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 달인작을 하는 도중, 내 육신은 이제 늙고 지쳐 퇴근하고 던전 한 바퀴만 돌면 영혼이 육신과 작별하려는 상태에 이르렀다.
라비던전을 가도 다중인식때문에 죽고, 그림자 퀘스트...뭐였지? 그들이 사는 세상? 그건 난이도가 너무 애매했다.
초급은 보스를 제외하고 너무 쉬워서 수련이 되는것 같지 않아 문제고, 중급은 수련은 되는것 같으나 보스를 잡으려면 나오의 영혼석을 소모해야 했다.
그 날도 어김없이 그들이 사는 세상 초급을 멍때리며 돌다 도플갱어 보스에게 3번 죽고 키보드에 샷건을 내리치려는 날이었다.
안그래도 지친 내 몸에 경직도 먹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스킬을 캐스팅하는 도플갱어는 내 비루한 영혼을 탈곡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격투술은 무엇인가... 분명 1:1 최강이랬는데 여신을 구한 내가 짝퉁새끼한테 털리다니...
여신 이 눈치빠른년이 그 때 자신을 구할 때 내 역할은 구경꾼 1에 지나지 않았다는걸 눈치 채고 나에게 저주를 퍼붓는게 틀림 없었다.
강한 현자타임을 느끼며 공략을 다시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건 생활 달인이었다. 목공과 악기연주...
그래. 자연을 벗 삼자. 피 튀기고 살 찢어지는 전투와(주로 내 쪽이) 숨막히는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잠시 벗어나 에린 라이프를 즐겨보자는 생각에 목수로 환생하고, 틈틈히 버프 연주들을 수련하며 매일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어느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짧은 게임 시간과 귀찮음으로 인해 이벤트에 참여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초보자여도 이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며 꼭 참여하라는 팁을 주었다.
천천히 읽어보니 과연... 내가 직접 움직이는게 아니라 그냥 단순 대화만 하면 끝인 이벤트였다.
마침 생활 스킬을 올리며 알바를 하는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이번 이벤트에 참여해 보기로 했다.
누가 좋은지 특성이 어떤지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난 운이 없는 편이라, 득템을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즐겨요 이순간 붐바차카붐바를 외치며 대충 이름이 마음에 드는 NPC를 골라 영입했고, 배정도 내 맘대로 배정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NPC마다 특성이 있고, 그 특성에 맞게 배정하면 승률이 높아진단다. 물론 난 그런건 모른 채 게임을 진행했다.
비기너스 럭이라 했던가. 엎치락 뒤치락 서로의 등짝을 보려 애쓰던 상대팀과 우리팀의 치열한 접전은 내 승리로 끝이 났고, 캐러반 조는 내게 축하한다며 등짝을 보여주고는 잠시 후 선물상자를 건넸다. 그 상자가 이번 사태의 시작이었다.
그 상자는 내 무관심과 알바노기의 바쁨 탓에 한 구석에 박혀있다, 시몬이 네리스에게 가져다 주라는 요상한 옷이 인벤에 들어가지 않고 임시 보관함에 들어갔을 때에서야 그 존재를 눈치챘다.
왜 이벤트 아이템을 이렇게 크게 만들까... 한칸짜리 아이템으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멍청한 데브캣. 투덜거리며 상자를 열었고, 상자에서 나온 아이템은 무언가의 교환권이었다.
좋은 아이템이 나온대도 알아보지 못하는 뉴비이고, 나에게 저런 뽑기 아이템에서 좋은 물건이 나올 리가 없다는 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는 나에게 그건 휴지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그 아이템은 이번 이벤트 상자에서 나오는 '파우치 교환권' 이었다.
다른 뉴비이거나, 혹은 올드비였다면 뛸 듯 기뻐하며 팔거나 사용할 아이템을 나는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뭐여 이건... 파우치? 파우치가 그거 아닌가? 그...바지랑 팬티벗고 날뛰는 그거...?"
왠지 모르게 종이가 덜렁거리는 듯 한 느낌을 받으며 교환권은 인벤 한 구석으로 잘 모셔졌다.
그리고 며칠 후, 길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신입 길드원을 소개하는 자리를 가지고, 회의 안건에 대해 얘기한 후 잡담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안건에 대해서 얘기가 나올 때, 난 어디인가...여긴 누구인가... 저게 뭔 얘긴가... 하는 생각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진지한 분위기에 드립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소세지와 맥주를 먹으며 인벤정리를 했다. 오늘 라임 좀 되네요
그러던 와중, 안건에 대한 얘기가 끝나고 잡담 시간이었다. 난 인벤 정리를 거의 끝냈고, 필요 없는 물건을 가방 하나에 싹 몰아넣고 버릴 준비를 하려는 찰나, 저 덜렁거리는 종이의 용도가 궁금해졌다.
"뉴비 주제에 감히 여쭙나이다. 이 덜렁거리는 종이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하찮은 뉴비가 먼저 질문을 하다니! 닥눈삼은 옛 햏자때부터 내려온 고귀한 덕목이거늘. 네 어찌 감히 손가락을 놀린단 말이냐!"
"세상이 말세야 말세... 쯧쯧... 요즘 젊은것들은..."
수많은 비난이 쏟아졌으나, 그들은 이내 성실히 답변해주기 시작했다.
"그거 300만숲 정도 할걸? 뉴비니까 팔아서 템 사면 되겠네."
흐..흥! 딱히 너를 위해 마거카를 검색해서 알아봐준건 아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난 이 미친곳에서 빨리 빠져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300만숲... 300만숲... 뉴비인 나로써는 상상조차 안가는 거금이었다. 누가 비정규직 아니랄까봐 알바를 해도 400골드도 안되는 푼돈에 빵셔틀을 시켜대는 NPC에 가진 분노를 사르륵 녹여주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고마운 캐러반 조. 카라멜 줘라고 놀리며 거지취급해서 미안해... 근데 니 머리 진짜 거지같아...
난 300만숲으로 뭘 사면 좋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파이어원드를 살까? 그것만 있으면 돈을 벌 던전을 돌 수 있댔는데... 아니면 방어구를 좀 사볼까? 붉은 곰한테도 가끔 질거같은데 방어를 좀 키우는거야... 아냐 마영전이나 이거나 결국 같은 데브캣이니까 결국 이겜룩겜일거야. 룩템을 좀 살까?
괜히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나에게도 봄날은 오는구나.. 유지태가 라면 먹고갈래? 하고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뿅가죽넿ㅎㅎㅎㅎ
이걸 이제 어떻게 팔아볼까? 뭘 사지? 하는 생각을 하며 들뜬 기분으로 내 생명줄인 채집도구들에 축복의 포션을 바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바르지 않고 대충 쓰다 버리는 햄스터헌터 채집용 단검과 뉴비웨어에 축복의 포션을 바르는 사치도 부렸다. 난 300만숲의 사나이니까.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가장 불행한 순간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다.
길드원들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들으며 축포를 바르던 나는, 축포와 한 칸 차이에 고이 모셔놓은 파우치 교환권이란 단어를 미처 보지 못 하고 그만 교환권을 사용해버렸다.
미친새끼... 정신나간새끼... 줘도 못 먹는 새끼... 한탄을 해 봤지만 돌아오는건 임시 보관함에서 왠지 덜렁거리는 듯 한 파우치였다.
한숨을 쉬며 길드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길드원들은 "그래요? 그냥 쓰면 되잖아요" 라며 내 무너진 꿈을 비웃었다.
안녕... 내 체캐파원.. 내 룩템들.. 숙련치세공 생활템들... 잠시나마 꿈 꿀 수 있어서 즐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