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흐리다.
아침 일찍부터 장에 들러 콩나물, 고사리, 고등어 몇 마리와 칠성 사이다 한 병 그리고
내일이면 일흔 번 째 생일을 맞이하는 누이의 작고 병든 발을 감싸줄 신발 한 켤레를 샀다.
양 손 가득한 짐에도 누이는 뭐가 그리 기쁜걸까.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는 일조차도 이제는 버겁다.
인생의 절반동안이나 나를 괴롭혀온 허리 통증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사흘 전 수레를 끌다 다친 손목덕분에 당분간 벌이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퉁명스러운 진단.
누이는 기어이 내 손에 아무것도 들지 못하게 했다.
사십여 분이 지나고서야 도착한 버스가 괜시리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앉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을 내서 버스 입구 계단을 오른다.
먼저 올라탄 누이가 이제 막 학생티를 벗은 어린 친구에게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 누이는 늘 그랬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저 청년의 호의를 극구 거절하겠지.
젊은 친구가 생긴 것 답지않게 정신이 올바르구만.
그런데 누이, 오늘은 도저히 안되겠네.... 미안하네...
털썩.
자리에 앉은 나를 보며 젊은이가 묻는다.
할아버지 이 자리 제가 할머니께 양보해드린거에요.
괜찮다고 하니 내가 좀 앉겠네. 다리가 안좋아서....
할아버지 이 할머니 아세요?
내 동생일세.
젊은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누이는 내 쪽을 연신 힐끔거리며 당황스러워 했지만, 그래도 저 어린놈의 호의에 내심 기쁜 눈치다.
아마도 누이의 어린 손주녀석이 지금껏 살아있었다면 저 만한 청춘일테야.
그런데 이 당돌한 녀석이 갑자기
바닥에 내려 놓은 짐이며 누이가 내내 가슴팍에 끌어안고있던 새 신이 담긴 봉지까지 이리 주세요 하더니
내 다리 내 다리 위에 덥썩 얹는게 아닌가.
앉아가시면서 이정도는 하셔야죠?
'고얀놈...당돌한놈...허허허'
세월 덕에 감각이 무뎌진걸까.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비아냥거림에도 오히려 행복한 기분이다.
차창 밖 회색빛 풍경이 점차 흐릿해진다.
인생칠십고래희.
축하받아야 할 칠순을 앞두고 그간 고생만 하느라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누이에게
차갑기만한줄 알았던 이 세상이 주는 선물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