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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2 편지의 한 조각
게시물ID : readers_242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거세된양말
추천 : 3
조회수 : 35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05 16:09:33
(...)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사족입니다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문학계에 몸을 담은지 10년이 지났습니다.
10년간 단 한 번의 공모전 수상도, 신춘문예 당선도, 심지어는 약소문예지에서의 데뷔조차 없었습니다.(이 점은 다소 이상한 사건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네의 문예지 공모전에 제 시가 당선되었다면서 출판비와 문단 등단비 60만원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을 사회와 자발적으로 격리되어 19,20세기의 유럽문학과 소련문학에만 빠져 살았으며
현시대의 대한민국이라는 인간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말살 행위를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몰이해적 괴물에 잡아먹혀 미술관에 배설물을 전시하는 상황에 처했으며, 문학은 <순수>나 <고전>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들은 모조리 목이 잘리고 국제경제의 위험과 더불어 텍스트가 혁명을 일으키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텍스트에 기반하여 혁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제 텍스트는 오락행위를 위한 도구이고, 소위 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공연한 자위물에 불과합니다.
한때는 고전문학의 부활을 바랐습니다. 가죽자켓을 입은 록커들이 클래시컬 뮤직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아 현대적 멜로디로 재해석하고, 미술은 더 이상 몰이해를 자극해 돈을 버는 것을 그만두고 인상파의 근원으로 재탐구해가고, 문학은 그저 오래된 책장에서 잠들어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존주의를 비롯한 온갖 문학사상들이 현대에 재해석되어 인간정신의 혁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권력(니체적 의미의)을 갖는 텍스트가 탄생하기를 바랐습니다.

아! 제가 왜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하실 겁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문학에 쏟아부은 결과, 저는 말그대로 사회적 쓰레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글 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사회적 능력도 없는, 돈도 없고 노동력도 없고 시답지않은 정신질환에 휘둘리는 야간활동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도대체 이 시대에 문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를 고민하고 10년만에 처음으로 아르튀르 랭보가 어떤 모습으로 펜을 꺾었는지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의 습관처럼 강박적으로 계속해서 작품을 찍어내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현대-한국-독자들의 <Needs>를 충족시키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섹스와 바이올런스와 드러그와 알코올과 카페인과 온갖 말초적 쾌락으로 이루어져 꿈틀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저는 제 목을 겨냥하고 떨어질 단두대의 칼날만 기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제가 그 칼날을 희망했기에! 시인 로트레아몽 백작을 아십니까? 천박한 신분 주제에 파리로 올라와 자신을 <로뜨레아몽 백작>이라고 자칭하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산문시들을 뱉어내다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비로 출판한 <말도로르의 노래> 한 권만을 남기고 죽어버린 사람입니다. 그것은 썩어 사라지는 수밖에 없었지만, 놀랍게도 100년 뒤 어떤 초현실주의자가 파리 대도서관에서 그 낡아빠진 책을 발견하고 세상의 등불을 비췄습니다. 죽은지 100년이 넘어 로트레아몽 백작은 불현듯 천재가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의 문학계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장황한 산문시를 분석하고 공부하고 찬탄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비록 이 시대가 쾌락만을 바라는 시대이기에 스스로 천재적이라고 생각하는 저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죽은 뒤에라도 각광 받기를 바라서?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라는 이름의 책까지 낸 니체가 정신병원에 들어갈때까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유럽문단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박수갈채를 보낼 때 정작 프리드리히 니체는 격리병동에서 이식증에 걸려 자신의 배설물을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요. 천재라는 것은 실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양자역학적인 시각에서의 입자의 존재와 비슷합니다. 관측자가 입자를 관측했기 때문에 입자가 입자로서의 성질을 가지는 것처럼, 천재 역시 독자가 작품을 읽고 영감을 느꼈을 때 그 작가는 천재가 될 가능성을 얻는 것입니다. 작가는 독자에 선행한다는 틀림없는 물리학적 진실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독자에 의해 재창조됩니다. 독자가 없어도 작가는 존재할 수 있지만, 독자가 없으면 작가는 관측자를 잃어버린 입자처럼 파동으로 변해 실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의 작품을, 아아! 더이상 작품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할 것도 없이, 컨텐츠라고, 엔터테이먼트라고, 상품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21세기에 와서 구두제작공과 소설가는 똑같은 위치에 서고 말았습니다. 좋은 구두는 신었을 때 발이 편하고 걷기 좋듯이, 좋은 소설은 읽기 편하고 독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집단도 다수도 공권력도 국가도 사회도 인류도 아닙니다. 그냥 개인입니다. 개인의 필터로 개인의 사실을 개인의 진실로 만들어서 개인의 작품을 펴내는, 약하디 약한 개인입니다. 더군다나 인류의 문화적 종말은 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극단에 달해있고 말초적이 되고 만개한 꽃처럼 위태위태합니다. 다음 수순은, 분명히도 종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저는 돈을 벌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남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저의 멋있는 한 순간의 필치로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으면 합니다. 고전문학의 부활? 아, 이미 손을 떠난지 오랩니다. 그것도 모두의 손에서요! 너무 장황한 글이 되었군요.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고 느꼈던 빛의 덩어리 같은 충격, 그리고 알베르 까뮈의 미완유작 <최초의 인간>을 읽으며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에서 흐느껴 울었던 것. 그 과거들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산산조각. 인류문화의 멸망이 가깝기 때문에 더 이상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처참하게 찢겨 죽었고, 다자이 오사무는 <중2병>이라는 손가락질에 지쳐 미치고 돌아버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 것입니다.
제 난도질 된 영혼의 값을 매겨주십시오.


항상 귀사의 번영과 성공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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