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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난 명예를 위해 산 사람이다." ???
게시물ID : sisa_7252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lpolloloco
추천 : 4
조회수 : 470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6/04/16 18:30:10
김종인이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1. 경제민주화를 추진했으며
2. 명예를 중시하고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경제전문가라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이런 피상적인 사실말고 
확실히 김종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주는 상세한 기사가 있으니 한 번 읽어보고 각자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http://sundayjournalusa.com/2016/03/24/%EC%B4%9D%EB%A0%A5%EC%B7%A8%EC%9E%AC%EB%AA%85%EC%98%88%EB%A5%BC-%EC%A4%91%EC%8B%9C%ED%95%9C%EB%8B%A4%EB%8A%94-%EA%B9%80%EC%A2%85%EC%9D%B8%EC%9D%98-%EB%BB%94%EB%BB%94%EC%8A%A4%EB%9F%B0-%EA%B3%BC/

기사내용 요약하면

1. 노태우때 금융실명제 반대하다가 김영삼으로 정권이 바뀌자 금융실명제 찬성.
일단 그는 김영삼 정부의 경제수석으로 일하면서 금융실명제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 노태우 정권에서는 금융실명제 도입을 반대하기도 했다.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바뀌자 정책에 대한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 것이다. 1990년 3월 17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당시 김종인 경제수석에 대해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 실명제 강력반대한 교수 출신’이란 설명을 달았다. 노태우 정권에서 실명제를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정권이 바뀌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김영삼 정권에서 실명제를 추진한 것이다.

2. 1991년 수서택지분양때 정부부처에 압력행사

1991년에는 수서택지 특혜분양이 문제될 당시 정부부처에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문제 삼지 말 것을 요구했다가 당시 신문들이 대서특필하였다. 1991년 2월 7일 한겨레 보도 ‘청와대 김종인 수석 선처 압력’ 기사의 일부분이다.

<국회 건설위의 한 관계자는 6일 “지난해 12월 건설위 청원심사소위가 ‘수서지구 주택조합 건설택지공급요청’에 관한 청원을 심의할 때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화를 걸어 잘 처리해주도록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건설위가 수서지구 주택조합의 청원을 지난해 12월 11일 청원심사 소위로부터 넘겨받아 전체회의에서 하루 만에 전격처리 했을 당시 일부 민자당 의원들이 원안대로 의결하는 데 대한 문제점을 거론하려 했으나 오용운 건설위원장이 회의에 앞선 간담회에서 “청와대 김종인 경제수석비서관이 선처를 당부해왔다”고 제지하는 바람에 문제점을 따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용운 건설위원장은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의 압력전화에 대해 부인했으나 건설위 관계자들은 청원심사 과정에서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기사내용대로라면 김 위원장이 당시 여당의원들의 비리를 덮기 위해 정부 부처에 전화를 건 셈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당장 김 위원장의 이런 행동은 그의 대항마로 새누리당에 영입된 강봉균 전 장관의 행보와 대조된다.
3. 신군부 국보위 참여로 강봉균과 대조적인 길을 걸어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을 피로 물들인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임시행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기구를 꾸렸다. 이때 경제기획원의 핵심보직인 예산정책과장을 맡고 있던 강봉균 전 의원도 합류를 지시받았다. 국보위에 발탁되는 것 자체가 출셋길이 보장된 터라 이를 마다할 관료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강 과장은 “사표를 내는 한이 있어도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차출을 거부할 경우 바로 공직을 떠나야 했지만 강 전 의원의 능력을 아까워한 기획원은 강 전 의원 대신 다른 인물을 보냈다. 그러나 공무원도 아닌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김종인 위원장은 국보위 재무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훈장까지 받았다. 이듬해 민정당 전국구를 시작으로 전국구를 연달아 두 번이나 지냈다. 강봉균 전 장관이 국보위 참여를 거부하는 사이 김 위원장이 이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 그 이후 승승장구를 한 셈이다. 김 위원장은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선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다시 국회에 입성하는 등 한 번도 어렵다는 비례대표를 정권을 넘나들면서 네 번이나 하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4. 1993년 동화은행에서 2억 1000만원 뇌물수수로 2년 복역
김종인은 1993년 당시 동화은행에서 2억 1000만원의 뇌물을 공여받은 혐의로 2년간 복역한 바 있다. 이에 대해 2011년 김 위원장에 한나라당 비대위원으로 영입되자 그 해 12월 28일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은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당시 한나라당 비대위원인 “뇌물죄는 증거 잡기 어려운데 확연한 증거가 있었고 당시에 재벌 개혁을 이야기하시면서 다 쓰러져가는 은행에서 2억 1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 낯 뜨거운 범죄라는 얘기가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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