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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 이후의 이야기-당 헌종의 원화중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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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소침
추천 : 6
조회수 : 188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4/03 14: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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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덕종 다음 왕으로 장자 이송李誦이 황위에 앉았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당 헌종의 아버지인 순종입니다. 숙비 왕씨 소생으로(사후 소덕황후의 시호를 받음) 779년 황태자로 봉해졌습니다. 사서에 "성품이 관대하며 온화하고 결단력이 있었고, 검소하면서 큰 뜻을 품은 인물"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름 총명하며 모질지 않은 성격이었던 듯 합니다. 하지만 대쪽같은 성미도 있어서 부황 덕종이 환관들을 총애하자 이송은 이를 비판하여 환관세력의 미움을 받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간에 많은 이들로부터 기대를 받던 총명한 태자였으나 804년 9월 중풍에 걸려 쓰러진 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이때쯤 덕종도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나 태자는 문병조차 가지 못했다지요. 805년 부황이 세상을 떠나자 병든 몸으로 황제자리에 올랐으나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런 불행한 순종에게도 조강지처는 있었습니다. 당 헌종의 어머니 장헌황후 왕씨는 어렸을 적 후궁으로 뽑혀 재인才人으로 입궁하였습니다. 대종은 그녀를 태자 이송에게 하사하였고, 778년 둘 사이에서 장자 이순李純이 태어났습니다. 이때 왕씨는 한국나이로 계산하면 열여섯(!!). 순종이 중풍에 든 이후에도 곁에서 수발을 들며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역사 기록은 왕씨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성격이 어질고 공손했으며 외척을 억누르고 내직의 가르침에 엄격하여 풍격이 있었다."





순종의 23명의 아들 중 차기 황태자로 지목되었던 헌종 이순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805년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원화元和라 하였습니다. 스물여뎗의 패기만만한 젊은 황제는 먼저 번진할거 국면을 수습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순은 즉위 초, 번진세력 억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길보, 무원형, 두황상, 배도 등을 중용하였고, 진해절도사 이기李錡의 반란을 평정하였습니다. 이후 하북 번진 위박절도사 오소양이 사망하자 아들 오원제가 그 사실을 숨기고는 스스로 병권을 장악하여 4개 현을 불태우고 약탈해버리는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817년 명장 이소가 오원제를 생포해 장안으로 압송함으로서 당 제국의 변방할거세력을 어느정도 눌러버리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기를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고 하는데, 이 '중흥' 은 얼마가지 못하였습니다. 헌종이 초심을 잃었던 것입니다.




오원제의 난을 진압한지 1년만인 원화 13년(818), 헌종은 군대를 동원해 대명군 인덕전을 건설하고 연못을 조성했는데, 이 규모가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재상 배도가 황제에게 간하였으나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나중에는 불교에 빠져들어 전국적으로 거대한 사원을 설립해 국가 재정에 구멍이 뚫립니다. 그러면서도 도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생약을 구한답시고 방사들을 궁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준 단약은 무언가 이상했던지 약을 먹고 난 뒤의 헌종은 마구마구 화를 내고 포악해져 곁에 있는 환관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두려워진 환관들은 저들끼리 작당하여 밤에 몰래 헌종을 살해하였고, 거짓으로 "황제가 단약을 잘못 복용하여 붕어하시었다" 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고는 무능한 태자 이항李恒을 황제에 세웁니다. 


다음편에 계속..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보니 글쓸 시간이 안나서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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