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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년 겨울 나는 조선족 대학생들과 함께 연변 어느 시골에서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했었다. 낮에는 대부분 조선족이었던 아이들에게 영어 노래와 한글을 가르쳤고, 밤에는 대학생들끼리 연애문제, 진로고민 등으로 날이 새는 줄 몰랐다. 당시 조선족 청년들의 고민은 취업을 위해서는 한국이나 상해 같은 대도시로 떠나야 하는데, 그로인해 고향인 연변엔 조선족 수가 줄어들어 공동체가 위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남한과 북한 관계가 더 개선되고 도로와 철도가 연결된다면, 연변은 동북3성에서 가장 큰 무역도시가 될 것이니 떠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2. 16대 대선에서 이쪽은 이O제가, 저쪽은 이O창이 대선 후보로 지지율이 높았다. 둘 다 보수 성향이라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다음 정부에서는 사장될 것이 분명했다. 조O / 중O 신문 회장들은 누가 되어도 좋은 구도라고 생각했는지, 이례적으로 대선 중립을 천명하기도 했었다. 그런 암울한 때에 노무현이 대선 출마를 하였다. 한국정치의 큰 병폐인 지역주의를 깨뜨리겠다며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에 출마하여 번번히 깨지던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의 대선 후보 지지율은 2% 내외... 가능성은 없었다.
3. 그런데 사람들이 노무현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모여서 지지활동도 하고, 후원금도 모으고, 지지 격려 전화도 돌렸다. 그리고 3월 첫 경선장소인 제주에서 3위, 울산에서 1위, 그리고 호남의 중심이라는 광주에서 1위를 하였다. 결국 '노풍'이 이O제 대세론을 꺽는 이변을 일으키며 강력한 대선 후보가 떠올랐다. 나는 오마이뉴스에서 경선 인터넷 중계를 보면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역주의에 맞서고 보수신문과 맞짱뜨는 그가 꼭 대통령이 되기를 바랬다. 그 때 내 지도교수님은 '민주당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한지 아냐'며 혀를 끌끌 차셨지만, 난 속으로 '그래도 저쪽보다는 나아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쪽 정치인들은 예상보다 더 양야치였다.
4.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6월에 치뤄진 지방선거에서 권력게이트와 낮은 투표율로 민주당은 참패하였다. 노무현을 달가워하지 않던 이쪽 정치인들은 하락하는 대선 지지율를 명분으로 후보 사퇴를 요구하였고, 더 나아가 후단협을 만들어 월드컵 특수로 인기있던 정O준을 밀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국민경선은 사기였다며 탈당까지 하였다. 당원과 지지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여의도 중심의 전형적인 구태를 보인 것이다. 이에 대한 민심의 역풍은 매서웠다.
5. 후단협 명단이 인터넷에 공유되었고, 철새정치인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민주당의 조직과 자금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더 모여들었고, 돼지저금통으로 상징되는 소액 후원금이 쌓여갔다. 내 손으로 만든 대선후보를 허망하게 잃을 수 없다는 생각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노무현의 대선 지지율은 반등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후보 단일화 협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11월 25일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에서 노무현이 승리하였다. 이날 발표방송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환호소리가 났는데, 이웃 몇몇 집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었다.
6. 후보단일화로 지지율이 큰 폭으로 상승한 노무현은 대세가 되었지만,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상대 후보의 무서운 추격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수도이전공약' 등이 있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거일 전날인 12월 18일 밤 10시 정O준은 지지철회를 발표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온 나라 방송에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조O일보는 사설로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며 본심을 감추지 못 했다. 밤중에 찾아간 노무현이 문전박대 당하는 모습을 보며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7. 12월 19일 하루종일 투표독려 문자와 전화를 하였고, 실시간 투표율 변화를 확인하였다. 내가 뭔가라도 좀더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답답하였다. 그렇게 초초한 시간을 보내고 출구조사 결과 노무현이 승리한 것으로 나오자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개표가 진행되면서 두 후보간 득표율이 엎치락뒤치락 접전이었다. 내가 출마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긴장하는 이유를 잘 몰랐다. 결국 밤 10시 넘어서 노무현의 대선 승리 확정이 결정되자 세상에 모든 것들을 갖게 된 느낌이었다. 노무현을 알게 된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는 그를 사랑하였다.
8.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후 노무현은 덕평 수련관에서 노사모와 축하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곳에서 노무현은 '나는 할일이 많은데, 제가 대통령이 되면 여러분은 뭐하지요?" 하고 물었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감시, 감시"라고 대답하자, 그는 "여러분 말고도 흔들사람 / 뒷통수 칠 사람 / 앞길을 막을 사람 꽉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흔드는 사람도 감시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노무현의 이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걸 알았다면 '참여정부가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기대만 가지고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9. '사람 사는 세상'를 꿈꾸던 노무현은 기득권에게는 기존 체제를 변혁시키려는 반역자였다. 그래서 탄핵으로 정치적 암살을 시도했었고, '행정수도이전'에 위헌 결정으로 행정 무능력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이O박 정권은 검찰을 시켜서 퇴임 후 낙향하여 살고 있는 노무현를 목 죄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씌울 혐의가 없어보이자 그의 가족들, 그와 관계된 인물들의 행적이 낱낱이 조사되고 파헤쳐졌다. 당시 노무현은 문 밖을 나서지도 못해 집안에 갇혀지냈다. 노무현을 통해 기득권에 저항한 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모두에게 본보기로 보여준 것이다.
10. 노무현은 대선후보 출마선언을 하면서 이런 연설을 하였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 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 했다."
노무현은 당신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 칼날이 끝까지 쫓아와 본인을 노리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같다. 그래서 대선후보로 선출된 것을 기뻐하는 자리에서, 그는 동지된 우리에게 '흔드는 사람도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나는 이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