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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신라의 설화를 쫒아서! : 박석김씨에 대한 기발한 반전~
게시물ID : history_118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랑랄라
추천 : 11
조회수 : 2661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3/10/04 14:03:57
본문은 강종훈저 '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 한국사연구총서"8,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에서 주된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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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원류는 누구일까요??
 
음.. 우선 신라의 건국설화를 살펴본다면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첫번째로 박혁거세 입니다. 혁거세 설화를 보면 그가 경주 일대에 천강했으며 地신의 후손인 알영과 결혼해서 6촌을 이끌고 신라를 건국했다고 합니다.
두번째로 석탈해 입니다. 남해차차웅의 시기에 대장장이 출신인 석탈해가 숯을 묻어 땅을 거짓으로 빼앗고 공주와 결혼한 뒤에 왕위를 계승했다고 합니다.
세번째로 김알지 입니다. 탈해이사금의 시기에 경주의 始林에서 알이 나타났고 이 알에서 알지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라초기에는 박석김씨가 번갈아가면서 왕위를 차지했다고 알고 있지요. 음... 그렇다면 신라의 원류는 누구일까요?
 
아니 질문을 바꿔볼께요. 박석김씨중에 원래 신라에 살고 있었던 이들은 누구지요??
 
아마... 다수의 분들은 이렇게 답하실 겁니다. "당연히 김씨 아니에요? 박혁거세와 결혼한 알영이 김씨 잖아요?" 
다수의 분들의 의견을 따르면 이런 상황이 추론이 가능합니다.
'원래 경주지역에는 김씨들이 모여서 6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박씨들이 등장했어요! 그리고 박씨와 김씨는 짝짝꿍해서 신라를 건국했습니다.~'
 
음.. 과연 진짜 일까요?
저는 지금부터 저조차도 생소한 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신라의 근간이었던 6촌사람들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속에 망각된체 실체를 찾기 어렵지요.
 
이 이야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박석김씨의 출자' 입니다.
동시에 이 이야기에서 진짜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아래의 질문입니다.
'설화 속에 이야기처럼 그들은 정말로 누구는 토착민이고 누구는 이주민으로써 결합했던 것일까요?' 
 
 
1. 문제의 시작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7년조를 보면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에 이르렀다. 사신을 보내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란 기사와 8년조에는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는 또 구양성을 공격하니 왕이 기병2천여명을 보내서 격퇴하였다."란 기사가 나옵니다.
 
탈해이사금 이면 3세기 중엽입니다.(물론 이 기년법은 기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에 대한 적절한 해석과 수정을 가한 기년으로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한 기년입니다. 이후에 시간이 되면 이 기년 문제에 대해서도 올려보겠습니다.)
우와... 3세기면 200년대 입니다. 고구려의 건국이 1세기 라는점을 감안하면 한성의 백제와 경주의 신라가 벌써 만나다니 놀랍기 그지 없네요? 조금더 정확히 보면 기록상의 낭자곡성은 지금의 청주지역이고 와산성을 보은지역입니다. 구양성은 위치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 근처겠지요?
음.. 백제 입장에서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긴 한데...;;; 신라는 엄청 멈니다..;;; 소백산맥지역을 다 차지하고 죽령을 넘어야 있는 위치에요..;
탈해 이사금이면 혁거세로부터 4대째 밖에 안됬는데..;;; 엄청나게 발전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죠.. 이미 말한바와 같이 신라가 이렇게 발전했다는 것은 역시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음.. 사실 여기에 빙과 '신경쓰여요' 짤을 넣을라고 했는데.. 사진이 안올려 지네요..;;;???)
 
자 여기서 우리는 이런 추론이 가능합니다.
 
첫번째 : 신라가 사실은 중국 대륙에 있었음, 그래서 지형상 백제랑 만날수 있었던 거라능~~
두번째 : 신라는 사실 대 환국의 발전된 기술을 계승한 나라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능~~
세번째 : 3성족단중 일부가 백제와 충돌했던 것이고 그 기억이 이후에 가탁이 되면서 신라의 역사화 된것이 아닐까?
 
예.. 첫번째와 두번째 추론은 무시하셔도 됩니다. ㅋㅋ
 
세번째 추론에 주목해 보죠. 신라의 3성인 박석김씨의 족단중 하나가 백제와 충돌했고 그들이 이후에 신라에 합류하면서 그 경험이 신라의 역사화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오호... 꽤나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박씨집단은 남하한 천강족으로 지신족인 김씨와 결합했다고 하니깐요.. 이 상식에 의하면 박씨가 백제와 충돌한 족단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자! 이렇게 문제 해결~!!!!
 
 
2. 박씨 집단의 출자
..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지요..ㅜㅜ
 
자 한번 박씨가 어디서 왔는지 봅시다.
사실 박씨의 출자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첫번째 : 북방의 선진지역으로 부터 남하했다.
두번째 : 상주지역에 있었던 세력이 박씨집단이다.
 
사실 첫번째 설은 좀 막연한 감이 있고 두번째 설은 꽤나 구체적입니다. 하지만 두 의견모두 박씨 족단을 경주의 토착세력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결국 박씨는 이주민 출신이라는 것이죠.
특히나 두번째 설에서는 상주를 지목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음운상의 유사성에 착안해서 '혁거세의 생장지 = 고허촌 = 솟벌 = 사벌 = 상주' 라는 논리와 '혁거세의 세력지 = 서라벌 = 사량벌 = 상주' 라는 논리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음운상의 연계성은 많은 면에서 취약한 법이죠. 음의 상통성을 따진다면 부여의 옛 명칭인 소부리도 서로 통할수 있는 걸요 ㅋㅋ
더구나 상주의 경우 삼국사기 석우노열전에는 "사량벌국은 옛부터 우리의 속국이었는데"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박씨 집단의 근거지가 상주였다면 상주는 신성시여겨지는 것이 당연지사, 그런데 속국으로 여겼다는 기록은 서로 모순되지요. 결국 박씨의 세력이 상주에 근거지를 두고 경주로 유입된 세력이라는 주장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이미 신라를 건국한 박씨가 탈해이사금 까지 상주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백제와 충돌을 야기했을 것으로 보는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박씨족단은 신라의 일부가 되었는바, 설사 상주에 박씨의 원류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신라와 동류로 보일 이유는 없습니다. 고구려의 경우를 봐도 주몽의 출신인 부여와 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보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결국 박씨 세력은 백제와 충돌한 세력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실제로 그들이 북쪽에서 온 선진세력인지도 확실하다고 말할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지요.
 
3. 석씨 족단의 출자
음.. 그렇다면 석씨는 어떨까요? 그들도 탈해의 설화를 보면 이주민세력인데... 더구나 대장장이라는 직종은 스키타이계의 유목계열에서 신성한 직업으로 추앙받는 직업입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석씨 집단이 진짜 북쪽에서 내려온 세력이 아닐까요?!
 
불행히도 아닙니다..ㅜ
 
석씨 집단에 관해서는 2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번째 : 한반도 중부로 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남하했다.
두번째 : 울산 감포 방변으로 경주로 유입되었다.
 
전자의 경우 북쪽입니다만..... 후자는 음...... 동쪽이랑 남쪽?! 입니다...
 
정반대네요..;; 하지만 전자의 경우 당시에 북쪽이 선진지역이었다는 정황적 근거일 뿐이고 후자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가락국기에는 탈해가 수로왕과 대립하였음을 전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탈해의 설화는 경주 동햐안의 아진포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덫붙여진 결과입니다. 조금더 근거가 명확하지요.
 
더욱이 전자의 주장은 탈해 이야기는 후대의 석씨왕실을 이어간 벌휴이사금이 각색해서 만들었다는데서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겁니다. 본래 벌휴이사금은 박씨의 후손으로 상주일대에서 후대에 이동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탈해를 본인들의 시조로 내세우며 석씨를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벌휴이사금이 박씨의 후손이었다면 박혁거세의 방계 내지는 그 후손임을 증명하면 될 일이지 굳이 후대의 기반이 빈약했던 석씨를 계승했다고 이야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탈해의 계보는 구추를 이어 벌휴로 계승됩니다. 실제로 두 왕간의 시간적 차이는 약 60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할때 굳이 거추장스럽게 중간 단계의 인물을 추가해야 했는가 하는 점도 의문점으로 남습니다.
 
고로 석씨 족단도 상주 혹은 북방에서 이주했다고 보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4. 김씨 족단의 출자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김씨 족단을 보지요...
 
아... 그런데.. 이들은 사실 따지기 좀 그렇습니다. 아시다 싶이 김씨 집단은 토착민세력이니깐요. 그러니 당연히 북방의 이주민이자 백제와 대립한 세력은 박씨나 석씨로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봐온바로는 둘다 아니랍니다..;;
 
그럼 도대체 누구야!!!!!!!!!
 
혹시나 싶으니 김씨 족단도 살펴 봅시다.
 
기존의 이해에 따르면 김씨 족단의 첫 등장은 혁거세의 아내인 알영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알영은 그 자신의 설화와 알지의 설화가 계룡이나 백계와 같이 닭과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알지와 닭토템을 가진 동일 김씨족단의 인물로 파악할수 있으며, 토착세력들이 으레 내세우는 지신족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씨 이전의 6촌민으로 이해 됩니다.
 
우선 알영와 알지의 연관관계는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천신족과 지신족의 이데올로기가 과연 이주민과 토착민간의 이야기로만 해석되어야 하는지는 조금 다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하나의 국읍과 여러개의 읍락들이 합쳐 일정한 소국이 형성되었을 경우나 소국과 소국이 연합한 경우 스스로를 천신의 후예라고 치장하는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인등을 통해 자신과 관계 맺는 세력을 천신에 대응하는 지신의 후예로 설정하는 일도 종종있는 일이었지요. 결국 천신이나 지신이나 하는 문제는 고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봐야지 단순히 이주민인가 토착민인가 하는것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경주의 6촌과 알영사이의 어떠한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설화의 내용, 그리고 김씨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알지 설화가 석씨보다 늦은 탈해이사금의 시기에 등장한다는 점은 김씨족단을 토착민이라고 여기는 것이 이상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럼 이번에는 알지를 살펴 보지요.
알지 신화에 따르면 그는 탈해 이사금의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김씨의 시조일까요?
이 문제와 관련에서 문무왕릉비의 비문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15대 조상인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령이 仙岳에서 나와 OO을 개창하여 옥란을 대하니 ... "
 
문무왕의 15대 조상인 '성한왕'이 시조랍니다. 음...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김씨의 시조인 '알지' 일까요?
 
우선 설화에 따르면 성한왕은 알지의 후손입니다. 재밌는 점은 삼국사기에 김씨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세한(=성한)-아도-수유-욱보-구도-미추를 이야기 하는데 알지의 탄생은 탈해 이사금 때라는 점입니다.
탈해이사금은 3세기 중엽의 왕이고 미추이사금은 4세기 후반의 왕입니다. 거진 100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데... 이 100년의 기간동안 6대를 집어 넣는다는 것은 뭔가 말이 안됩니다.;; 한사람당 20살씩만 쳐도.. 120년입니다... 탈해와 미추가 왕위에 오르는 시기가 100년 차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장하는 시기인 120년은 너무 깁니다..;; (왕위에 오르는 자가 20살의 어린 나이는 아니었겠지요) 
 
결국 알지설화는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15대조의 성한왕의 기록과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 뿐인가요? 삼국사기의 석씨 집단의 계보에 따르면 김씨의 6대가 활동했던 시기에 해당하는 석씨는 3대 뿐입니다..;;
 
그럼 알지가 성한은 아니라는 점을 알겠는데.. 알지는 도대체 뭐냐? 라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하나입니다.
"가탁"
예.. 가짜로 쓰여졌다는 것이죠.
 
 
뭔가 복잡하지요? 조금 정리해 보면.
 
1. 알영설화를 가지고 김씨가 토착민이라고 규정할수 없다.
2. 김씨 족단의 시조는 성한왕이다.
3. 알지 설화의 알지는 가탁이다.
 
 
이제 그럼 김씨 족단의 출신지를 찾아 봅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2가지 입니다.
첫번째 : 알지 설화가 탈해이사금 시기에 등장했다.
두번째 : 문무왕비문 등의 각종 비석에서 성한에 대해서 '왕'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세번째 : 소지마립간 시기에 奈乙에 신궁을 설치했다.(신궁은 시조가 처음 나신 곳이다.)
 
우선 첫번째, 알지 설화가 등장한 탈해 이사금 시기는 백제와의 충돌이 있었던 시기 입니다. 에.. 그러니깐.. 김씨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알지가 처음 등장한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충돌을 했다는 것이죠. 뭔가 낌세가 오죠? 다분히도 비약적이지만 만일 김씨가 백제와의 충돌지점에 있었던 세력이었다면 그들이 신라에 합류한 시기 부터 백제와 충돌을 했다는 것도, 그리고 김씨의 알지 설화가 탈해이사금의 시기에 등장하는 것도 설명이 됩니다.
 
두번째 , 성한을 왕으로 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시다 싶이 최초의 김씨왕은 미추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삼국사기의 명백한 기록이지요. 그런데 성한이 왕이라네요????;;;;;; 뭐... 이렇게 이야기 할수도 있습니다. '왕은 그들의 시조를 추켜세우기 위한 가탁이다!' 하지만 설화에서 시조는 알지고 성한은 알지의 후손입니다. 더욱이 알지는 시조임에도 대보의 직위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대 인물인 성한이 왕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요. 결국 성한은 경주의 신라와는 별개의 세력으로 봐야 합리적입니다.
 
이제 마지막인 세번째 문제를 봅시다. 소지마립간 시기에 시조의 출생지인 나(내)을에 신궁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시조는 혁거세는 분명히 아닙니다. 소지마립간은 김씨 족단이기 때문에 김씨의 시조인 성한을 이른다고 볼수 있습니다.(이런 김씨의 독자적인 계승의식은 사실상 부체제에서 나타나는 당연스러운 현상이며 당대의 기록인 '문무왕비문'이나 '진공대사비' '진철대사비' 등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한의 출생지인 나을의 위치를 파악한다면 김씨 족단의 출신지를 알수 있겠죠?
 
기존의 견해에 따르면 나을은 蘿井입니다. 이 나정은 경주안에 있으며 알영설화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 나정이지요. 이 견해에 따르면 奈와 蘿는 음이 통하는 음차이며 乙은 泉의 고유어가 '於乙' 즉 '얼'이기 때문에 천과 뜻이 통하는 井도 '얼'이라는 발음으로 단정하고는 乙=井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井의 고유어가 정말 '얼' 이었나 하는 점입니다. 위의 논리에 따르면 정과 천은 의미가 비슷하다고 하지만 분명히 정과 천은 구분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두 단어가 동일한 발음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더욱이 蘿의 경우 羅, 那, 奈, 乃 등의 쉬운 획을 두고서 굳이 어려운 蘿를 썻다는 점에서 이는 음차가 아닌 훈자로 볼수도 있기에, 蘿井과 奈乙이 동일하다고 규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더욱이 애초에 蘿井이란 혁거세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소지마립간이 시조로 여겨 신궁을 설치한 奈乙과는 분명 다른 지역입니다.
 
그럼 도대체 나을은 어디냐?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지요. "奈靈郡은 본래 捺已郡이다." 
오호.. 나령군이라..? 그리고 날이군이라? 여기서 나을군의 乙과 已의 유사성은 뭐... 조금 비약스럽지만 그렇다고 넘어가고. 乙과 靈의 관계에 주목해 보지요.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에는 상주의 속현으로 있는 안현현에 대해서 "본래 阿尸兮縣 인데 阿乙兮라고도 한다."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尸와 乙이 서로 음이 통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 무주 무령군조를 보면 "武靈郡은 본래 백제의 武尸伊郡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尸伊' 즉 '시'가 '靈'과 음이 통한다는 소리가 되지요. 자 이제 도식화 해보면 乙=尸=靈의 음차군이 형성됩니다.
요컨데 奈乙과 捺已 그리고 奈靈은 모두 같은 곳이라는 소리가 되지요. 그리고 나령군은 지금의 영주지역이기 때문에 나을군은 지금의 영주지역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우호! 그렇다면! 소지마립간이 신궁을 설치한 지역은 지금의 영주일대라고 볼수 있겠군요?!
이 주장은 소지마립간이 나을일대에 종종 행차를 했다는 점, 그리고 부석사가 설립된 지역이 영주라는점, 마지막으로 궁예가 부석사에 와서 신라왕의 벽화를 칼로 긁어 버렸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그 합리성을 가진다고 할수 있습니다.
 
영주는 지금의 죽령 이남지역으로 죽령을 넘어 보은까지도 넘볼수 있는 지역입니다. 결국 신라의 백제 충돌 기사는 신라 자체의 활동이 아닌 영주 일대의 김씨 세력의 활동으로 봐야 합리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 최종 정리해 볼까요?
 
1. 알영설화를 가지고 김씨가 토착민이라고 규정할수 없다.
2. 김씨 족단의 시조는 성한왕이다.
3. 알지 설화의 알지는 가탁이다.
4. 김씨 족단의 세력지는 영주일대로 이들은 탈해이사금의 시기에 신라에 유입되었다.
 
5. 결론~!   
드디어 결론입니다!!!
 
다시 맨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지요.
 
'설화 속에 이야기처럼 그들은 정말로 누구는 토착민이고 누구는 이주민으로써 결합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위의 질문에 대해서 신라 3성족단의 출자에 대해서 설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최종 정리를 해보지요.
 
1.신라의 원류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박씨집단은 이주민이 아니라 토착민으로 서라벌을 형성한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2. 김씨 집단은 토착민이 아니라 이주민세력이다. 이들은 확실한 이주민세력인 석씨보다 후대에 등장했다.
3. 김씨 집단의 세력은 경북 영주 일대이다. 그리고 이들이 신라에 합류한 시기를 전후해서 신라와 백제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우와~ 저 길었던 글이 단 3줄 요약이 되었습니다.~!!!!!
 
망할... 도대체.. 나는 저 3줄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쏫아 부은건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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