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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녀
게시물ID : panic_867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ngbi
추천 : 12
조회수 : 2134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6/03/15 19: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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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녀



-열다섯 


그날, 비는 내려왔다.     


후드득 하는 몇 방울의 노크를 시작으로 사뿐히 자신의 방문을 세상에 알렸다. 비는 거세지 않았다. 나긋하며 부드러웠고 섬세하면서 고르게 땅 위에 앉았다.


나는 아마 집으로 향하고 있던 것 같다. 사실 집이 아닐지도. 하지만 어디던 상관없었다. 그저 네모난 회색 건물과 암시 같은 종소리를 벗어난 것만으로 충분했다. 우산이 없어도 좋았다. 팬티까지 젖어버려 엉덩이가 눅진해도 기뻤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기에. 어른들은 물론 탈선이라 부르겠지만 내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내게 있어 탈선이란 무표정한 교실 속 삐걱 소리를 내는 책상 고리에 버겁게 가방을 걸고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 속에서 바라본 울타리 밖은 영롱한 무지갯빛이었다.

     

결국 나는 회색의 감옥을 넘어 무지개 세상으로 들어섰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입고 있는 옷이 나의 원점을 말해주었기에. 온통 회색으로 물들인 바지와 재킷은 또한 무지개 세상과 어울리지 않았다. 격리자의 낙인으로 만들어진 칙칙한 모양새. 나는 신데렐라를 생각했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왕자님의 파티를 애달파하던 그녀. 다만 동화 속 그녀에게는 호의적인 마법사가 존재했고 불행히도 나는 현실의 신데렐라일 뿐. 무지개 세상과 교복, 오후 한 시의 비 오는 거리, 의심스러운 행인들의 눈초리만이 내게 허락된 판타지였다.

      

나는 방향을 몰랐다. 울타리 밖의 세상엔 표지판이 없었다. 2-1과 음악실, 컴퓨터실과 미술 실을 오가던 회색 건물 속에선 가야 할 길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길을 찾지 못했다. 내가 찾는 길은 무지개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무지개 세상 어디에도 분명한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을 헤매던 나는 몹시 허기를 느꼈다. 슈퍼마켓에서 포켓몬빵과 바나나 우유를 집어 나와 지붕이 있는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물론 이제 나는 길을 찾는 사람답게 띠부띠부씰을 가차 없이 내동댕이쳤다. 빗줄기 속에서도 이상해씨는 동그랗게 뜬 눈을 감을 줄 몰랐다.     


정류장에 앉아 있자니 의외로 회색 건물이 그리워졌다. 쓰레기가 잔뜩 박혀있는 책상 서랍도, 일 년을 빨지 않은 체육복이 담긴 사물함도 보고 싶었다. 정감 없는 네모 건물이 마치 폭신한 스펀지케이크처럼 회상됐다.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도 출처불명의 햄버거가 있는 매점도 플라이 니킥을 주고받던 친구들도 너무나 소중했다. 한나절의 탈출이 마치 오백 년 된 고독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리운 모든 것은 정류장 벤치 아래쪽에 고인물 웅덩이 위로 스미듯이 떠올랐다. 


웅덩이 속 학교는 활기찼다. 회색 건물은 황금빛 물고기처럼 요동쳤고 운동장엔 보드라운 실크카펫이 넘실댔다. 아치형의 무지개로 만들어진 정문으로 조잘대며 드나드는 친구들과 미소로 아이들을 하나씩 쓰다듬는 선생님. 그리고 단발머리의 소녀는 가만히 학교를 내려다보았다.


단발머리의 소녀는,     


잠깐, 우리 학교는 남학교잖아. 내가 의심할 틈새도 없이 소녀는 점점 학교의 하늘을 덮어 왔다. 웅덩이 속 소녀는 검은 실루엣으로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학교의 풍경 전체를 가려버렸다. 웅덩이는 이제 단발머리 실루엣의 검은 그림자로 가득했다. 꿈꾸듯 비추던 나의 학교가 사라지자 왠지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열다섯의 나는 열두 개월 아이처럼 울어댔다. 쪼그린 채 웅덩이 앞에서 바나나 우유를 물고 서러웠다. 그렇게 울다 웅덩이에 바나나 우유 곽을 무참히 던져 버리고 서서히 일어났다. 다리가 저려와 코에 침을 바르며 돌아서는 순간 나는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웅덩이 속 실루엣과 같은 테두리의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검은 로모카메라를 들고 치마를 줄이지 않은 교복을 입은 채. 소녀는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웅덩이 속 학교를 덮은 건 천사였다는 것을. 천사가 감싸주는 학교의 모습은 바로 웅덩이 속 상상의 학교와 같을 것이라는 걸. 청아한 소녀와 놀라운 아름다움 앞에 입이 벌어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뭐... 뭐야?"      


라고 말한 나는      


뭐야? 라며 자책했다.      


하지만 자비로운 소녀는 여전히 웃으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너, 재미있어서."

      

그날, 내리는 빗속에서 소녀와 나는 만났고 한참을 마주 보았다. 정류장 벤치에 기대 둔 소녀의 우산은 영롱한 무지개 색이었다.        




-스물 둘


비가 내린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쏟아지는 물줄기. 덕분에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낡아 버린 인문대의 현관 앞을 서성인다. 용기 있는 몇 명이 가방으로 머리를 가린 채 뛰어나가고 한껏 멋을 낸 새내기 여학생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혹은 친구에게 전화를 해 우산을 부탁하거나 가볍게 콜택시를 부르거나, 어찌 되었든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비를 헤쳐나가려 애쓴다.

 

그 와중에 천성이 양반인 인우만이 그저 태평하다.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며 현관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으로 받아낸다. 또옥. 또오옥. 가지런한 두 손바닥 위로 작은 물방울 호수가 고인다. 인우는 호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고인물이 새어나갈 뿐 그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용기 있는 누군가가 가방을 우산 삼아 뛰며 인우의 앞을 스쳐간다. 그 누군가는 바닥에 고인 작은 웅덩이를 힘차게 밟으며 쪼그린 인우의 전신에 콘크리트 빛 물방울을 흩뿌린다. 덕분에 인우의 새하얀 폴로셔츠엔 신사임당의 솜씨인 듯 동그란 포도송이가 알알이 맺힌다. 하지만 인우에게 중요한 건 지금 피우던 담배가 젖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슬픈 것은 손에 들린 젖은 가치가 돛대였다는 것. 인우는 슬픔으로 쪼그린 채 굳어버렸다.


다리가 저려 온다. 마지막 한 가치를 애도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며 그는 코에 침을 바른다. 서서히 굳은 다리를 펴며 일어서는 인우는 웅덩이를 본다. 


웅덩이.


검푸른 아스팔트를 담은 탁한 빗물의 호수. 표면 위엔 잿빛의 하늘이 구분선 없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감정 없는 회색 물빛 위로 단발머리의 소녀가 떠오른다. 소녀의 그림자는 점점 구체적이 되며 이윽고 웅덩이를 덮어 버린다. 목에 걸린 카메라를 인우를 향해 들이댄다. 소녀의 그림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인우를 향해 웃어 보인다. 그림자가 분명 


‘웃어 보인다.’


인우는 순간 표정이 굳는 것을 느낀다. 어떤 기억의 편린이 안면을 강타한다. 일어서던 중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굳어버린다.


“오빠! 뭐야, 이런 웃긴 자세로. 행위예술이라도 하는 거야?”


약올리며 인우의 어깨를 건드린 손은 현지였다.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댄 채 승마자세로 굳어있던 인우가 비로소 직립보행 준비동작으로 돌아오며 현지를 응시한다. 다소 재미있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을 껌벅대는 현지를 인우는 불쾌하게 쳐다본다. 


“너, 머리 잘랐냐?”


“정말 뭐야, 선배. 언제 잘랐는데 그래.”


“아, 그랬구나.”


아, 그랬구나... 현지가 단발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오래전부터 단발이었어. 난 현지를 계속 봐왔잖아. 그래, 그랬잖아… 그런데 왜 새삼스레 그 아이가…아냐, 그럴 리가. 그래도 분명 그건,


‘웃어 보였어.’



-열여섯


소녀는 웃어 보였다. 작고 하얀 그 얼굴은 항상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의 미소를 보는 게 좋았다. 정류장에서의 그날 이후 내겐 소녀의 웃음이 무지개 세상이었다. 소녀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언젠가 나는 우리가 알게 된지 한 달이 넘었음에도 서로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소녀를 무지개라 불렀고 소녀는 나를 이상해씨라 불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어느 날, 그래서 나는 이름을 물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이름? 그런 게 궁금해?”


“진작 묻는다는 걸 깜박했어.”


“그럼 그냥 지금까지처럼 불러. 무지개라, 듣기 좋던걸 뭐.”


“그래도 이름을 알아야지. 내가 먼저 말할게 너도 알려줘야 해. 나는 인우라고 해. 서인우.”


“인우? 강아지? ( いぬ 이누 : 일본어로 개를 뜻함) 어머, 귀여워라. 그럼 지금부터 너를 바둑이로 부르겠어.”


“무슨 소리야? 내가 개라는 거야?”


“아니야. 설마... 아, 근데... 손!”


“겁나게 재미없어든. 어쨌든, 이제 네 이름을 알려줘.”


“그게 그렇게 궁금해?”


“당연하잖아. 이름도 모르는 친구가 어디있어?”


“좋아, 그렇게 알고 싶다면. 잘 들어 내 이름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저 단순한 이름 하나를 알려주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긴장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내 심장은 두 방망이질 쳤고 소녀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듯 흥분했다.


“내 이름은……지개야, 무지개.”


뜸 들이던 소녀는 그렇게 말하곤 바뀌어버린 신호에 맞추어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너갔다. 나는 왠지 서운했고 그래서 소녀의 뒤에서 더 말도 안 되는 농을 건네버렸다.


“지게면 나무하러 가는 거냐?”


“재미없어, 바둑아!”




-스물 둘


몇 시나 되었을까? 늦은 오후 잠에서 깨어난 인우는 머리를 긁적인다. 수업은 이미 끝났겠지? 침대에 앉아 손가락으로 출석일수를 계산해 본 뒤 다시 머리를 긁적인다. 이번엔 좀 더 세게. 또 계절학기인가…… 침대에서 일어난 인우는 사이다 병에 담긴 물을 마시며 방 안을 훑어본다.


‘청소 좀 해야겠군.’


비는 아직 내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검은색 삼선 슬리퍼를 끌고 인우는 집을 나선다. 푸르른 학교와 아담한 자취방, 그 사이를 이어주는 술집들의 통로. 이제 그는 살고 있었다. 10대의 방황이 꿈꾸던 무지개 세상 속을. 아름답고 찬란해 보이던 자유의 한복판을. 그리고 알게 되었다. 무지개와 회색은 같은 색이라는 걸. 어디에도 그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없다는 것을. 어른들의 통제에 온 힘으로 반항하던 그때가 차라리 자유롭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때는 꿈꾸는 레지스탕스였지만 지금은 한계를 알아버린 유리병 속 벼룩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니. 아니, 오히려 더 아이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말잘 듣고 순종적인 어른아이. 다만, 담배와 술이 허락된 덩치 크고 수염 난 아기.


술집에는 이미 친구들이 모여 있다. 술로 허기를 달래는 아기들의 놀이방엔 거짓된 자유, 포장된 젊음이 뜨겁게 들어찼다. 인우는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연예인, UCC, 게임, 드라마, 영화, 축구, 다른 친구들, 여자, 남자, 연애, 용돈, 부모님, 학점, 미래, 꿈, 취직, 다음의 술자리, 그전의 술자리, 교수님, 조교, 필리버스터, 알파고, 시위, 폭행, 공천, 만화, 새로 나온 술, 근처 소문난 맛 집, 물 침대가 있는 모텔, 카드 값, 아르바이트, 삼각관계, 짝사랑, 지난 추억, 안주, 음악, 등록금, 패션, 자동차, 시계, 잡지, 챔피언스리그. 


커다란 아기들의 입은 이런 주제들을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젖병 대신 술병을 물고 딸랑이 대신 담배를 쥔 아기들은 새벽이 지나고 다시 해가 떠오르도록 옹알거린다. 구토를 하고 비틀대고 내일의 수업을 빠질지라도 오늘의 술잔은 멈출 줄을 모른다. 절제되지 못한 젊음에게 자유란 곧 위장병과 장염을 의미했다.


여전히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인우도 물론 무척이나 마셨던 것 같다. 여명이 밝아오고 어깨에 짊어진 삶으로 허리가 굽은 청소부 아저씨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각, 그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구토를 쏟아낸다. 애꿎은 전봇대는 미동 없이 인우 안의 더러움을 받아낸다. 한참을 쏟아 내고 내장까지 뱉어버릴 지경에 이르자 인우는 마른기침으로 목구멍을 달랜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다. 내리는 비를 입안 가득 받아들이고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낸다. 우산도 없이 아침부터 젖어버린 인우는 왠지 이대로 녹아내리고 싶다. 산성비의 농도가 한참 더 짙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대로 녹아 빗물과 함께 저 앞의 웅덩이로 고여들고 싶다.


저 앞의 웅덩이. 그 아이를 처음 보았던 그런. 아냐, 달라. 이제는 어디에도 그처럼 깨끗한 웅덩이는 없다. 비 오는 날의 웅덩이란 온통 흙탕물투성이일 뿐. 그 아이의 청아함과 닮아있지 않다. 그리고 지금, 인우는 더러운 흙탕 위로 떠오르는 소녀를 보고 싶지 않다.


폐쇄된 미소의 소녀를, 더러운 물처럼 구질 대는 눈물의 소녀를......



-열여덟


나는 왜 그렇게 믿었을까? 소녀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고,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순백의 천사라고. 왜 그렇게 믿었을까?


소녀와 나는 비가 올 때면 줄곧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소녀의 로모는 비 오는 날을 위한 준비였다. 맑은 날 소녀의 가방 속 인화한 사진들과 함께 잠들어 있던 카메라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무척이나 분주해졌다. 소녀는 말했다.


"비 오는 풍경이 좋아. 비 내리는 순간만큼은 세상이 깨끗해지잖아."


그리곤 역시나 환하게 웃어주는 소녀. 나는 왜 몰랐을까? 소녀의 웃음에 배어있던 서럼을. 어딘가 폐쇄적인 웃음을, 일곱 색깔 무지개를 물들이던 옅은 회색 띠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소녀를 알면 알수록 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해주지 않았다. 바보 같은 나는 또한 소녀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만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우리가 마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사실 나의 관심은 온통 내게 쏠려 있는지도 몰랐다. 대한민국 고등학생 중 나만이 힘들었고 나만이 방황하고 나만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내 미니 홈피는 온통 죽는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내게 소녀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내가 위로받고 내가 편안할 수 있는 나만의 위문품. 소녀의 마음, 소녀의 사정, 소녀의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않은 채 나는 나를 위해 소녀를 만났다.


그래서였을까? 가끔 난 소녀를 만지고 있어도 어쩐지 허공을 짚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잡은 손은 마임 하듯 공허했다. 애인이 전지현보다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라고 어떤 광고에서는 말했지만, 만지더라도 잡히지 않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 자리에 있고 변하지 않는 미소로 나를 반겨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변하지 않는 미소가 질려갔다. 단지, 질려갔을 뿐. 소녀에 대한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나는 왜 몰랐을까? 정말이지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처음의 두근거림, 풋풋함, 소녀를 향한 눈부신 콩깍지도 사라져갈 무렵 자연스레 우리는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하루를 보지 않아도 불안하던 마음은 이 주일을 만나지 않아도 덤덤했다. 나의 태도는 눈에 띄게 퉁명스러웠고 소녀와 나는 연락도 없이 한 달간을 지나 보냈다. 그런 시간 중 먼저 소녀를 궁금해한 것은 내 쪽이었다. 아마도 부모님과 크게 다투고 세상에 나만이 남겨진 기분으로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을 때 인 듯 싶다. 


그때도 나는 나의 외로움으로, 그저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소녀를 찾았다. 소녀의 미소를 보면 무언가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녀를 생각하는 마음 없이 나의 필요에 의해 다시 소녀를 떠올렸다.


하지만 소녀는 닿지 않았다. 전화기는 꺼져 있고 나는 소녀의 집을 몰랐다. 그래, 나는 소녀의 집도 몰랐다. 집뿐 아니라 소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먹으며 어떤 아이돌에 열광하는지도 몰랐다. 실상 나는 소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 무작정 소녀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냥 소녀를 기다렸다. 소녀는 종일 보이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부모님과 악을 쓰고 방문을 부서져라 닫아버리고 밤새도록 울었다. 


아침이 되자 책가방을 싸 들고 정류장으로 갔다. 소녀를 만나지 못해도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삼 일을 보내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정류장으로 등교했다. 정류장 벤치에서 나는 슬픔의 끝을 맛보았다. 소녀를 만나지 못해 슬펐고 또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슬펐다. 일주일을 학교에 가지 않았건만 선생님도 친구도 나를 찾는 이는 없었다. 정류장 벤치에 앉은 채로 화석이 되고 일만 년이 지나도 중학교 사회교과서에조차 단 한 줄 나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됐다. 나는 존재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비가 내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비라도 내린다면 세상이 깨끗해져 누군가는 나를 찾지 않을까? 아니, 적어도 소녀만은, 나의 무지개만은 다시 이곳에 나타나 웅덩이 가득 자신을 비추며 나를 꼭 안아주지 않을까?


하지만 불행히도 날은 너무 맑았다. 나는 몰랐다. 적어도 그 날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건조했고 햇볕은 당당하며 구름은 숨 죽었으니.

 

그런데 그날,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날씨 속에서 소녀는 다시 나타났다. 나를 다시금 놀라게 하며 소녀는 웃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알아챘다. 소녀의 웃음에 드리운 그림자를. 미소 속에 감춘 서글픔을... 소녀답지 않은 복장과 화장과 그리고 결코 소녀답지 않은 상대와 함께 걷는 모습에서 나는 알아버렸다. 


바보같이 그제야 알게 되었다.




-스물둘


오후 늦게 현지가 찾아왔다. 한 손 가득 식거리를 싸든 채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현관 앞에 서 있다. 뻔히 방 안에 틀어박힌 인우는 문을 열지 않는다. 그는 현지가 보고 싶지 않다. 애써 웃어 보일 현지의 얼굴과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오늘이라면 도저히 현지를 보고 견뎌낼 자신이 없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인우를 부르는 현지와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 구석에 웅크린 인우 사이에 협상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쓸쓸히 돌아서는 건 현지다. 현관 앞에는 훼미리마트 봉지 속 가득한 라면과 전복죽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며칠째 비를 맞는 세상도 왠지 움츠려 보인다. 


인우는 잠들지 못한다. 요즘 들어 자꾸 그 아이가 머릿속을 맴돈다. 현지가 머리를 자르고 난 뒤부터 그 아이가 겹쳐 보인다. 아니, 현지는 원래 단발이었지. 대체 어디로 이유를 돌려야 할까? 비? 비가 오면 으레 그 아이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언제나 잠깐이었다. 이토록 지독하게 머무는 상념은 없었다. 그 아이의 혼이라도 찾아온 걸까? 이제 와서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렇다면 나는 무슨 얼굴로 그 아이를 대해야 할까? 아니, 마주 설 자격이나 있을까?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인우의 신경은 쓸데없는 망상만을 늘려 갈 뿐이다. 결국 인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밖으로 나가 걷고 싶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눅눅해진 몸에 바람을 쏘이면 조금 괜찮아지리라. 혹은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 확인해 보면 되잖은가. 아직도 내게 붙어있는 그 아이의 기억. 빗물과 함께 짙어질런지 아니면 훌훌 털고 아무렇지 않을는지. 어찌 되었든 걷자. 걷다 보면 답이 있겠지.


인우는 우산을 챙겨 현관을 나선다. 현관 앞에 웅크리고 있던 라면과 전복죽이 갑작스레 열린 문에 놀라 부스럭댄다. 발 밑에 놓은 현지의 흔적을 보고 인우는 우는듯한 미소를 짓는다.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좋다. 집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었을 뿐 막상 바람을 쏘이니 기분이 풀리는 듯하다. 바짓단이 젖고 어깨 양쪽이 조금 축축해져도 상관없다. 비는 청량하고 세상은 깨끗하며 의식은 환기된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다. 잦은 술자리가 만든 편두통과 그에 동반된 과대망상이었을 뿐. 자신은 이리도 건장하고 활기차지 않던가. 지금이라면 현지의 얼굴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인우의 맘을 아는지 현지는 거리를 두고 인우를 뒤따른다. 눈치 빠른 인우는 이미 현지의 발걸음을 알아챘다. 다만 조금 장난기가 발동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 거리를 걷고 있다. 앞서 걷던 인우는 갑자기 휘청대며 우산을 놓친다. 마치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비틀댄다. 놀란 현지가 달려와 인우를 부축한다. 현지에 팔에 감긴 인우는 왁 하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선다. 얄궂게 배시시 웃는 인우를 토끼 눈이 된 현지가 원망하듯 바라본다.


"뭐야 오빠!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밑에서 계속 기다린 거야?"


"......"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기다려."


"그럼 어떡해. 꼭 죽을 사람처럼 틀어박혔는데......"


인우는 현지의 손을 꼭 잡는다. 두 개쯤 살이 나간 인우의 검은 우산을 내버리고 두 사람은 현지의 무지개 빛 우산 속에서 나란히 걷는다. 한쪽 어깨가 흠뻑 젖도록 인우는 우산 속에 온전히 현지를 들여놓는다. 아주 가볍게, 고여있는 웅덩이를 밟으며 네 개의 발이 나란히 나아간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공기는 차갑지만 어쩐지

두 사람은 보송보송한 솜이불을 걷는 듯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십팔세


'더러워. '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더럽다고 생각한 걸까? 이제 와서 진심이 아니었다 말한들 무엇이 달라지랴. 분명그때 나는 '더러워'라고 스무 번쯤 지껄였다.

 

소녀를 다시 만났을 때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는 소녀다운 옷차림이 아니었다. 줄이지 않은 치마와 흩날리는 단발의 청순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짙게 화장 했다. 속옷이 다 보일 듯 위태로운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끈으로 된 민소매 속 소녀의 젖가슴이 출렁였다. 그 여린 살결이 갈라지는 곳을 곁에 선 중년의 남자가 힐끗 댔다. 중년의 남자는 웃고 있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부른 배를 앞세우며 소녀를 이끌었다. 소녀 역시 웃고 있었다. 분명 울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아챘다. 소녀의 미소가 슬프다는 걸. 소녀의 미소는 아프다는 걸. 


소녀도 나를 보았다. 분명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소녀는 못 본 척 지나쳤다. 우리의 눈이 마주친 그때, 소녀는 웃어주지 않았다. 나는 소녀를 쫓았다. 가로등이 눈을 뜨고 퇴근시간의 자동차 불빛이 노을처럼 번지던 그날 저녁 나는 소녀를 뒤따랐다.


모퉁이를 두 번 돌고 직선으로 삼백 걸음쯤 걸어 소녀와 중년의 남자는 세워둔 자동차에 올랐다. 달빛을 받아 위용 있게 번쩍이는 은색 렉서스까지 걷는 동안 남자의 손은 쉴 새 없이 소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오갔다. 렉서스는 부드럽게 골목을 돌아 거리를 향해 나아갔고 자동차가 빠져버린 주차장엔 밤새도록 나의 몸뚱이가 들어섰다. 나는 타이어에 구멍 난 자동차처럼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망연히 그 자리에 정차했다. 


그날, 밤새도록 비는 오지 않았다.


며칠 후,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소녀는 다시 소녀답게 돌아왔다. 교복은 어울렸고 미소도 여유로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미소에서 평안을 찾지 못했다. 소녀가 웃으면 나는 울 것만 같았다.


조금 어색했다. 실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 우리가 왜 서먹한지는 서로 너무 잘 알았다. 그러나 일부러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는 다시 내렸다. 바야흐로 장마였다. 나는 우산이 없었고 소녀도 우산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던 무지개 색 우산을 소녀는 가져오지 않았다. 말은 목구멍에서 멈추었다. 입 밖으로 나올 말은 채 소리로 변해 귓가에 닿기도 전에 목구멍에서 바스러졌다. 정류장 벤치에는 빗소리와 헛기침 소리만이 의미 없이 맴돌았다.


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슬퍼졌다. 소녀는 힘껏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한층 슬퍼졌다.

 

소녀는 웃음과 울음을 머금고 내게 가까이 앉았다. 소녀가 바짝 다가오자 나는 조금 물러섰다. 나는 소녀를 꼭 안고 싶었는데, 어린 가슴 한 가득 소녀를 품고 찰랑이는 단발머리에 입 맞추고 싶었는데, 물러서 앉았다.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가 한번 더 다가오자 나는 다시 물러 앉았다. 좁은 정류장 벤치에서 우리는 세 번쯤 다가가고 물러서고를 반복했다. 나는 어느새 벤치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벤치 위에서 결국 나는 울어버렸다. 한쪽 엉덩이만을 벤치의 끝에 걸친 채 울어 버렸다. 소녀는 아직 웃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소녀도 함께 울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쳐버린 여린 손이 나를 위한 용기로 어깨를 짚었을 때 나는 말해버렸다.


'더러워.'


라고.


'더러워.'


라고.


'더러워.'


라고.


'더러워.'


라고.


'더러워.'


라고 스무 번쯤 되뇌었다. 


그제야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넘치고 터져서 기어이 범람했다. 비는 더욱 거세져 정류장 안쪽까지 튀어 들었다. 튀는 빗물에 소녀의 신발이 흠뻑 젖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머리부터 잠겨갔다. 장마가 시작된 여름의 한 복판, 작은 정류장 벤치에서 소녀는 잠겨갔고 나는 고개 숙인 채 더러워 만을 되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울고 있는 소녀는 어째서인지 후련해 보였다.



-스물둘


현지는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뜯는다. 무지개색 우산은 흙탕물 위로 나뒹굴고 현지는 빗물에 흠뻑 젖어 어쩔 줄 모른다. 마주 잡았던 작은 손은 처량하게 허공을 부여잡는다. 현지는 무서움과 안타까움과 추위와 고통과 눈물과 나약함과 슬픔과 어쩔 수 없음을 느끼며 온몸으로 내리는 비를 받아낸다.


인우는 이미 흙덩이가 되어 나뒹군다. 손톱은 부러지고 셔츠는 뜯어지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흙덩이로 나뒹군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란 웅덩이는 모두 옮겨 다니며 더럽게 고인 물에 키스하고 대답하지 않는 작은 호수에 말을 걸고 다시 부둥켜안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어떤 웅덩이를 부둥켜안고 있으면 다른 웅덩이가 그를 부르고 앞쪽으로 앞쪽으로 점점 나아가며 인우는 웅덩이를 쫓아간다. 인우는 지금 보고 있다. 아스팔트와 모래를 담은 웅덩이 속 사진 찍는 소녀를.


소녀가 담긴 물은 기어이 깨끗했고 언제나처럼 미소로 환하게 손짓했다. 비에 젖어 더욱 청초한 단발머리. 소녀는 검은 로모 카메라를 인우에게 들이댄다. 그런 소녀를 잡으려 웅덩이로 뛰어드는 순간 셔터 소리와 함께 소녀는 다른 웅덩이로 옮겨간다. 웅덩이에서 웅덩이로 아스팔트에서 모래밭으로 뚝방에서 개울로 다리에서 도랑으로 그리고 소녀에게서 소녀로, 인우도 따라 옮겨간다.


소녀가 멀어질수록 그리고 소녀를 잡으려 할수록 인우는 다쳐갔다. 아스팔트 덮힌 거리를 움켜잡는 두 손은 뭉그러지고 울퉁불퉁한 자갈밭에 엎드린 무릎은 깨져버렸다. 현지는 말릴 수가 없다. 인우를 잡아 세우려 다가가다 내팽개쳐지고 다시 달려가다 넘어지고 울며 매달리다 던져지고. 현지도 인우도 점점 다쳐갔다. 현지는 힘이 빠져 주저앉아 버려진 아이처럼 엉엉 운다. 그러나 누구도 커다란 아기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은 동그란 울타리를 만들고 수군대며 지켜본다. 구경꾼들이 만든 울타리 속에서 현지는 주저앉고 인우는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웅덩이를 옮겨 다닌다. 


폴짝폴짝.


까불태기 같은 아이들이 이리저리 던지고 놀아 찢겨 부서져 터져버린 개구리. 내장을 배 밖으로 꺼내고 심장을 엉덩이에 단 채 그래도 폴짝대는.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집혀 아이들의 나무 방망이에 홈런을 맞을 때까지, 그래도 폴짝폴짝. 폴짝폴짝 폴짝폴짝. 인우는 쉬지 않고 웅덩이를 사랑하려 웅덩이를 바라보려 마주 잡으려 


사죄하려 뛰어다닌다. 


소녀는 짓궂게 웃으며 셔터만을 누르고 있다. 소녀가 인우를 부르고 인우는 소녀를 찾으며 잡히지 않을 것과 잡으려 하는 것이 끊임없이 부르고 멀어진다. 그러다 소녀가 멈추어 선다. 소녀는 훤히 트인 도로 위에 가지런하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환한 웃음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소녀의 웃음은 인우가 그토록 보고파했던 그늘없는 웃음의 원형, 그 자체였다. 인우 역시 웃어 보인다. 티 없는 웃음으로 기어코 마주 바라본 두 아기는 마침내 부둥켜안고 마음껏 웃는다.


마음껏 울어 본다.




-십팔세, 끼이익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일이 사고(事故)였는지 혹은 사고(思考)였는지. 


트럭은 달려왔고 소녀는 서있었다. 나는 더러워 라고 되뇄다. 몰랐다. 무엇이 떨어졌는지, 무엇이 굴러갔는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소녀의 카메라가 떨어졌고 그것이 '굴러갔다' 고 나는 나중에 들었다. 정확히는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만을 들은 것이지만. 도대체 네모진 카메라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나는 전에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카메라는 굴러 굴러 정류장 앞까지 떨어다고 하니, 소녀는 그것을 줍기 위해 도로로 걸어갔을게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고 소녀를 확인했다. 나는 보았다. 무언가를 줍기 위해 굽은 소녀의 허리를. 굽혀진 상체가 도로 바깥쪽으로부터 정류장을 향해 있었던 것을.

 

카메라가 굴러간게 맞다면, 그래서 단지 주우러 나간거라면, 내게 보여야 했던 건 소녀의 엉덩이었어야 했다. 그때, 나를 보고 있던 건 소녀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트럭은 달려오고 소녀는 서 있었다. 이미 물건은 손아귀에 집어졌고 소녀는 도로 바깥쪽에서 정류장을 향했다. 기어이 트럭은 달려오고, 끼이익, 멈춰 서고, 콰앙, 소녀는 누워 있었다. 나는 소녀의 엉덩이를 보아야 했지만 얼굴을 보았다. 이윽고 트럭의 몸체를 보았다.

 

내리는 비가 소녀를 깨끗이 씻어 주었다.


소녀의 장례식에는 두 명의 여자아이만이 방문했다. 자매라고 했지만 자매가 아니라고도 말했다. 장례를 치르며 알게 된몇 가지는 소녀가 입고 다니던 교복의 학교에는 소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소녀는 지방의 한 고아원에서 입양되었다는 것.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와 같은 또래 소녀를 스무 명쯤 데리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스물둘


소녀와 인우는 입을 맞춘다. 인우의 얼굴은 웅덩이에 파묻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이차선 도로 위 고인 물에서 인우는 소녀를 만났고 부둥켜안았다. '더러워.'라고 되뇌지 않았다. 대신


'그리워.'


라고.


'그리워'


라고.


'그리워'


라고 이백 번쯤 되뇐다.


이번에는 소녀를 안아 주었다. 한 가득 소녀를 품고 찰랑이는 단발머리에 입 맞춘다. 도로 바깥쪽에서 정류장 쪽을 향한 소녀의 손을 잡아 끌어낸다. 비 내리지 않는 곳에 소녀와 단 둘이 쓰다듬고 싶다. 젖은 머리를 말리며 보듬고 싶다. 하지만 소녀는 웅덩이 밖으로 끌어지지 않는다. 인우의 손톱만 무너져 갈 뿐 소녀는 웅덩이에 여전히 갇혀있다. 


버스는 달려오고 인우는 도로에 있다. 


소녀는 꺼내지지 않고, 정류장에서 도로 쪽을 향해 인우는 서 있다. 버스는 달려오고 두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곧 두 발은 하늘을 난다.


소녀는 웅덩이 속으로 깊이 잠겨가고 인우는 땅 위에서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른다. 부둥켜안았던 두 영혼은 멀어지고 놓지 않으려던 손이 미끄러진다. 꺼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두 알 것 같았지만, 인우는 허공을 날고 있다.


힘들게 쫓아 인우를 따라온 현지는 누워있는 그를 본다. 내리는 비가 깨끗이 인우를 씻겨준다. 오열하는 현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우는 그저 편안히 누워있을 뿐이다. 깨져버려 형체가 불분명한 얼굴이지만 옅은 웃음이 찢어진 입술 위로 떠오른다.


 


-십팔세


장례를 치르며 알게 된 몇 가지는 소녀가 입고 다니던 교복의 학교에는 소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소녀는 지방의 한 고아원에서 입양되었다는 것,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와 같은 또래 소녀를 스무 명쯤 데리고 있다는 것, 소녀의 본명은 현지라는 것,

소녀의 본명은 현지라는 것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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