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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망시 당대의 인식비교
게시물ID : history_120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rdien
추천 : 6
조회수 : 172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0/10 23:11:54

명성왕후 사망 후 당대의 인식

 

이때 민후(=민비)는 벽에 걸려 있는 옷 뒤로 숨어 있었으나 그들은 민후의 머리를 잡아 끌어내었다. 小村室의 딸은 민후를 보고 확인하였다. 민후는 연달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일병들은 민후를 칼로 내리쳐 그 屍身을 검은 두루마기에 싸가지고 鹿山 밑 樹木 사이로 가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운 후 그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을 주워 땅에 불을 지르고 埋葬하였다. 민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여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한 것이다.<매천야록>

 

종전에는 국휼(=국상)이 있을 때 언제나 성복기간에 백립(흰 베로 만든 갓대상(大祥뒤부터 담제 전까지 상주(喪主)가 쓰거나국상(國喪때 일반 백성이 썼다.) 을 쓰도록 재촉하여 백립 값이 매우 올랐으므로 이때는 곡반(국상 때 곡을 하던 벼슬아치의 반열.) 에 참석한 사람만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민들은 백지로 칠립(=그냥 일반적인 흑갈색 갓)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머리만 가린 것이었으나 한 달도 안돼 모두 백립을 쓰고 다니라고 하므로, 이때 민간에서는 서로 입을 삐죽거리며 “나에게 무슨 은혜가 있었다고 다시 나에게 백립을 쓰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임오군난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간사한 자들은 백지를 손바닥만하게 접어 삿갓 위에다 붙이고, 고루하고 둔한 사람들은 버젓이 칠립을 쓰고 다녔으나 이런 모습을 본 관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申箕善이 宣諭使로 임명된 후에는 명을 게시하여 엄하게 금하였지만 사람들은 영을 따르지 않았고, 정유년(1897) 봄에는 칠립을 쓴 사람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것은 호남과 영남뿐 아니라 전국이 모두 그러하였다고 한다 .<매천야록>
 
흥선대원군 사망 후 당대의 인식
 
잠시 후 그는 다시 어가가 오지 않느냐고 물은 다음 긴 탄식을 하고 운명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목이 메도록 통곡하였다. 이하응은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공과가 상반하였다.
그는 갑술년(1874) 이후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수차례 위태로운 일이 있었으나 10여 년을 두문불출하고 있는 동안, 국가에 무슨 변이 있으면 군중들의 추대를 받아 누차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좌절되어 거의 자멸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恩怨의 一念이 사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협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이고 그 명성도 외국에까지 들리므로 조야에서는 그를 大老로 의지하여 그가 사망할 때는 원근이 모두 슬퍼하였다<매천야록>

출처: 역개루.




다만 매천야록은 황현이 쓴 야사집으로, 역사서로 보기는 어렵다는걸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국사공부할때 왜 을미사변보다 단발령이 의병봉기의 주된이유로 언급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어느정도 알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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