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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사람이 국회에서 암약하는 간첩?
게시물ID : sisa_118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핫돌이
추천 : 11/2
조회수 : 31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4/12/11 14:17:30
국회가 시끄럽다. 조용한 때가 없던 국회였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좀 심한 것 같다. 동료 의원을 면전에 두고 '간첩'이라고까지 했으니 그 말을 입에 올린 측이나 피해 당사자나 보기에 딱할 만큼 난감해져 버렸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는, 내가 아는 이철우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의 당사자인 이철우 의원은 지금 무서우리만큼 의연하고 냉정하다. 그런 그를 두고 동료 임채정 의원은 "어제부터 이철우 의원의 언행을 지켜보고 있는데, 의원이 아니라 삶을 시로써 사는 사람 같다.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철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임채정 의원의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철우 의원에 대해 말들이 많다. 그 숱한 말들은 상당히 표면적이어서 일반 사람들에겐 잘 다가오지 않는다. 인간적인 모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철우 의원은 두 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다. 그의 책 두 권을 모두 편집한 편집자로서 나는 그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책을 두고 할 수밖에 없고 바로 그것이 내 몫이리라 믿는다.

우선 전작 장편 동화 <백두산 호랑이>는 한마디로 부녀가 엮은 옥중서신이다. 이 의원이 이른바 14대 대선판 '북풍 사건'인 중부지역당 사건(지금 한나라당이 들이대고 있는 사건)에 연루돼 투옥된 것은 1992년 9월이었다. 그때 이 의원의 아버지는 아들의 두 번째 투옥에 충격을 받아 창졸간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인 그는 5일 동안 형집행정지로 나와 장례를 치른 뒤 감옥으로 돌아가야 했다. 
 
ⓒ2004 이대식 

당시 외동딸 일완이는 4살이었다.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아버지의 영정 사진과 어린 딸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그는 딸이 여섯 살이 되던 1994년부터 편지에 동화를 써서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딸의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동화책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모두 2백 통의 편지를 받았다. 

두 차례의 투옥기간 중에 그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2천통이 넘는다. 그렇게 해서 쓴 게 바로 <백두산 호랑이>다(학생운동 당시 인연을 맺었던 박시백 화백이 아무 대가 없이 그려준 본문 삽화도 정겹다). 그 아이가 자라 지금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더욱이 여학생이庸??남녀공학 학교의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당차게 자랐다.

두 번째 책은 에세이집 <한탄강에 서면 통일이 보인다>다. 옥에서 나와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치유하고 텃밭을 가꾸며 지역 운동을 하고 있던 그가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얼마 후, 주변에서 그간에 쓴 글이 있으니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시큰둥했다. 

그의 글솜씨며 해박한 지식, 혜안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지만 시기적으로 선거를 앞두고 내는 홍보책자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철우씨가 아닌 친구의 부탁에 속내를 감추고 그저 우선 검토를 해보겠다고 받아든 원고, 그것이 바로 <한탄강에 서면 통일이 보인다>다.

예의 정치 팸플릿 같을 줄 알고 펼쳐보았던 원고에서 나는 인간 이철우를 다시 만났고 많이 부끄러웠다. 조금 길겠지만 그의 글을 옮겨두는 게 낫겠다.

[안양교도소 미결 사동에 있을 때 용선이를 처음 만났다. 나이는 자신도 잘 모르지만 소년수니까 스무 살은 안 된 모양이다. 죄명은 '폭행치사'였다. 보통 죄수들이 구치소에 들어오면 변호사를 구해서 자신을 변호하는데 용선이처럼 부모가 능력이 없으면 그냥 국선변호인을 선임한다. 그러나 국선변호인이 적극적으로 변호를 하는 일은 없다고 믿는 게 상식이다. 하루는 용선이를 운동장에서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딱 유전무죄에 걸린 것이다.

또래의 아이들과 휩쓸려서 초등학교 어린아이를 때렸는데 자신은 끼어들지도 못하고 다른 아이들이 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경찰서에서 부모님들이 찾아와 다 나가고 자신이 모든 걸 저지른 것으로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용선이는 한글도 모르고,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생활무능력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 폭행치사에 3년형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금방 나올 수 있다면 순댓국도 사주고 잘해줘서 멋도 모르고 안양까지 온 것이다. 허나 어찌하랴! 이것이 용선이의 운명인 것을.

나는 용선이를 위해서 담당 판사에게 탄원서를 대신 작성해 제출했다. 그래서인지 항소심에서 6개월 감형이 되었다. 그해 가을 나는 형이 확정되어 김천 소년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일반수들이 없는 병사에 방을 받은 나는 독서와 운동으로 나날을 보냈다. 김천이 춥다는 걸 절실히 느낀 게 이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 시간에 용선이가 있는 걸 발견했다. 용선이가 먼저 달려와 헤벌쭉 웃으면서 “철우 아이씨”(아저씨를 이렇게 발음한다) 하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갑고 안쓰러운지 덥석 안아주었다. 

용선이도 병사에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용선이 보호자가 되었다. 용선이는 좀 모자라 징역에서 죄수들끼리 칭하는 말로 '좆밥'이었다. 소위 왕따다. 약육강식의 사회 바로 소년교도소이다. 힘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약삭빠르거나 해야 살아남는다. 허나 용선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방에서도 설움뿐이다. 무시당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런 삶처럼 보인다. 

나는 먼저 용선이 방에 가서 그 방의 소년수들에게 단단히 경고를 했다. “만약 용선이를 괴롭히면 누구든지 전방(방을 옮기는 것 - 징역에서는 고통스런 일이다. 방을 옮기면 쫄병이 되기 때문에) 보낸다. 알았지?” 그들은 일제히 “네!”하고 대답한다. 허나 어찌 알겠는가? 서로 볼 수 없으니. 운동장에서 만나면 그저 잘 산다고 한다. 면회 와서 영치물품들이 오면 용선이와 나눠 쓴다. 메리야스며 먹을 것이며 뭐든지 용선이 몫을 챙긴다. 이제 용선이도 같은 사동에 힘센(?) '왈왈이' 공안수 아저씨가 후견인으로 있다는 게 큰 의지가 된 것이다. 

징역에서 아무래도 가장 큰 소일거리 중 하나는 독서다. 그것은 일반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용선인 책을 봐도 그림만 봐야 한다. '바깥에서도 글을 모르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제 용선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교도관에게 하루에 한 시간씩 용선이 한글 공부를 시키겠노라 부탁을 했다. 좋다고 해서 그날부터 가르치는데 이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글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외우는 것이었다. 박용선이라는 글씨를 외우고 다른 문장에서 '박'자나 '용'자, '선'자가 나오면 모르는 것이었다.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도 보고, 숙제도 무진장 내주었건만 한글을 깨우치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르치는 나도 징역에서 괜한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셈이 되었다. 

ⓒ2004 이대식 

그러던 어느 날 용선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철우 아이씨, 출소하면 아이씨 만날 수 있겠죠?”묻는 것이다. 나는 “그럼, 그래야지!”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받아넘기고 그날 저녁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도 정이 드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나는 “용선이가 한글도 알고 숫자도 알아야 편지도 쓰고, 전화번호를 알아야 전화도 하지. 그래야 만날 수 있는 거야”라고 말을 했다. 그날부터 용선이의 한글 공부는 확실히 달라졌다. 한글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용선이는 한글을 터득했다. 숫자는 물론이다. 스스로도 기쁜 모양이다. 한결 달라진 용선이! 그에게 어쩌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을 수도 있다. 만화책도 읽고 잡지도 뒤적이게 되었다. 

그런 용선이가 내가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를 했다. '아! 용선이!' 담장 밖에서 용선이 목소리를 들으니까 생경한 느낌마저 들었다. 96년 12월 31일 나는 속초엘 갔다. 용선이가 속초에 살기 때문에. 용선이는 작은 농장에서 숙식만 해결하며 살고 있었다. 

물어물어 찾아가 본 용선이의 모습은 차라리 감옥이 낫겠다 싶은 정도였다. 우선 가까운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고, 이발시키고, 싸구려 잠바를 사주었다. 무얼 먹고 싶으냐 물었더니 '탕수육'을 먹자는 거였다. 그러자며 용선이가 손수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더니 보신탕집 아닌가? 그 집 간판에 '탕·수육'이라고 써 있는 것이었다. 그런 용선이다. 

그 후로 용선이와 1년에 두 번 만난다. 겨울에 한 번, 여름에 한 번 속초엘 간다. 지난 겨울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도 언제 올 거냐고 3일에 한번 전화가 온다. 어쩌면 가족을 빼고 유일하게 나를 찾는 용선이는 내 유일한 친구인지도 모른다. 모두 주고받는 게 있어야 관계를 맺는 세상에 용선이는 나를 시험하며 오늘도 속초에 있다. --[소년수 용선이], <한탄강에 서면 통일이 보인다> ]

그의 글은 이렇듯 매우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구체적이고 열정적이다. 80년대의 역사적 격랑과 90년대의 방황기를 넘어 현재에 이른 '고뇌하는 자'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그 시절을 살아온 '지성과 양심'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저항과 4년여의 옥고, 기나긴 탐색기. 그러나 그의 글 어디를 보아도 삶에 대한 절망이나 어두움을 찾을 수 없다. 

책 몇 권으로, 날것의 관념으로 세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장벽과 싸우고 몸소 체험하며 쌓아온 혜안으로 구석구석 사회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지역운동, 교육, 정치, 음악, 문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는 매우 넓으며 현실을 이해하는 눈은 '전인적' 시각에 가깝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다양한 역할들을 해왔지만 거기엔 하나같이 꾸밈이 없다. 이런 그의 삶의 이력을 담아낸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전인적'이라는 말에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런 사람 이철우가 '간첩'이 되어버렸다. 국회 내에 잠입한 프락치라는 말에는 헛웃음이 다 나온다. 지금 우리 사회 이념의 온도계는 몇 도나 될까? 

'빨갱이' 한마디면 그게 누구건 감옥에 집어넣고 그의 가족까지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만들 수 있었던 부끄러웠던 과거를 다시 추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힘이 얼마가 됐든, 이제는 이철우 그의 조국 사랑, 고향 사랑, 가족 사랑을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은 못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이철우, 그 같은 사람들로 인해 그만큼 성숙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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