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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게시물ID : humorbest_1196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하철도999
추천 : 118
조회수 : 4134회
댓글수 : 3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6/01/13 22:18:14
원본글 작성시간 : 2006/01/13 19:45:14






6.25관련 사진들을 가능한 전부 모아 10여회차에 걸쳐 게제합니다.
사진들 대부분은 [ 블로그]에 의존하였으나 기타 다른 사이트에서도 가져 왔습니다.



☆ 참고 사항


1. 게제되는 사진들의 순서가 날자별, 내용별로 뒤죽박죽임과,


2. 회차별로 게제되는 사진들 속엔 중복되는 사진도 상당수임을 海

量하시길 . . .



특히,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 南麓 拜


 



압록강에 첫발을 딛고 맑은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국군용사.  50년 10월26일 오후 5시50분, 함경남도 혜산에 도착한 6사단 7연대 수색대원의 잊을 수 없는 모습이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적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3일만에 서울이 함락 되고말았다. 7/20에는 대전 실함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8월1일에는 낙동강전선까지 밀렸다

그 후 같은 해 9월 16일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한강 이남 적을 독안에 든 쥐처럼 만들고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10월 중순 유엔군은 청천강 이북으로 진입하였으며 10월 26일에는 남한군 제 6사단이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였다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러나 100만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과정에서 흥남 철수가 일어난다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미 제8군과 국군 제 1군단은 청천강선 으로부터 신속히 철수하여 12월 중순에는 38도선에 이르렀고, 다시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맞아 1월4일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 하므로서 서울이 다시 한번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국민들도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이것을1.4후퇴라한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추락하듯이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1/1월 중순에 서쪽으로는 평택, 동쪽으로는 삼척을 연결하는 선까지 후퇴하여 여기서 사태를 수습하고 재반격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워커 장군의 뒤를이은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위력수색 작전으로 적의 위치와 전투력을 확인토록 하면서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리고, 3월 중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38도선까지 진출.. 오늘까지 이르게 된다.



전쟁 후 50년.. 아직도 우리는 전쟁 중(정전 상태)이다.

우리 세대 인생 전반에 온통 멍에를 씌운 한국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과거를 잊는 자는 그 것을 다시 반복하게 되는 저주를 받는다.
One who forgets the past is condemned to repeat it again."






전쟁이 싫습니다 !

테러도 싫습니다 !

죽음도 싫습니다 !


- 고 김선일씨의 마지막 절규








6.25관련 사진 모음 8.






오마이뉴스 박도기자의 辯


네티즌의 성원으로, 필자는 2004년 1월 31일부터 2004년 3월 12일까지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을 방문했습니다.
방문 중, 현지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수십만 장의 'KOREA WAR(한국전쟁)' 사진 파일에서 500여매를 가려 뽑았습니다. 이 사진의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시대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편집해서 보내지 못한 것은 상자에 담긴 사진이 뒤죽박죽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이 50여년 전의 한국전쟁을 모르는 이에게는 사실적인 자료로, 그 당시의 참상을 아는 이에게는 지난 세월을 되새김질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참고로 이 사진들은 모두 미군과 미 종군기자들이 남긴 사진으로, 그들의 시각으로 앵글을 잡아서 촬영하였다는 것을 군더더기 말로 보탭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 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8. 20. 경북 어느 지역,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가재도구를 이고 있는 여인은 내 고모 아니면 이모일지도. "같이 갑세" "퍼뜩 안 오고 머하노. 쌕쌕이가 벼락친데이. 싸게싸게 따라 오이라."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를 타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할아버지 등에는 온갖 가재도구가 짊어져 있고, 오른 손아귀에는 손자가 잡혀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표를 사고자 늘어선 피난민들로 남녀노소없이 피난 봇짐을 이고 지고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꼭 필자의 고향(구미) 마을 같다. 온갖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피난민 행렬.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뙤약볕 속의 피난 길. 어데로 가야 목숨을 부지할지.





▲ 1950. 8. 24. 경북 왜관 부근. "피난 간 새 지발 집이나 무사해야 할 건데..." 뒤돌아 보고 또 돌아 보고... <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할배, 어데 갑니까?" "나 집에 간다." "못 갑니다." "와! 나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란다. 어이 비켜라."





▲ 1950. 8. 25. 장소 미상, 기총소사에 쓰러진 피난민들. "이렇게 객사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죽을 걸."





▲ 1950. 9. 6. 경북 칠곡 다부동, 가도 가도 끝없는 피난 행렬. 위정자를 잘 못 만난 불쌍한 무지렁이 핫바지 백성들이여!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 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 돌아 올 깁니다."





>▲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자기 가족들과 함께 서울을 빠져 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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