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란 엄밀히 따져보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하늘은 푸르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나무가 파랗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나 나무가 스스로 “내가 푸르다.”거나 “내가 파랗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인간들이 아주 오랜 옛날 누군가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 했을 터이고, 이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이 말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을 뿐이다.
개, 고양이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나 고양이 스스로 “나는 개다.”, “나는 고양이다.”고 말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다음 서로 자기가 만든 것이 옳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색깔, 모양, 시간, 공간, 이름, 원인과 결과, 삶과 죽음, 가고 옴 등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본래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나오며, 그것도 내 생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미국 사람들은 개를 ‘도그(dog)’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개’라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개에게 한번 물어보자.
“너 정말 개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다. 지혜를 갖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생각이 일어나기 전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지점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지점을 마음, 본질, 물질, 하느님, 자기 자신, 부처, 영혼, 의식 등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본래 그 지점은 생각 이전의 상태로, 이름과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 말하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기 생각에만 집착해 자기만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고통을 만들어 내는 근원적 이유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집착해 있다. 집착에 사로잡히면 상황을 맑게 볼 수 없다. ...중략... 이런 집착이 일어나면 우리의 생각은 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감정이나 충동이 빚어내는 욕망을 따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면 왜 그때 그러한 감정과 충동이 생겼는지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우리가 이렇게 욕망과 감정을 맑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세계와 나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의 욕망이나 감정이 우리를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