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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이후 서구를 바라보는 청나라의 시각은 어떠했을까?
게시물ID : humorbest_11917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21
조회수 : 2811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1/22 19:57:52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1/19 11: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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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서구가 중화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수적인 유학자 층에서도 서구를 우러러보며 중국을 개혁하자는 의지를 밝힌 사람도 있는데, 그중 두 사람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서계여(徐繼畬)
그는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 아빌의 도움을 받아 1848년, 영환지략을 집필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을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 중 하나' 일 뿐이며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미국을 찬양하였는데, 조지 워싱턴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가!" 그리고 "그는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고, 지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지도 않았다. 워싱턴은 비범한 인물이다." 라고 덧붙이고요.

 서계여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유교의 이상사회에 가장 걸맞는 체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옛날의 요순시절처럼, 아들이 대를 잇는게 아닌 덕망 있는 자를 백성들의 손으로 뽑는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던 듯 합니다. 

 다만 그때까지도 많은 이들이 서양인들은 야만 오랑캐라고 생각하였고, 더더욱이 중화라는 자존심이 추락한 상태에서 서계여의 이런 글은 기름을 들이붓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계여가 외국 오랑캐들의 실상을 과장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퇴임할 수 밖에 없었고, 고향 집에서 여생을 보내다 동치제 시기에 서태후가 총리아문의 관직을 내렸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다시 은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빈춘(斌椿)
그는 사찰단의 신분으로 서양으로 떠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서구 11개국을 여행하면서 도시, 왕궁, 박물관, 극장, 공장과 조선소, 병원 심지어 동물원까지 방문하였습니다. 또한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기도 했는데, 여왕이 그에게 영국에 대해 어떠냐고 묻자 그는 솔직하게 답합니다.
"건물과 시설들이 놀라울 정도로 잘 지어졌고, 중국보다 좋은 듯합니다. 국정이 운영되는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잠녀 이 나라의 것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영국 황태자가 개최한 파티에서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바다 건너 이런 화려함이 있다는 것을 최초로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빈춘은 밤중의 불 켜진 도시를 경이롭게 여겼고, 42번이나 승차한 기차에 대해서는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것 같다' 며 감탄하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들판에 물을 뿌려 토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양수기를 보고서 이것을 중국의 농지에 사용한다면 가뭄이나 침수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워했던 것은 유럽 여성들의 생활인데, 남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며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남자들과 손을 맞잡고 춤추는 면모가 중국 여성들의 생활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녀들은 증기선의 갑판에서 남자와 팔짱을 끼고 다녔으며, 또 그들의 남편이 마치 하인처럼 아내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빈춘은 이를 보고 다소 충격적이지만 가정 내의 화목함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서계여의 영환지략을 읽기도 하였고, 그가 일기를 발간할 때 서계여는 그 책의 서문을 써 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서구인들을 '더러운 짐승' 이나 '늑대와 이리같은 자들' 이라 여겼고, 그들의 군주는 '오랑캐들의 부족장' 이라 여겼습니다. 빈춘 또한 서계여처럼 보수세력의 지탄을 받다가 1871년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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