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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유비가 즉위한 것에 대한 의의.
게시물ID : history_256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른미르
추천 : 1
조회수 : 117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6/03/16 22:28:02

조비가 헌제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촉나라와 오나라에선 헌제간 시해당했다는 소문이 마치 진실처럼 퍼졌다. 사실 그도 그럴것이 위나라 내부에서조차 조식과 소칙의 사례로도 알 수 있듯이 헌제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수도 부근을 제외하고 퍼져있었다. 이는 헌제가 언제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않고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분위기라는 것을 방증한다.


이에 유비는 헌제를 위해 발상하고 민제라는 시호를 올리는 한편, 제갈량을 위시한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른다. 그러나 제위에 오르는 과정에 서 모두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비시가 국적이 살아있음을 내세워 비판하지만, 좌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실은 비시의 비판은 옳으나 당시 형세에 적합하진않고 그보다는 칭제가 적합했다.


1. 유비는 반조조의 기치를 세웠기때문에 헌제가 폐위된 시점에선 뒤를 이을 명분은 충분했다. 그랬기에 조조가 위왕이 되었을때 유비도 곧 한중왕이 된 것이다.


2. 유비는 유협집단 출신이었던고로 엘리트 사족들로부터 무시를 받는 경향도  있었으니 귀한 존재가 되어야했다.


3. 익주에선 조씨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기류도 상당했던터라 황제로 등극해 여론의 분열을 막고 국론의 통일을 요할 필요가 있었다.


4. 관리들의 승진과 백성들의 작위 문제도 있었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관리들의 특진과 백성들에 대한 사작이 행해졌다. 나라의 등급이 오르면 설치할 수 있는 관직이 늘어난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무원 공채의 정원을 늘리는거라 보면 된다. 

백성에 대한 사작이 있었는데 한 두 단계의 승진도 이루어졌다. 작위는 명예직이었지만 죄를 지었을때 그것으로 감해지기도하고 박탈도 당했으며 자식들에게 세습도 되고 사고 팔 수도 있었다.


5. 적국보다 관위가 낮다는건 사실상 적국을 섬긴다는 의미이다.

반조조를 표방한 유비로선 역시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춘추시대에 초나라는 왕을 자칭했지만 그를 공격하는 제후들은 초자라 불렀다. 당시 오등작제에서 초나라의 작위는 자작이었기때문이다. 

해당 사안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정도 이상의 명분이 있었으므로 즉위 자체는 합당했다. 그러나 모든게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선 촉한 건국 이념을 주창자인 유비와 제갈량이 무너뜨린 측면도 있었다.


1. 헌제에 대한 처우가 졸속적이었다. 

사실 유비는 한나라의 충신이라기보단 한나라의 명분을 잘 활용했던 효웅이었다. 어렸을때부터 황제를 꿈꿨던 유비였던데다 당시 유비의 나이가 많아 즉위에 서둘렀던 경향도 있다.


2. 관우와 형주 수복을 이유로 국적 위나라보다 오나라를 우선시하고 공격했다. 

물론 유비는 유협집단 신분일때의 수장이었던데다 당장 넘버3 장비도 건재했으므로 관우의 복수를 피하기란 쉽지않았다. 그러나 즉위할때의 이념을 스스로 어겼으므로 명분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3. 손권이 황제 즉위시에 제갈량이 이를 승인했다.

힘이 제일 약했던 촉한으로선 현실적으론 승인하는게 맞긴 하나 당시 황제가 3명이 되었으므로 촉한 백성들에게 굳이 유선만이 진정한 황제라고 하기에도 어렵게 되었다. 이로서 사실상 촉한의 대의명분은 파탄에 이르렀다.

출처 http://blog.naver.com/smh2829/220247766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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