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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웅 혹은 폭군, 스탈린(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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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2
조회수 : 743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1/05/05 13:19:41
오늘은 스탈린 집권기 중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대숙청 시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21. 대숙청 I (1934-1936)

비록 대숙청이 20세기 역사상 가장 큰 비극적 사건 중에 하나이지만 아직까지도 동기나 정

확한 피해자 규모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진 부분들이 많습니다. 동기측면에서는 스탈린이 구

체적으로 어떤 동기로 이렇게 대규모 숙청을 하게 되었는지 그 자신이 직접적인 기록을 전

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죠. 규모에 있어서는 당시 워낙 많은 

인명이 마구잡이로 희생되다 보니 통계가 정확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구소련 

붕괴이후 일부는 아직도 미공개이긴 하지만 많은 비공개 자료들이 기밀해제 되어 현재에는 

이전보다 대숙청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죠.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희생자 숫자에서

부터 심지어 대숙청의 기간에 이르기까지 현재까지 완전히 통일된 의견은 없는 것 같습니

다. 대숙청의 기간을 넓게 잡아 1930-39년 정도를 이야기한다면 희생자 숫자는 대략적인 

추정 따라 1000만명 이상에 달한다고 합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1933년의 인위적 대

기근이나 반 쿨라크 캠페인에 의한 희생자도 어림잡아 1000만은 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기간을 줄여서 34-38년 정도로 잡는다면 이전에 통계들은 100만 명 이하로 사망자를 추정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발견된 자료들은 실제 숫자가 2배 이상임을 보여주고 있

죠. 이른바 예조프시나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NKVD 의 공식 자료로만 하루 1000명이 체

포되었고, 이들중 적어도 절반은 바로 총살되었습니다. 그래서 150 - 200만 정도의 인명이 

36-38년 사이 숙청되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1933년 이전까지의 대기근과 

반쿨라크 캠페인 및 기타 숙청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1934년 이후의 상황을 설

명하려고 합니다. 34년에는 앞서 설명한 오게페우가 NKVD 산하로 흡수되었고, 이제 숙청

은 NKVD 가 주로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34년은 엔카베데의 수장이던 멘진스키가 운좋게도 

자연사하고 이전부터 숙청에 두각을 나타내던 겐리흐 야고다가 새로운 엔카베데의 수장이

된 해였죠. (이후의 비밀경찰 수장들은 모두 자연사하지 못했습니다)이 해에는 한동안 주춤

했던 스탈린의 숙청이 다시 활기를 띄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대숙청의 시작을 34년

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중심이 되는 계기는 바로 키로프 암살 사건이었죠. 본래 스탈린 파

에 속하던 니콜라이 키로프 (Sergey Mironovich Kirov) 가 1934년 12월에 청년 당원이던 

니콜라예프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이 암살 동기에 대해서 키로프와 니콜라예프의 아내가 

불륜관계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이 암살 사건과 관련되어 소비에트의 주

요 인물을 암살하려는 대규모 음모를 적발했다고 주장하므로써 대규모 숙청의 막이 오른 것

이었죠. 그러나 이 사건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실 키로프의 경우 본

래 스탈린 파이긴 했지만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일부에서는 스탈린의 후

계자나 대항마라는 이야기 까지 듣고 있었죠. 당연히 의심많고 누군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스탈린이 이번 사건에 관여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근거는 훗날 스탈린 사후, 본래 스탈린의 충복이던 흐루시초프가 

1956년에 행한 비밀 연설에서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은 스

탈린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스탈린은 대숙청이 필요했을

까요?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당시 소련의 여러 계층에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것과 연관

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 식 경제 개발과 농업 집단화의 결과 군수 산업 위주의 공업

화만 달성되었고, 많은 국민들이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임금과 식량, 소비재를 공급받았죠. 

그리고 많은 이들이 스탈린과 공산당의 폭압적인 통치에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불만 세력을 한꺼번에 일소하고 공포 정치를 통해 이 문제를 타개하려 했다는 것입

니다. 아무튼 키로프 사건이후 엔카베데에 의한 대대적인 체포와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습니

다. 본래 숙청 및 처형은 스탈린 집권 시절에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이 때까지는 주로 희생자가

농민이나 쿨라크등 일부 계층이 중심이었죠. 그러나 이후로는 불특정 다수가 갑자기 

끌려갔고, 이중에 특히 공산당 및 붉은 군대의 간부와 장교들이 상당수가 포함되었습니다. 

당시 추정되는 이유는 집권 세력 및 군부의 사상 및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모두 제

거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규모는 너무 지나쳐 사실상 지도부에 거대한 공백이 생

기고 말았습니다. 우선 스탈린은 과거 실각시킨 자신의 동료들을 먼저 피의 제물로 삼았습

니다. 과거 동지이다가 라이벌이 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반 소비에트 활동을 한 혐의

로 체포되었습니다. 특히 이중에서 카메네프는 앞서 글에서 설명했던 대로 스탈린의 친

구이자 스탈린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이끈 인물이었지만 역시 살아남지 못했죠. 처음에 그들

은 날조된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고 합니다. 35년에 그들은 키로프 암살의 배후로 징역형

을 선고 받았지만, 36년에 다시 잡혀와 고문을 당했고, 결국 음모를 자백하면 감형해 주겠

다는 말을 듣고 없는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자백한 죄목으로 그 다음날 

총살당했습니다. 과거 스탈린과 당에게 충성했다고 해도 이 숙청을 피해갈 순 없었죠. 당시 

이유도 없이 반소비에트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된 이들 중에는 당원들도 상당수 포함되

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숙청대상이 된 인물 중 가장 의외인 인물은 바로 NKVD 의 

수장 겐리흐 야고다 바로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다가 왜 숙청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스탈린의 편집증적 의심은 때때로 스스로를 의심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야고다에 

대해서 한번 의혹의 눈길이 간 것 만으로도 그는 유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고다를 숙청

하는 임무는 그 후임인 예조프에게 돌아갔지요. (단 실제 숙청된 건 38년이라고 합니다)

에휴...글이 너무 길어서 둘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_-;

1. 죽음으로서 대숙청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 키로프입니다.

2. 30년대 초중반을 피로 물들인 겐리흐 야고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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