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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감독님 인터뷰 모음 2
게시물ID : sports_302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캐꽃
추천 : 11
조회수 : 122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0/10/08 04:37:18
-전반기 득점권 타율이 무려 2할9푼9리였다, 이건 실력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좋은 흐름을 탔기 때문인가. 

4월에는 좋았고 5월에는 나빴다. 6월부터는 좋은 흐름을 타고 있다. 글쎄, 타자들의 집중력이 더 높아진 게 아닌가 싶다. 

  

-좋은 흐름이 유지될 것 같나. 위기가 몇 번 더 올 것 같나. 

전반기 마지막 6경기에서 2승4패했다. 매우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특히 두산과의 마지막 3연전은 가장 나쁠 때 치렀다. 지금 우리 타선의 장점은 어떤 타순에서도 점수가 나온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꼭 여기다’라는 게 없다. 이 타자 앞에서는 번트를 대고 반드시 점수를 낼 수 있다는 대목이 없다. 다른 팀보다 떨어지는 점이다. 하지만 1번에서 9번까지 고르게 점수를 내는 능력은 우리가 앞설 것이다. 홈런도 그렇고 도루 숫자도 특정 선수에게 몰려 있지 않다. 두산의 도루수가 우리보다 많지만 이종욱, 고영민, 민병헌 세 명이 60개가 넘는다. 글쎄, 어느 쪽이 유리할까. 난 잘 모르겠지만. 

  

-과거 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선수들은 기술 업, 레벨 업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질타했다. 요즘은 어떻게 생각하나. 

훈련을 적게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 계발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선수는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한 번 막혔을 때 ‘나는 어떤 선수이고, 어떻게 위기를 뚫어야 하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방법도 잘 모른다. SK 선수들에게 “예전에 잘 풀리지 않았던 건 그때의 생각과 방법이 나빴던 것이다. 능력 자체가 모자란 게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훈련을 많이 하는 건 물론 노력이다. 그런데 실패했다고 치자. 이건 노력이 아니다.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거기서 경험한 시행착오를 통해 뭔가를 잡아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 자체는 프로선수라면 당연한 거다. 열심히 하는데 안된다고 한다. 그런 ‘열심’은 아마추어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그렇게 노력을 하는 선수가 있다면? 

SK 선수들은 거의 다 열심히 한다. 

  

-과거 지도한 선수 가운데에는 어떤가. 

LG에 있을 때 본 양준혁은 뒤에서 많이 훈련하는 선수다. 좋지 않을 때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훈련한다. 가장 인상적인 선수라면 최동수가 아닌가 싶다. 훈련량이 어마어마했다. 밤샘 훈련도 할 선수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개인 지도를 할 때도 있나. 

올해 한두 번 정도였나. 코치와 선수가 씨름해야 할 일이다. 내가 나서면 방향이 바뀐다. 그러면 곤란하다. 시행착오가 생겨도 코치와 선수가 하는 게 낫다. 늘 가르칠 수 없는 나와 하다가 시행착오가 나오면 어떡하나. 

  

-구장에서 선수를 붙잡고 뭔가 얘기하는 장면을 많이 봤다. 

김재현과는 이야기를 좀 했다. 김광현도 그렇고. 김광현은 1주일 정도 가르쳤는데 많이 바뀐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하는 건 양념일 뿐이다. 

  

-2군 담당자들은 “아마추어선수들의 기본기는 과거보다 떨어진다”고 말한다. 이런 평가에 대한 생각은. 

좀 심하게 이야기하겠다. 과연 가르친 사람이 기본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추어 지도자들이 잘 모르는 건 당연하다. 프로의 기술과 아마추어의 기술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 책임을 아마추어에 돌려서는 안 된다. 누가 가르쳐서 선수가 저렇게 됐다는 식의 말은 해선 안 된다. 우리, 야구 동업자끼리는 더욱 그렇다. 신인들을 볼 때 그저 ‘아마추어에서는 저렇게 해 왔구나’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잘못되고 모자란 점을 바꾸는 게 프로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공부해야 한다. TV도 많이 봐야 하고.

요즘 야구팬들은 이승엽 경기 중계를 자주 본다. 일본프로야구 중계 때문에 야구가 죽는다고 한다. 내가 볼 땐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어쨌든 그 덕분에 일본프로야구를 통째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았나. 중계가 없으면 일본에 직접 가서 공부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나. 한국 타자들은 전에는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쳤다. 요즘에는 아마추어선수들도 그렇게 치지 않는다. 뒷손을 잘 쓰고 있다. 난 이걸 TV의 영향으로 본다. 나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태도를 매우 싫어한다. 나쁘면 내가 나쁜 거다. 남들이 뭐라 해도 이기면 된다. 지면 억울하다. 그래서 이기려고 노력한다. ‘SK에게 한번 이겨보라’는 건방진 말이 아니다.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 아닌가. 승부 세계의 법칙이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팀은 5월에 나빠졌다. 2위에 1~2경기 차이로 쫓겼다. 누가 봐도 위험하다 싶었다. 이거 그냥 놔 두면 죽겠구나 싶었다. 그때는 내가 좀 나섰다. 그 뒤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다시 뒤로 물러났다. 어려울 때 쉽게 쉽게 갔으면 아마 팀이 죽었을 것이다. 결국 리더는 위기 관리를 해야 한다. 지도자가 선수를 가르칠 때는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이해하게 해야 한다. 가령 캐치볼을 할 때 상대 가슴으로 던지라고 한다. 그러면 상대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저 선수 탓만 해서는 안 된다.

표본수가 적은 통계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가령 박재상은 올해 롯데에게 강하고 두산에 약하지만 지난해는 그 반대였다. 통계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나. 

7월 22일 롯데전에서 박재상을 5번에 기용했다. 최근에 박재상은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터를 파고들다 보니 뭔가를 찾았다. 롯데에게 강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결과도 좋았다. 라인업을 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로마노는 야수 실책 때문에 무너진 경기가 몇 번 있었다. 로마노는 실책에 영향을 많이 받는 스타일이다. 그럼 이 친구가 나올 때는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로마노가 등판할 때는 이호준 대신 박정권을 1루수로 썼다. 박정권의 수비가 더 좋기 때문이다. 실책 하나로 로마노가 순식간에 무너지면 어떡하나. 그래서 라인업 짜기가 힘들다. 우리 팀도 봐야 하고 상대도 봐야 하고. 나도 라인업이 고정돼 있으면 얼마나 편하겠나. 

  

-올해 ‘트라이(Try)’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선수들이 얼마나 따라 왔나. 

지도자들은 공부를 해야한다. 그리고 선수를 가르칠 때는 왜 이렇게 해야하는지 이유를 이해하게 해야 한다.

따라 왔다는 말은 잘못이다. 선수들이 변했다면 ‘내가 뭘 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거다.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다. 시행착오가 성공의 어머니다. 실패가 실패에 머무르면 그걸로 끝이다. 실패를 바탕으로 어떻게 ‘트라이’ 하느냐가 중요하다.

  

-훈련량이 많은 편이다. 박경완은 현대 이적 뒤 훈련량이 적어 놀랐다고 한다.

박경완 말이 나왔으니 이 말을 하고 싶다. 올해 박경완은 지난해보다 젊어졌다. 나이 먹은 선수에게 대우를 해주는 건 최악이다. 그건 빨리 팀에서 나가달라는 말이다. ‘고려장’이다. 가뜩이나 스타가 없는데 왜 있는 스타를 ‘고려장’하느냐. 나는 예전부터 나이 든 선수를 많이 썼다. 나는 선수의 야구하는 날을 하루라도 길게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사람을 버리기는 쉽다. 데리고 있기 어려워서 그렇지. 기용했는데 실패했다면 그 책임을 내가 지면 되는 거다.

올해 가득염이 이렇게 잘할지 누가 알았겠나. 예전 같으면 벌써 ‘고려장’하러 산에 가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가득염이 없으면 우리 팀이 굴러가지 않는다. 가득염도 올해 젊어졌다. 조웅천의 지난해 성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원래 그렇게 부진할 선수가 아니었다. 올해는 지난해 문제점이 많이 잡혔다. 전지훈련 때 어마어마하게 훈련했다. 젊은 선수들과 똑같이 뛰게 했다. 그러니까 젊어진 거다. 조웅천이 없었으면 우리 팀은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정대현은 예전부터 건강 문제가 있지 않나. 

선수마다 체력, 기술, 정신 상태가 모두 다르다. SK는 선수들을 최대한 살려 놓고 야구를 하려 한다. 5~6점 차로 이기는데도 투수 교체를 하면 상대 팀이 싫어한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선수들을 살려주기 위해서다. 어떡하든 시즌을 무사히 마쳐야 하고 야구 생명을 이어가게 해야 한다. 쓰러지고 다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아직 없다. 

지금은 어떡하든 빨리 74승을 올리는 게 목표다. 그 뒤는 그때 문제라고 생각한다.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2002년 11월 10일 삼성과 LG의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린 대구구장. 삼성의 우승이 확정되고 더그아웃에 홀로 앉아 있는 LG 김성근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악수를 청한 박철영 코치는 깜짝 놀랐다. 찬바람이 부는 11월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손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눈물도 보였다. 잠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나서 김성근 감독은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짧게 대답했다. 5년이 흐른 2007년. 김성근 감독의 SK는 정규시즌 1위를 달리고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김성근을 두고 나이 말고는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SK 선수단은 김성근 감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정경배 - 지난해 12월 미야자키 훈련장을 잊을 수 없다. 지옥 아니면 군대였다. 숙소, 바닷가, 야구장 말고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수퍼마켓 하나 없어 야구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루는 뛰고 있는 젊은 선수들 뒤에서 선참급들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는데 뒤통수가 따가워 뒤를 돌아보니 감독님이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날 우린 죽었다. 아스팔트길을 전력으로 뛰어간 뒤 운동장을 30바퀴나 돌았다. 김성근 감독의 훈련 특징은 무한 반복이다. 조용한 카리스마가 강점이다. 연습 때나 경기 때나 말이 없다. 대신 “몸으로 연습하면서 느끼라”고 강조한다. 몸이 되면 다음은 정신이다. 수많은 정신교육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남자는 다른 사람이 간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내가 가는 길이 길이다”이다.

  

박경완 - 외부에서는 어떻게 말할지 몰라도 나는 김감독이 다른 감독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승리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방법론의 차이다. 선수 교체를 자주 하는 것은 일종의 자극제다. 쌍방울 시절에도 비슷했다. 훈련할 때는 완벽을 추구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훈련을 많이 하는데 이기지 못하면 아쉽지 않느냐며 승부근성을 일깨운다.

  

민경삼 운영본부장 - 선수들이 김감독을 만나면 열심히 한다. 야구에 대한 열정 때문인 것 같다. 김감독 밑에서 일하면 힘들지 않을까 우려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요구사항이 없다. 감독과 프런트가 충돌한 일이 올해 한 번도 없었다. 스포테인먼트는 성적이 받쳐 주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6월 중순 자체 설문 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1,022명 가운데 과반수를 넘는 인원이 “성적이 좋아야 야구장에 온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겨야 관중이 온다. 

  

김정준 전력분석 과장 -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신념이다. 집에서도 야구만을 생각한다. 한 손에는 야구 메모, 다른 한 손에는 야구서적, 그리고 눈은 경기를 찍은 비디오를 향한다. 24시간이 짧을 것이다. 보통 새벽 1시에 주무시고 오전 7시에 일어나신다. 예전에는 하루에 2,3시간만 주무시는 경우도 봤다. 아들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훈련을 등한시하다 걸리면 새벽 2,3시까지 연습했다. 술은 예전에 많이 드셨는데 이제는 맥주만 약간 마신다. 담배는 예전부터 피우지 않았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다.

  

김경기 코치 - 1990년 신인시절 태평양에서 김성근 감독과 만났다. 선수교체 능력이 뛰어났다. 그때 갈비뼈에 금이 갔는데 경기에서 빠질 것 같아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서다 보니 전 경기를 뛰었다. 태평양 때도 벤치 인원을 모두 가동해 경기 막판에 가면 남아 있는 인원이 없었다. 강훈련으로도 유명했다. ‘잠수함 사건’을 잊지 못한다. 일본 캠프에서 한 달 동안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며 타격연습을 했고 저녁에 달을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훈련기간이 끝나고 귀국하기 전 해안에 떠있는 잠수함을 봤다. 무척 신기해 이선웅 선배에게 흥분해서 “저 잠수함 좀 보라”고 소리쳤는데 선배는 “저 잠수함, 한 달 내내 떠 있었다”고 말했다.

  

김상진 코치 - 경기 분석 능력이 놀라울 정도다. 선수를 보는 눈도 뛰어나다. 보통 팀에는 한두 개의 구심점이 있게 마련이지만 SK에서는 전원이 구심점이다. 서로서로 부족한 면을 메워준다. 김감독의 지도를 받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투수 윤길현을 보자. 지난해 윤길현은 이틀 연투가 힘든 투수였는데 올해는 3일을 계속 던져도 문제가 없다. 모두 훈련의 결과다.

  

김광현 - 김감독의 말이 마술처럼 딱딱 들어맞는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더 그렇다. 볼 배합 사인을 벤치로부터 받는데 신기하게 예측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에 와서 김감독을 만나고 주자를 견제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나주환 - 더그아웃에는 늘 경쟁의식과 긴장감이 흐른다. 타격기술면에서는 SK로 온 뒤 하체가 뒷받침된 상태에서 어깨를 더 닫고 치는 법을 알게 됐다. 오른쪽으로 밀어치는 타격에도 눈을 뜨게 됐다.

  

박정권 - 늘 주문하는 내용은 약육강식이다. “너희들은 벼랑 끝에 서있다”고 하면서 ‘뒤처지면 먹힌다’ 또는 ‘생존’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감독을 만나면서 하체를 쓰는 타격에 눈을 떴다. 

  

박철영 코치 - 김감독을 처음 본 것은 청소년대표선수였던 1978년이다. 그때 김감독은 충암고 감독이자 청소년대표팀 코칭스태프였다. 말할 때 일본식 어투가 있었지만 절도감이 있었다. 그 시절부터 오더를 짜는 데 완벽을 기했다. 2002년 LG에서 다시 만났다. 김감독은 야구를 풀어가는 방법이 많다. 선수들의 약점을 철저한 연습으로 보완한다. 2002년 한국시리즈 때는 내가 봐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상황인데 속으로 삭혔다. 매우 냉정하게 자신을 통제한다. 그러나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한번은 신윤호가 김감독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감독님, 저 컨디션 안 좋아요”라고 어리광을 부리자 김감독은 “이 녀석아 공이나 잘 던져라. 그리고 여기를 주물러라”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다른 팀 더그아웃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선수단에 보너스가 나오면 밥집 아주머니부터 선수단 버스 운전기사까지 팀과 관계된 모든 분의 명단을 확인해 나눠줬다. 지휘와 통솔 두 가지가 모두가 되는 지도자다. 난 지금도 김감독을 ‘대장’이라고 부른다.

  

이광길 코치 - 한때 김감독 양아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김감독의 인간 됨됨이에 감명을 받아 제자들이 환갑잔치까지 열어드린 것 아닌가. 김감독 밑에 있었던 사람 가운데 잘 안 풀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김감독 옆에 있으면 야구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허튼 행동을 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늘 야구생각이다. 아마 1,000시간 대화하면 999시간은 야구 이야기일 것이다. 나머지 한 시간은 “우리 밥 먹으러 어디 갈까” 정도 일 것이다. 앞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늘 뒤에서 지켜보고 소식을 물어본다. 그래서 제자들이 좋아하고 나중에 감동을 받는다.

  

정명원 현대 코치 - 1994년 태평양 때부터 주전 10명을 고정적으로 쓰면 후반기에 가 밀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실제로는 될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더그아웃에 흘렀다. 선수들에게 독기를 품게 한다. ‘내가 이런 성적을 내려고 겨울에 그렇게 심하게 훈련했나’라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즌이 거듭될수록 힘으로 변한다. 100%의 경기력을 위해 훈련 때 130%를 운동한다. 

  

김강민 - 타격훈련만 8시간을 한 적이 있다. 일반적인 타격연습 시간은 개인적으로 해도 30~40분, 특타를 해도 15분이다. 기본훈련이 끝나면 감독에게 지명된 타자는 ‘특특타’ 훈련까지 받아야 한다. 지명 받지 못한 선수들은 다시 옆에서 체력훈련을 계속한다.

  

박철호 홍보팀장 - 인자하다. 표현을 잘 안 하지만 애정이 있다. 같이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김성근 감독 울타리를 벗어나면 알게 된다.

  

조규제 현대 코치 - 쌍방울에서 1996,97년 2년 동안 김감독과 함께 야구를 했다. 까다롭고 빡빡한 분이라고 이야기 들었는데 실제로 겪어 보니 참 정이 많은 분이었다. 김감독의 요구사항을 실천하려면 야구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투수 로테이션 같은 것도 그때 많이 배웠다. 상황별로 요소요소마다 점검한다. 팀 미팅을 많이 했다. ‘야구를 왜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어떻게 할 것인가’의 3가지를 강조했다. 훈련강도가 세 아침에 운동을 시작해 밤이 되면 유니폼은 온통 흙으로 범벅이 됐다. 투수들은 행복했다. 땅에 넘어질 일이 없었으니까.

  

이영욱 - 나이에 비해 야구를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예전엔 몰랐다. 김감독의 정신교육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도전 정신도 갖게 됐다. 

  

윤길현 - 지난해 연투 능력이 부족했는데 올해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위기의식이 없었다.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투수의 장단점을 훤히 꿰뚫고 있다. 예전에는 던질 때 팔 스윙이 퍼졌는데 올해부터 짧게 끌고 나와 최대한 앞에서 던지라는 지시를 받고 그렇게 던지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지난해 약했던 이대호에 대한 대응력도 좋아졌다. 잦은 투수 교체에 나도 의아해 한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여기서 더 던지면 팀이 위험해 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교훈 기록원 - 많은 승리를 거두며 전반기를 1위로 마쳤다. 김감독은 모든 걸 성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이기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본다. 

  

최홍성 홍보팀 매니저 - 가장 놀랐던 것은 짧은 시간에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까지도 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오랜 세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4,5개 포지션을 비롯해 팀 전체의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본다. SK는 미래가 더 밝을 것 같다. 팀 체질 개선을 이렇게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지도자는 김감독뿐이다. 

  

이재원 -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자신감이다. 선수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니까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오늘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훈련은 힘들다. 그러나 정이 많고 카리스마가 있어 선수단을 장악한다. 김감독은 선수들을 조용히 관찰한다. 류현진(한화)에 대한 감이 좋았는데 어떻게 그걸 보셨는지. 류현진에게 강한 면 때문에 개막전에 나가 홈런을 쳤다.

  

익명 1 - 한 번도 김감독과 함께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감독실에서 혼자 식사를 한다. 이동할 때도 늘 혼자다. 배려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냉정한 모습이 지나칠 때가 있다.

  

익명 2 - 경기 중반 상대 팀이 포기했는데 우리 팀은 끝까지 평소처럼 한다. 다른 팀에서 SK를 지겨워 할 수도 있는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마지막 타석까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다음날 경기에서 빠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잘하는데 갑자기 빠지면 서운한 감정이 든다. 팀이 이기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최창호 전 태평양 투수, “혹사는 선수 탓” 

최창호는 1989년부터 1990년까지 태평양에서 김성근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2001년 LG에서도 인연은 이어져 2002년까지 김감독과 함께한 그는 현재 은퇴 뒤 운동기구 사업을 하고 있다.

  

- 김성근 감독과의 첫 만남은 언제였나. 

태평양에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다. 난 프로입단 뒤 바로 방위병으로 근무했는데 전역 5개월을 남겨 놓고 사령탑으로 오셨다. 첫 인상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직전 시즌 꼴찌였던 태평양이 1989년 3위로 올라섰는데.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 취임 직후 선수들을 데리고 마무리 훈련을 떠났다. 나는 방위병 근무로 마무리 훈련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훈련은 계속됐다. 나를 위해 박상열 코치와 불펜 포수를 인천에 남겨뒀다. 제물포고에서 3개월 동안 과외 교육을 받았다. 투구 밸런스부터 변화구 구사까지 많은 걸 배웠다. 주말이 되면 마무리 훈련장인 춘천으로 가 상태를 점검 받았다. 사실 강원도로 간 건 근무지 이탈이었다(웃음). 1989년 1월 소집 해제된 뒤 바로 1군 선수들과 훈련했다. 과외 덕에 몸이 가벼웠다. 

  

- 김감독의 선수관리에 특징이 있다면. 

성장할 때까지 꾸준히 기다린다. 프로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지만 여러 기회를 통해 선수가 자신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구단의 사정으로 볼 때 가능성만 믿고 선수를 키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김감독은 과감하게 이를 실천했다. 

  

- 투수 출신 감독이라 특별히 도움된 점이 있다면. 

투수에게 마운드는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외로운 공간이다. 능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가 상당수다. 정신적 압박이 심하다. 김감독은 이런 마음을 잘 이해했다. 말수는 적으셨지만 보이지 않는 배려가 상당했다. 

  

- 훈련량이 많은 걸로 유명한데. 

선배들이 많이 괴로워했다. 나이에 관계없이 똑같이 훈련하다 보니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감독이 엄격해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어느덧 선참이 된 LG에서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움과 걱정이 엇갈렸다. 어린 시절 훈련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연습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바로 뻗어 버리기 일쑤였다. LG의 모든 선수들이 그랬다. 45일 가까이 진행된 훈련을 모두 소화한 건 나와 박만채뿐이었다. 아무래도 어린 선수들과 궁합이 더 잘 맞으시는 것 같다. 

  

- 선수들에게 간섭이 심했나. 

아니다. 원정경기를 하러 갈 때 선수단 버스에 타지 않고 밥도 혼자 먹는다. 선수들끼리 편하게 지내라는 의미다. 훈련할 때는 집중하란 말씀만 하신다. 선수들에 대한 배려가 뭔지 아시는 분이다. 프로 시절 감독을 9명 만났다. 그 가운데 경기상황에 관계없이 일관된 표정을 보인 분은 김감독뿐이다.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LG 시절 선발 등판해 1회에 볼만 14개를 던진 적이 있다. 제구가 안됐다. 불펜에서 투수 2명이 몸을 푸는데 감독님은 여전히 무표정이셨다. 정신을 차리고 3타자를 내리 삼진으로 잡았다. 감독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치면 나도 모를 집중력이 생겼다. 

  

- 김감독에게 혹사 논란이 있었는데. 

혹사는 선수 개인의 관리 소홀 문제다. 기초체력이 튼튼하면 다칠 위험이 없다. 태평양 시절 피칭과 롱 토스를 포함해 전력투구로만 매일 공 700개를 던졌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1992년 부상을 당한 건 혹사가 아닌 몸 관리를 잘못해서였다. 밖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선발 등판하면 평균 140개를 던졌다. 무리다 싶으면 이야기를 했다. 내 몸을 잘 알면 혹사당할 일은 없다. 

  

- 태평양 시절 정신력 강화를 위해 극기훈련도 했다. 

오대산에서 4일 동안 얼음물에 24번 들락날락했다. 팬티 차림으로 등산도 했다. 가장 힘든 건 10시간 이상 이어진 행군이었다. 정신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불성실하면 무조건 2군행이었다. 워낙 엄격하셔서 모두 이를 악물고 해냈다.

  

- 따로 방에 불려가 훈련 받은 적이 있나. 

연습이 끝나고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가끔 방으로 부르셨다. 글러브를 끼고 신발을 신은 채 가 투구폼을 잡으면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교정해 주셨다. 공짜로 과외를 받는 기분이었다. 

  

- 김감독이 한국프로야구에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성공만큼이나 실패도 많이 겪으셨다. 더 큰 성공을 위한 시행착오였다. 이러한 과정이 쌓이면서 한국야구가 발전한다고 본다. 야구는 결과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내용으로 평가해야 옳다. 남들은 뭐라고 할 지 모르지만 내게 김감독은 한국야구계의 큰 별이다

  

심성보 전 쌍방울 외야수, “혹독한 훈련 덕”

1995년부터 5년간 쌍방울에서 김성근 감독과 인연을 맺은 심성보는 2001년 LG에서 재회해 2년을 함께했다. 지병인 당뇨로 2003년 삼성에서 은퇴한 그는 현재 휘닉스 야구단 감독으로 일한다.

  

- 김성근 감독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쌍방울에 감독으로 오면서부터다. 처음엔 누군지 잘 몰랐다. 선배들에게 운동을 많이 시키는 감독이란 이야기만 들었다. 섬뜩했다. 체력훈련을 좋아하지 않아서 어떻게 꾀병을 부릴까 고민했다(웃음). 나만 그런 게 아니다. 90% 이상이 불안에 떨었다. 입단식에서 인사 드리는데 한국말이 서투르셔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숨만 나왔다.

  

- 훈련은 어땠나. 

혹독했다. 눈 뜨고 감을 때까지 야구만 했다. 고교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왜 했던 걸 또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선수들 모두 훈련이 끝나면 녹초가 돼 눕기 바빴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딴짓 할 여유를 안 주셨다. 술을 먹거나 몰래 나돌아 다니기가 불가능했다. 

  

- 선수들 사이에서 김감독과 친하다고 소문 났는데. 

농담 섞인 대화를 많이 해 그런 것 같다. 쌍방울 시절 주장인 (김)기태 형 외에 감독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선배가 거의 없었다. 선배들이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런데 LG시절엔 어린 선수들이 말을 잘 건넸다. 내심 놀라웠다. 사실 감독 말씀을 알아듣기란 쉽지 않다. 한국말이 서투르셔서 처음엔 10마디 가운데 1마디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네’라고 이야기하고 넘어가면 ‘내가 뭐라고 했지?’라고 물으실 때가 있다. 우물쭈물거리면 돌아오는 건 꿀밤이었다.

  

- 타격훈련은 어땠나. 

쉴 새 없이 시키셨다. 가끔 무리해서 볼이 두 개로 보일 정도였다.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훈련이 언제 끝날까를 생각했다(웃음). 경기내용이 좋지 않으면 경기가 끝나고 관중이 나간 뒤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힘든 내색을 해도 감독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나중에 요령이 생겨 눈치껏 쉬었다. 그러다 걸리면 ‘집으로 가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40일 정도 집에서 쉬면 저절로 감독님 앞에 가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러면 ‘똑바로 하라’고 말씀하시고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 주신다. 김감독은 포기하지 않는 선수는 절대 놓는 법이 없다.

  

- 엄하게 선수들을 다스렸나. 

잘못이 있을 때만 그랬다. LG와의 원정경기 때 방에서 (성)영재 형이랑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 맥주를 한 캔만 먹었는데 영재 형이 한 개만 더 먹자고 해 후배 (배)국진이를 불러 3만 원을 쥐어주고 몇 개만 사오라고 했다. 그런데 국진이가 맥주 30캔을 사 들고 오다 감독에게 걸렸다. 당시 맥주 한 캔이 천 원이었는데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뺨을 20대 정도 맞았는데 워낙 손이 크시다 보니 정말 아팠다. 억울하기도 했고. 다음날 일어났는데 귀가 안 들렸다. 다음날 경기가 더블헤더여서 더 화가 나셨던 것 같다. 그때 외엔 엄하셨던 적은 없었다.

  

-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면. 

선수들을 모아 놓고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매번 말씀하셨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강훈련을 시켰다. 홈송구가 엉망이면 몇 시간 동안 홈송구만 했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 김감독이 쌍방울을 맡은 뒤 성적이 크게 올랐는데. 

첫해 2위를 했다. 그동안 했던 혹독한 훈련이 모두 잊혀졌다. 개인적으로 김감독께 감사드린다. 팀에 기태 형처럼 좋은 타자가 있는데도 날 4번 타자로 쓰셨다. 득점 상황에서 타율이 좋아 그랬다고 하셨다. 난 다른 팀에 가면 4번 타자는 꿈도 못 꿀 선수였다. 김감독님은 내게 야구에 대한 희망을 주셨다.

  

- 김감독만이 가진 특징이 있다면. 

프로생활을 하며 6명의 감독을 만났다. 그 가운데 가장 정이 많은 분이다. 선수들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한다. 김감독님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색깔이 달라서일 것이다. 그러나 선수들에 대해 편견 없이 자신의 주관대로 팀을 이끄는 자세는 존중돼야 마땅하다고 본다.

  

- 김감독은 당신에게 어떤 인물인가. 

제2의 아버지다. 프로무대에서 내게 많은 기회를 주셨고 당뇨병으로 선수생활의 기로에 서있을 때도 힘이 돼 주셨다. 사실 부끄럽다. 성공해 감독님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감독님을 생각할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고마움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야구의 신|작성자 나 최진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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