미있는 득표보다 이회창의 낙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학생운동 내부에서도 상당히 실리를 따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매번 선배들의 운동방식에 불만이 많았었다.
되지도 않을 것에 매번 동력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학생복지에 좀 더 신경써서 학교조직을 먼저 탄탄히하자...그 것이 내 주관이었다.


그러다 나도 어느 정도 학교 내에서 선배라고 불리는게 익숙해질 학번이 되었고,
진짜 치열한 등록금 투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학생대표자들의 긴 단식이 있었고, 그간 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고학번 선배들은 상당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렇게가면 학교랑 학생회 양 쪽 모두 발을 빼기 어려워진다, 현실적으로 결국은 합의로 결정이 나야하는 것인데 그 시기를 놓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당히 현실적인 요소를 많이 따진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등록금 투쟁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나도 모르게 비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학번 선배들의 말에도 나는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우들의 여론은 호의적이었고, 충분히 우리가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런데 어느 형이 말했다.
'투쟁은 마무리를 잘할 수 있어야한다. 져도 이기는 게임이 있고 이겨도 지는 게임도 있다. 이 싸움이 더 지속되면 우리는 이겨도 지게된다. 학내 운동이 와해될 것이고, 반운동권이 다시 학생회를 잡게되면 우리의 승리는 단지 몇 개월간의 축제놀이로 끝날 것이다.'


결국 나는 미더운 마음으로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학교 측은 이미 고지한 등록금을 다시 내릴 수는 없으니 올린만큼 학생들이 원하는 항목에 상당비율을 편성해주기로 했다.
우리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업과 그간 설문조사를 통해 학우들이 원했던 복지사업을 거의 모두 포함시켜 협상안을 내밀었고, 결국 대부분 그렇게 정리되었다. 나는 학우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이번에야말로 일단 고지하고 보자라는 학교 측의 행태를 바뀔 수 있는 유의미한 방점을 찍게되리라 그렇게 말했었는데 나는 스스로 등록금 투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학교 측과의 협상이 끝나고 각 단위 대표자들 간의 회의가 있은 뒤, 협상안은 자보와 유인물로 온 학교에 알려졌다.
그리고 운동권을 싫어하는 공대 사람들이 총학 간부였던 내게 '와-이게 진짜로 될 줄은 몰랐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엄청 많이 들었다. 운동권=빨갱이던 그들에게조차 너무 만족스러웠던 결과였던 것이다. 애당초 기대치가 낮아서였겠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학생회를 칭찬해주었다.
나는 패배라고 생각했던 것이 학우들에게는 대승리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져도 이기는 게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2016년의 나는 더민주의 필리버스터의 출발선에서 '3월까지 갈리 만무하고 저러다 적당히 합의하겠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팔짱을 끼고 있던 나의 손은 점점 마우스와 키보드로 향하여 의원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 끝이 어디까지일까가 매우 궁금했다.
사실 3월 10일까지 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들이 유의미한 성과를 어떻게든 이끌어내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됐습니다라는 패배주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하면 이 정도는 얻어냅니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봅시다로 갈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지극히 현실적인 그들의 결정에 나는 다시 맥이 풀렸다.
그들은 필리버스터로 무엇을 얻었을까.
지금 필리버스터로 박수치는 사람들이 후에도 이렇게 계속 박수를 쳐줄 그들의 변치않는 지지자들이라고만 생각한건가.
나는 다만 이 필리버스터라는 모험적인 시도가 조금이라도 '승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런 결과로 마무리되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그러나 필리버스터의 종결을 애써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에 아쉬움을 표한 사람들에게도 이 필리버스터로 승리의 기쁨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결국 이 필리버스터에서 우리는 패배했다.



간만에 그들에게 걸었던 높은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문득 생각해본다.
여기서 끝내지 않고 계속 갔다면 예전의 그 등록금 투쟁때 선배들이 나에게 해줬던 말처럼 '이겨도 지는 게임'이 되었을 것인가?
나는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내는 것이 '져도 이기는 게임'이었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더 아름답게 끝낼 수 있었을텐데 왜 그들은 세련되게 무대의 마무리 연출을 하지 못했는가.
3.1절의 밤이 왜이리 서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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