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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11대 황제 덕종德宗 광서제의 삶(2)
게시물ID : humorbest_11976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13
조회수 : 2692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2/01 10:39:22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1/24 15: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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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제가 성년이 된 뒤 서태후는 형식상으로는 이화원에 물러나 있었으나 실권은 자신이 쥐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태후의 욕심으로 인해 모자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하였고, 이를 완충해줄 인물인 순친왕은 1891년 세상을 뜨고 맙니다.

<'이렇게 화려한 화원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고 옹동화가 말했던 이화원의 모습>

순친왕은 1890년 11월 갑작스럽게 몸이 안좋아졌습니다. 황제가 친히 문병왔음에도 불구, 결국 1891년 1월 1일 사망하여 북경 서산에서 장례지냅니다. 순친왕 직위는 그의 다섯번째 아들 재풍载沣에게 돌아갑니다.
친아버지의 사망 소식은 광서제에게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896년 황제의 생모인 엽혁나랍씨가 사망합니다.

醇亲王奕譞与福晋
<순친왕 부부의 모습. 왼쪽이 엽혁나랍씨로, 순친왕의 적복진이며, 이름은 완정婉贞>

둘째아들이 황제가 된 이후에도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셋째아들은 태어난 지 하루만에 죽었고, 넷째아들과 딸도 각각 다섯 살과 여섯살을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순친왕은 측복진 이가씨와 유가씨를 총애하여 그들 사이에서 3남 2녀를 봅니다. 
 엽혁나랍씨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전부 요절하고, 금슬이 좋았던 남편은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해주지 않으며, 황제는 자신의 친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만나보지 못합니다. 이런 괴로운 생활 속에서 그녀는 재첨이 어렸을 적 입었던 옷들을 끌어안고 자주 울었습니다.

1896년 광서제는 서태후의 명을 받들어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순친왕부에 몸소 행차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엽혁나랍씨는 병이 너무 위중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천 마디가 넘었으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힘도 없었기에,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세상을 떠납니다. 비록 자주 만나보지 못했던 어머니였지만 황제는 크게 상심하여 11일간 조정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황족이 사망하면 수도 내에서 100일간 음악공연을 하지 못한다는 황실 규정에 따라 음악을 좋아했던 서태후는 모진 감내를 겪었습니다. 9월 21일의 중추절 잔치 때도 풍악이 없었습니다. 여동생의 상이 끝난 직후, 태후는 이화원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화려한 축제를 열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서태후와 광서제의 갈등을 봉합해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점입니다. 결국 감정은 격화되어 이후 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더욱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청 제국은 서서히 가라앉는게 아니라 급격히 침몰하고 있던 것입니다. 1년 전 청일전쟁에서의 패패가 그 결과였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북양해군 대 일본의 전쟁이었다."-이홍장

잘 아시다시피 1894년 우리나라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고종이 청군을 끌어들이자, 일본 또한 기다렸다는듯이 8000명의 병사를 파병합니다. 외세의 개입을 초래해버리는 결과를 낳아버리자 농민군은 스스로 해체하였으나, 일본군은 남아있을 이유가 없음에도 철군하기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본국에서 지원 병력을 불러와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었습니다. 며칠 후 일본 정부는 '우리는 한반도에 남아 조선 정부를 개혁할 것이며 청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을 시 모든 후폭풍을 책임져야 한다' 는 내용의 외교각서를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왜놈들이 어찌 감히 청조에 대항한단 말인가!"

격분하여 소리를 지른 황제는 물론이고 태후와 청 제국의 신민들도 이에 분노해 마지않았습니다. 당시 청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 청 제국이 비록 서양에는 뒤질지 몰라도 아시아 최강국이며 하찮은 일본인들이 대들어 봤자 갈아뭉개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시 북양함대의 실력이 세계 6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만용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습니다. 서태후가 이화원 재건에 해군경비를 다 써버리면서 근 10년간 새 군함을 사들이지 못해 남은 선박은 이미 낙후되었고, 그마저도 실전 경험이 없었던 점을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25일 청나라의 고승호高升號가 격침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고승호는 청이 고용한 영국 병력 수송선으로, 일본의 공격 시 제대로 된 대포 하나 없었습니다. 청군은 총이라도 쏘며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침몰합니다. 이후 청일 양국이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여 8월 1일 청일전쟁의 막이 오릅니다.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에 주둔한 청군을 맹렬하게 공격하자 패배를 거듭하다 평양까지 퇴각하게 되어 이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입니다. 이때 청군이 다시 우세를 보였으나 총지휘관 엽지초葉志超는 무능하고 겁이 많은 위인이었던지라 갑작스럽게 퇴각을 명하여 평양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집니다.

<등세창>

지상전 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청의 모습은 한심하였습니다. 북양함대는 청나라로 가는 길목에 일본의 연합함대와 마주치면서 황해해전이 벌어졌습니다만, 역시 여기서도 패배하고 맙니다. 일본 쾌속정은 북양함대의 군함 두 척을 격침시켰고, 정원호도 일본군의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치원호의 제독 등세창은 일본 군함 길야호를 침몰시키기 위해 함대를 전속력으로 전진시켰으나 어뢰를 맞아 도리어 침몰당하게 됩니다. 그는 허리에 중상을 입고도 여전히 갑판에 앉아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명령이 다른 함정까지 전달되지 못합니다. 결국 등세창은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빠져 자살하였습니다. 선원 중 한명이 그를 구하기 위해 부표를 들고 뛰어내렸으나, 등세창은 거부하며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자리다!"

황해해전으로 인해 청군 측의 군함 다섯 대가 침몰하였고, 황해는 일본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반박할 수 없이 완벽한 일본의 승리였습니다.
다시 지상전으로 돌아가봅시다. 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며 청나라 본토까지 퇴각하였으나 집요한 일본군은 요동반도에까지 들어와 추격전을 벌입니다. 곧이어 요녕과 여순을 함락시켜 그곳의 주민들을 학살합니다.

<1894년 11월 21일부터 시작되어 며칠 동안 이어진 여순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국 측 사료에 의하면 피해자는 8000명 가량.>
이 학살이 있은 후 일본은 '당시 주민들은 대부분 도망쳤으며, 청군이 군복을 벗고 잠복하고 있었기에 학살당한 대부분은 일반백성이 아닌 군인이었다'며 발뺌하지만 청나라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895년 1월에 벌어졌던 위해해전때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라서, 황해해전 당시 부상을 입었음에도 저신이 보이지 않으면 장병들의 사기에 영향을 준다며 갑판 아래로 피신하라는 부하의 충고를 거부하였던 북양함대 총사령관 정여창丁汝昌은 "아군의 군함을 모두 폭파시켜라" 는 명을 내린 뒤 음독자살합니다. 이후 양용림과 장문선 또한 투항을 거부하고 자살하지요. 

청일전쟁 이후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은 이런저런 요구를 전부 들어주어야만 하였습니다.

1.먼저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며
2.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조공을 중단,
3.2억 냥의 배상금을 일본에 지불한다.
4.또한 충경, 소주, 항주 등을 개방하며
5.일본인이 중국에 공장을 개설하고 제조업에 종사할 권리를 갖는다.

실로 청나라의 완벽한 굴욕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완벽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거리로 40만 명 가랑 되는 시민들이 쏟아져나와 자축하였고, 이 전쟁의 승리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간 이홍장은 조약을 굴욕스럽게 여겼던 어느 중국인에 의해 총을 맞아 큰 부상을 입습니다. 

청은 분명이 이상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황제 또한 이를 충분히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이런 청나라를 구원하겠다고 나선 이는 광동 성 출신 서생인 강유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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