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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츠굴도하 남작과 엘시백작.
게시물ID : freeboard_12878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어스름지기
추천 : 0
조회수 : 1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12 18:51:14
딱.
조용한 소리와 함께 엘시가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효과적으로 말문을 막는 방법이었다.
굴도하남작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엘시의 착점을 물끄러미 보다가 흑돌을 집어 들었다.
빨리 바둑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남작의 다음 착점이 끝나자마자 엘시 또한 백돌을 내려놓았다.
산들바람에 뭉게구름 떠가는 듯한 행마다. 평온하고 고요한..........
착수하려던 남작은 움찍하며 돌을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반면에 내려놓을 뻔한
돌을  아예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남작은 바둑판을 살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어 엘시를 보았다. 엘시는 팔짤을 낀 채 
묵묵히 바둑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저항하지 않고 거스르지 않는 수다.
남작의 다음 착점은 절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놓을 곳이 없었다.

굴도하 남작은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절대의 수를 놓고
고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은 조금 늦게 떠올랐다. 남작은 자신없는
태도로 착수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엘시의 오른손이 홀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백돌을 내려놓았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이고 착수는 여전히 평온하다.

너무 평온하다.

또다시 절대수다. 남작이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은 가로 십구로, 세로십구로의
바둑판 위에 오직 한 군데뿐이었다. 패착은 커녕 완착도 아니다. 분명히 이길 수 있는
외길수순이었다. 하지만 남작은 그 절대성이 못마땅했다. 조금 전부터 호흡이 
불안해지는 것또한 거슬렸다. 예의를 더 돌볼 수 없었던 남작은 다음 착수를 하기에 앞서
장고했다. 엘시는 다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작이 도저히 다른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착수하자 조용히 백돌을 들어 바둑판 위에 놓았다.

굴도하 남작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 나왔다.

남작의 시야가 좁아졌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엘시도 볼 수 없었다. 
굴도하남작의 시야는 바둑판 하나로 집약되었다. 가로 열아홉 줄,
세로 열아홉 줄의 세계 속에서 남작은 스산함을 느겼다. 
그대로 바둑판 속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함에 남작은 놀랐다. 
그는 자신의 손도 제대로 볼 수 없어 더듬더듬 돌을 집어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마치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바둑판을 밀어내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려 할 때 바둑판 위에 새로운 백돌이 나타났다. 
남작은 눈을 부릅뜬 채 그 돌을 바라 보았다.

그 돌이 두 개, 네 개, 여덟 개로 늘어났다.

수십 년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놓을 곳이 없군."
굴도하 남작은 고개를 들었다. 낮잠이라도 한숨 잔 것 같았다.
몸 곳곳이 묘하게 뜨겁고 일어나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고 싶어지는 낮잠이었다.
굴도하 남작은 눈을 비비고 엘시를 응시했다. 조금 후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사람은 묵묵히 바둑돌을 옮겼다. 굴도하 남작은 계가가 끝난 바둑판을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백이 열아홉 집 앞서 있다.

굴도하 남작은 마지막으로 그런 대패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도 환격 배우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엘시의 바둑은 평온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바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남작의 바둑에도 실착은 없었다. 같은 상황에 또 처하게 된다면
남작은 자신이 똑같은 바둑을 두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둘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는 졌다. '여섯 점 접바둑으로 열아홉집을 졌다고?' 수졸과 입신의 대결에서도 
나오기 힘든 결과다.
엘시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복기는 어렵겠군. 양해해주게."

굴도하 남작은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황당했다. 겨우 복기를 생략하겠다는 말에
살의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발리츠 굴도하는 그것이 진솔한 반응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엘시의 멱살을 붙잡고서라도 자신이 어떻게 졌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복기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발리츠는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어 엘시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엘시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고 잠자코 돌을 쓸어 통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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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4권 200쪽 전후로 있는 내용인데
바알못이지만 바둑이라면 생각나는 게 이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러고보니 이책도 벌써 10년이 다되가네요..
이영도님 담 작품은 언제랍니까?
병충해가 일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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