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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11대 황제 덕종德宗 광서제의 삶(3)-유신운동
게시물ID : humorbest_11966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15
조회수 : 1653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1/30 19:22:37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1/30 15: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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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다"

강유위는 자가 광하廣夏이고 호는 장소長素이며 광동성 태생인 서생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잃어 조부 손에서 자랐는데, 이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진지한 성격에 웃는 일이 드물었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서초산西樵山에서 불교와 유교 서적을 읽으며 독학하다가 다시 광동으로 돌아와 그곳에 자리잡고 만목초당萬木草堂이라는 학당을 세워 제자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이후에는 강학회强學會라는 이름의 면학회를 설립하여 지식인들과 청나라의 문제점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습니다.

강유위는 국가체제가 변형되어야 청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굴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1890년부터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나 이 상소는 황제에게 가기도 전에 거절되었습니다. 1894년에는 천 명이 넘는 진사과정생들에게 개혁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서명을 받았으나 이때도 마찬가지로 수용되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이 젊은 서생은 포기하지않고 그해 채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 반발해 1895년에도 청원서를 냅니다. 이 청원서에는 "강화를 거부하고", "수도를 내륙으로 옮기며", "변법할 것" 을 촉구하는 동시에 '변법을 하지 않을 시 훗날의 화는 오늘날보다 더욱 심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어투가 잔망스럽다는 이유로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895년 5월 29일의 상서는 드디어 광서제의 손에 들어가 황제는 이를 읽고 감동받아 이를 베껴서 태후, 군기처 및 고위관료들에게 올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황실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1897년 11월 또다시 상서를 올렸습니다. 이 상서에는 나라가 망하면 황제는 평민으로 살아가기도 어려울 것이며, 심지어 명 왕조의 마지막 황제처럼 목매달아 자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번 상서는 다행히도 황제가 볼 수 있었으며, 이에 광서제는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여러 번 상서가 거절당하자 강유위는 좌절하여 낙향하려 하였으나 옹동화는 그를 말려 북경에 계속 머무르게 하였고, 황제에게는 강유위의 재능이 자신보다 100배나 더 뛰어나니 개혁사상에 대한 그의 의견을 직접 들어야 한다고 간하였습니다. 광서제는 실제로 이 서생을 접견하려 하였으나 공친왕이 황제에게 궁중 안에서는 4품 이하의 관원을 접견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고 주지시켰기에 대신 총리아문에서 강유위를 접견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1898년 1월 24일날 거행된 이 회견에서 강유위는 자신의 의견을 유감없이 피력하였습니다.



영록:조종지법은 바꿀 수 없다.


강유위:조종의 법은 조종의 영토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종의 영토가 유린당하고 있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홍장:변법을 시행하면 육부도 철폐해아 하는가? 이전의 법률제도가 필요 없다는 것인가?


강유위:오늘날 각국은 병립하고 있는 시대이지 통일되어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법률은 통일되어 있는 것이어서 청을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전의 제도가 현재의 추세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다 없애야만 합니다.


<영록榮祿, 만주 정백기 사람으로, 공부상서 자리까지 오른 수구파 대신>


이 접견 내용이 알려지자 광서제는 강유위와 그의 개혁사상에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이후 경친왕을 시켜 "태후가 나에게 권한을 주지 않으면 차라리 퇴위하여 망국의 군주는 되지 않겠다" 라는 말을 서태후에게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서태후는 "나 또한 조카가 아니꼽다" 며 노발대발하였으나 경친왕이 변법의 이로운 점을 설파하자 태후는 약간 마음을 돌려 변법시행을 허락하고 맙니다.


그해 6월 공친왕이 사망하자 황제는 강유위를 직접 접견하였습니다. 이 접견은 4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강유위:사방의 오랑캐가 동시에 압박해오고 있어 분할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광서제:이제는 정말 변법을 하지 않으면 안되오.


강유위는 개혁계획을 설명하고는 국을 설립하고 각종 체제를 연구하라는 건의에 동의하였다.


광서제:그대의 개획은 매우 상세하다.


강유위:황상의 슬기로움이 이를 알아차리셨는데, 어째서 오랫동안 행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제는 병풍 밖을 둘러본 후 탄식하며 말했다. "방해를 하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강유위:황상의 현재 권한으로 개혁할 수 있는 것을 행하십시오. 비록 개혁할 수 없어도 핵심을 잡고 시도하면 충분합니다. 


광서제:그대는 내려가서 쉬도록 해라. 할 말이 있으면 상주문을 작성하여 진술해도 좋다.



강유위가 자리를 뜨니 황제는 그가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궁 안의 시종들은 여태껏 이렇게 오랜 시간의 접견은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렇게 광서제는 곧바로 [명정국시조明定國是詔]를 반포하고 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유신운동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定国是诏》

[정치 분야:백성과 관리들의 상소를 누구도 막지 못한다. 한직과 중복 기구를 통폐합하고 인원을 감축한다. 만주족의 생계 도모를 허가한다.


경제 분야:농공상국을 설립해 실업을 지원하고, 과학 및 발명을 장려한다. 철로광무총국을 설립해 민영 철도기업과 광산개발을 장려한다.


문화교육 분야:팔고문을 폐지하고 책론策論으로 시험을 본다. 각 성의 서원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당을 학당으로 바꾸고 지방정부와 개인의 학당 설립을 장려한다. 경사대학당을 설립한다. 경사대학당 부속 의학당을 개설한다. 편역학당을 설립한다. 국영신문을 출판한다. 각급 학당에서는 일률적으로 중국 전통 학문과 서양 학문을 함께 가르친다. 정치경제의 특과고시를 실시한다.


군사 분야:녹영을 축소하고 남아도는 인원을 줄인다. 해군을 증설한다.


기타:고위관리들의 외국 왕래를 장려한다. 선교사를 보호한다. 법규를 개선하고 간소화한다. ]



그러나 보수파들은 이에 크게 반대하였습니다. 후구파 섭덕희葉德輝는 "한나라 때의 공양학은 한나라를 높였으나 오늘날의 공양학은 오랑캐를 높인다" 며 강유위를 "겉으로는 공자를 말하나 그 마음은 오랑캐" 라고 대차게 비난하였습니다. 군기대신 영록은 서태후에게 '황제폐하가 도를 넘었다' 라고 간하였습니다. 이에 서태후가 동요하자 황제와 유신파들은 더더욱 초조해졌습니다.


7월 29일 이화원에서 태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던 황제는 그녀의 압박을 느꼈습니다.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느낀 광서제는 유신파 중 한 사람인 양예에게 이러한 밀지를 내립니다.



[짐이 시국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변법이 아니면 중국을 구할 수 없고 노쇠한 수구 대신들을 내보내고 시국에 통달한 선비들을 기용하지 않으면 변법을 시행할 수 없다. 그러나 황태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짐이 여러 번 간했으나 화를 내며 듣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울 듯하니 너희는 속히 대책을 의논해 서로 구할 방도를 찾으라. 짐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몹시 염려스럽다. ]



강유위는 이 소식을 듣고 황제를 구하기 위해 서태후와 영록을 암살하기로 결정내렸습니다. 유신파에 가담했던 젊은이 중 하나인 담사동譚詞同은 북양 삼군의 장수였던 원세계를 찾아가 영록을 죽이라는 황제의 밀지를 내밀며 말하였습니다.


"만일 폐하를 구하지 않을 것이면 태후에게 날 고발하시오. 내 머리를 자르면 부귀영화를 누릴 테니."


그 말에 원세계는 비분방개하며 소리칩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시오? 영록을 죽이는 것쯤이야 개잡는 것 만큼 쉽소. 황상은 우리 모두의 성주이신데 황상을 보호하는 책임이 그대에게 있는 줄만 아시오?

내게도 있소, 내게도 있단 말이오!"


라고는 말하였으나 원세계로서는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권력은 태후가 쥐고 있는데, 황제에게 줄을 서는 것은 손해보는 짓으로만 보였던 데다 담사동이 보여주었던 밀지가 진짜인지 위조된 것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원세계는 이 밀모를 영록에게 알렸고. 영록은 그날밤 부리나케 달려가 태후에게 모두 고해버립니다.


<담사동譚詞同>

"외국에서는 변법을 할 때 피를 흘리지 않고 성공한 경우가 없었으나 중국에서 변법으로 피를 흘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만일 피를 흘린다면 나부터 시작할 것이다."


9월 21일, 그러니까 음력으로 8월 6일날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던 것입니다. 새벽에 황제는 문안인사를 올리기 위해 태후를 찾았으나 그녀는 이미 샛길로 빠져나가 황제의 거소로 직행하여 모든 문서를 가져간 후 황제를 불러 질책하였습니다.


"조종지법을 무시하고 강가란 놈의 법을 쓰려고 하느냐?"

"사방각국이 중국을 넘보고 있으니 변법을 통해 강해지려는 노력을 하였을 뿐 강유위의 법을 가져다 쓴 것이 아닙니다."

"조상의 법도보다 일개 서생이 만든 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냐? 너는 미쳤어. 조상에게 불초한 놈이야. 다른 대신들은 왜 황제를 말리지 않았소?"


광서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태후를 달래보려 하였으나 그 노력은 무의미하였습니다. 좌중의 분위기는 얼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담사동의 계획은 왜 말리지 않았느냐? 몰랐던 것이냐,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것이냐? 아니면 니가 주모자냐?"


가련한 황제는 결국 자신의 계획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광서제는 영대瀛臺에 유폐되었으며, 유신운동에 참여했던 젊은이들, 소위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라고 불리우던 이들은 전부 사형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였습니다.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던 강유위 또한 일본으로 떠나버렸는데, 이를 알지 못했던 그의 동생 강광인은 뒤늦게 깨닫고는 한바탕 욕을 퍼부었습니다.


"천하에 이런 우스운 일이 어디 있나? 형의 일을 어찌 동생이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


밀모를 꾀했던 담사동 또한 사형당하게 됩니다. 9월 25일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담사동의 거처에 달려가 끌고 나가려 하자 그는 비분방개한 어조로 말하였습니다.

"난 문인이고 또한 관직도 있다. 그런 내가 도망칠 줄로 아느냐?"

옥중에서 담사동은 태연자약했고 석탄 숯덩이를 주어들고선 감방의 벽에 시를 썻습니다. '내 스스로 칼 비꺼 차고 하늘을 우러러 웃나니..'

사형당할 때에도 당당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도적을 죽이려 하였으나 국면을 전환할 힘이 없어 죽음을 맞게 되는구나.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다. 기쁘다! 기쁘다!"


그렇게 담사동, 양예, 유광제, 임욱, 양심수, 강광인은 저잣거리에서 처형됩니다. 이로서 변법자강개혁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 실패로 끝난 개혁운동은 높은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그만큼 허점도 많았습니다. 개혁을 펼쳤던 103일 동안 황제가 내린 지시는 200건이 넘었고, 하루에 10건의 안건을 통과시켰던 날도 있었습니다. 이런 조급하고 준비성 없는 개혁에 반발이 심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안건을 많이 통과시킨다고 근대화가 빨리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특히 팔고문 폐지는 서생들의 반발을, 제사를 지내지 않는 절과 사당의 폐지는 승려와 도사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게다가 권력을 쥐고 있던 수구 대신들을 지나치게 무시하였던 것도 큰 오점이었습니다. 왕조라는 젊은이가 보낸 상서를 윗상사인 회탑포가 무시하자 왕조는 이를 고발하였고, 결국 회탑포는 어이없게 파면당하였습니다.'몇천 년 된 조종지법이 하루아침에 바뀌겠느냐' 라는 영록의 비아냥에 강유위는 "몇몇 일이품 대인들이 죽어주면 가능합니다" 라는 오만한 말로 맞받아쳤던 일화도 유명하지요. 이런 행태에 불만을 가진 수구파는 태후에게 '변법은 태후의 권력을 위축시키려는 농간' 이라며 꼬드기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실 개혁내용이 대단한 뼈대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유신파들의 생각은 '막연하다' 에 가까웠습니다. 게중에는 현실 가능성이 전무한 공약도 있었습니다. 강유위는 개혁에 필요한 돈을 "외국에서 대규모 차관을 들여야 한다" 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담사동은 "내외몽고, 신강, 티베트, 청해는 넓지만 춥고 척박하여 중국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므로 영국과 러시아에 나누어 팔아야" 한다는 구상까지 내놓았습니다. 영국 공사는 강유위에 대해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박력이 없기 때문에 난세의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 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아무튼간에 강유위는 일본 망명 후에도 황제에 대한 충성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년에 선통제의 스승 레지날드 존스턴을 만났을 때에도 광서제에 대해 찬양일색의 어조로 말하였고, 의화단의 난으로 혼란스러웠을 당시 폐위되었던 황제를 다시 옹립하려는 시도도 벌였습니다. 또한 공화정에 반대하며 입헌군주제의 이점을 설파하였습니다.


"입헌군주제와 민주제 아래에서 백성의 권리는 똑같다. 국회와 내각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수상과 대통령의 권력은 이름과 직위가 다르다 하더라도 지위는 같다. 그러나 수상의 직위를 얻기 위해서는 두 당의 사람들이 필묵과 구설로 싸우다가도 시간이 지나 교체되고 나면 이후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백성들 또한 금방 잊어버리니, 이것은 전제정치시대에 재상을 교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 대통령이 되기 위한 투쟁에서는 두 정당이 무리를 이루어 정당의 추종자들을 선동하며 서로를 죽이기까지한다. 이러한 싸움에 수많은 국민들 또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대리인에 불과한데 한 사람의 대변인을 위해 국민이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이로운 일이 아니다."


또한 몽골, 티베트, 투르키스탄 사람들에게는 한족 통치자보다 만주족 군주에게 더욱 친근감을 가지므로 중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만주족의 왕조가 종속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실패 이유야 어찌되었건 무술정변은 이제 중국은 자력으로 내부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평가가 내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청조에 대한 불신으로 진화해, 이후 1911년 신해혁명의 밑바탕이 됩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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