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유병률 배소진 이재원 공준서 기자, 편집=김은혜 기자, 사진=이동훈 기자][편집자주] [新대한민국 리포트]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바로 알고, 문제점도 파내고, 새로운 대안도 제시하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소개하고자 한다.
[[新대한민국 리포트] < 4 > 창신동의 두 예술가 이야기]
4대문에서 가까운 서울시내 한 가운데 아직도 집과 일터 구분도 없는 다세대주택이 쭉 늘어선 곳이 있다. 반 지하 작은 봉제공장 980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창신동. 문을 열면 옷감 잔뜩 실은 오토바이가 휙휙 지나간다. 봉제공장이라고 하지만 간판도 없다. 주로 하청 받아 하는 일이라도 보니, 일이 없으면 임대한 기계를 빼야 하기 때문이다.
반 지하 다세대주택이 쭉 늘어선 서울 창신동 골목. 문을 열면 옷감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가 휙휙 지나간다.
동남아 등 해외생산이 늘면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창신동. 하지만 이곳에 변화의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다.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이태원 경리단처럼 카페와 예쁜 가게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있는 그런 변화가 아니다. 허름한 이발소, 코딱지만 한 동네슈퍼. 창신동 골목은 여전히 볼품이 없다. 시차원의 환경정비 사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흔한 벽화도 없다.
오히려 변화는 밖이 아니라 안이다. 수십 년간 하청생산에만 익숙했던 주민들이 '메이드인 창신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직 종류와 양은 얼마 안 되지만, 자신들이 기획하고 자기 브랜드를 내건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곳 봉제사들의 연령대는 주로 40~50대. 젊은 층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들은 '하청인생'이던 자신의 삶과 동네를 바꾸고 싶은 의지를 갖기 시작했다. 이런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은 3년 전 창신동에 터를 잡은 두 명의 미대 졸업생들이다.
홍성재(왼쪽), 신윤예씨. 창신동에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이 벌써 3년이 됐다.
예술은 벽에 거는 것이 아니다
각각 홍대와 경희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홍성재(33), 신윤예(30)씨. 이들이 창신동으로 온 이유는 자신들의 재능과 창신동의 봉제가 만나면 뭔가 재미있는 것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봉제'를 '패션'으로 만드는 재미.
이들도 다른 미대생들처럼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졸업 후 삶은 비정규 아르바이트의 연속. 작품을 하려면 파트타임 일이라도 해야 했고, 파트타임을 하다 보니 수입이 적어 더 많은 파트타임을 해야 했다. 차라리 주민들과 동네를 변화시키는 재미가 진짜 예술이 아니겠냐는 생각이었다.
첫 1년은 한 대기업의 사회공헌프로그램 운영자로 선정되어 그 지원을 받아 창신동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학교를 마치면 갈 곳 없는 아이들, 집이라고 들어 가봐야 재봉틀 소리와 천 먼지만 자욱했다. 아이들은 '미술선생님이 오셨다'고 좋아하며, 지역아동센터에 북적북적 모여 들었다.
냉장고 박스 하나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이를 연결해 '공동주택'을 만든 창신동 아이들. /사진제공: 000간
그래서 두 사람이 이 아이들을 위해 기획한 것이 '나홀로 동굴' 프로그램.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커다란 냉장고 박스를 나눠주고, 있고 싶은 만큼 있으라고 한 게 전부였다. 처음에는 박스를 꼭꼭 걸어 잠그던 아이들이 곧 자기 박스에 친구를 초대하고, 박스를 연결해 공동주택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버려진 박스로 공동체를 만들었다.
남은 자투리천으로 탄생한 창신동브랜드
그러다 이들은 아예 창신동에 '000간'(공공공간)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무실을 차렸다. 아이들뿐 아니라 전체 동네를 상대로 프로그램을 진행해보자는 것. 신씨는 "여기 어머니들은 아파도 참고 있다가 비수기 때 몰아서 병원에 가는데, 좀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같이 시도해 봤으면 싶었다"고 말했다.
일단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골목골목 쓰레기봉투에 넣어져 쌓여있던 자투리 천이었다. 창신동에는 하루 평균 22톤, 연간 8000톤의 자투리 천이 나온다. 쓰레기 문제도 해결하면서, 자투리 천을 이용해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
창신동에서 자체 제작해서 지난달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상품들. 왼쪽부터'제로 웨이스트'셔츠, 자투리 천으로 만든 방석, 에코백, 브로치. /사진제공=000간
그래서 만든 것이 자투리 천을 이용한 방석이었다. 처음에는 쓰레기봉투를 다 수거해와 쓸 만한 자투리 천을 골라내는 일이 더 힘들었다. 하루 22톤의 자투리 천중에 막상 쓸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담배꽁초가 뒹구는 쓰레기 천 더미를 뒤지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자투리 천으로 만든 방석을 들고 일일이 봉제공장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쓸 수 있으니 재단할 때 남는 천을 따로 모아서 잘게 썰어 달라고 부탁했다. 봉제사들은 어차피 버리는 쓰레기라면서 흔쾌히 동의했고, 이들은 원가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주민들과 판매수익을 나누었다.
이후, 이들은 '재단할 때부터 자투리 천이 남지 않도록 옷을 만들면 좋겠다' 싶어 두 곳의 봉제공장 봉제사들과 머리를 맞댔다. 두 사람이 직접 디자인하고, 봉제사들은 시제품을 만들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로 웨이스트' 셔츠. '메이드 인 창신동'이라고 이름 붙여 지난달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판매수익을 나누는 방식이다. 홍씨는 "우리처럼 디자인할 수 있는 사람들과 직접 옷을 만드는 봉제사 주민들이 서로 연결돼 상품을 기획하고 제작해보자는 시도였다"고 덧붙였다.
창신동에서 만들어진 셔츠와 가방 등이 홍성재, 신윤예씨의 '000간'에 전시돼 판매되고 있다.
처음에는 '생전 처음 보는 젊은 친구들이 뭐 하려나' 멀뚱멀뚱 지켜보던 주민들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화분과 판자로 자신들의 사무실 옆 봉제공장 앞에 간판을 만들어 주기 시작하자 주민들이 하나둘 자기 것도 만들어 달라고 찾아오기도 했다. 수십 년째 그냥 살아왔던 동네를 가꾸고 싶다는 의욕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
또 그동안 하청생산만 하던 주민들이 '우리도 우리 제품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봉제공장에서는 자신들이 직접 디자인을 해서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신씨 등이 상표 디자인을 해주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판매를 대행해주고 있다. 구매자들을 통해 조금씩 입소문도 나고 있다.
원래 창신동 봉제공장들에는 간판이 없었다. 언제 기계를 빼야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신씨 등은 화분과 폐판자를 이용해 간판을 만들었다. 자리를 옮겨도 들고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스타벅스 들어온 유명골목에 원주민들은 설 곳이 없다
두 사람은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봉제사들이 몇 분이라도 더 나왔으면 한다. 이분들이 창신동의 롤 모델이 되고,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확산되면 창신동 전체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네를 바꾸는 것은 그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이 바뀌어져야 하는 것이지 외부인들이 와서 바꿔 놓을 수는 없다는 것. "외부인들이 '이렇게 바꾸세요' '저기처럼 바뀌어야 해요'라면서 강요하는 것은 주민들한테는 삶을 흔들어버리는 것, 가장 안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가로수길 같은 곳의 문제가 원주민들이 힘들어한다는 것이죠. 동네를 살려냈던 세입자들, 가게 주인들도 결국 나가야 하잖아요.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만 남잖아요. 그렇다면 누구 때문에 동네를 살리는 것인지…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동네만의 스토리를 재발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어떤 동네를 만들 것인지는 결국 그 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이 결정해야 할 몫이다. 그래야 동네를 바꾸고자하는 열정이 나오고 창의성도 나온다. 이제 출발에 불과하지만, 창신동은 갤러리 벽에 걸릴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예술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함께 잘 살아가는 길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