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학계입장은 삼별초의 난을 외세에 대항한 장렬한 항쟁으로 묘사하고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삼별초가 어떻게 태어났고, 그 삼별초의 아버지인 무신정권이 어떻게 백성들을 버렸는지를 본다면
과연 삼별초의 저항이 외세에 저항한 민족적 항쟁인지는 매우 의문이 듭니다 ( 명분으로나 실익으로나 )
고려가 팍스 몽골리아에 가장 오래 저항하여서 다른 번국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은 인정할수 있으나 ( 그조차도 무신정권이 잘 싸워서 그런게 아니라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면서 그냥 버틴거죠 ), 그에 앞서 몽골을 막는게 가능할수도 있을만큼 강력했던 고려의 군사력(거란의 공세를 꺽고 동북9성을 개척했던)을 무너뜨린 무신정권의 사병이었으며 실제로 몽골에 대항한 전투보다는 농민봉기진압이 주 임무였던 사병집단의 반란이 민족적 항쟁으로 묘사될수 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12세기 초반 고려의 군사제도나 군사력은 1170년 무신란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고려 중기 이후로 군인전 軍人田의 침탈로 2군 6위의 경제 기반이 무너지면서 군사 제도는 와해될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인 집권 시대에 극도로 비대해진 사병 私兵 집단은 고려의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항간에는 “그 때에 용감한 자는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 門客 이 되었고 관군 官軍 은 모두 노약하고 지친 병졸이었다 ” 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 점은 고려가 년간의 몽골 전쟁기간 중 중앙군을 조직해 몽골에 대항한 것이 1231년 제1차 전쟁 단한차례였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강화도 천도의 단행은 최씨무신정권이 국가의 안위를 걱정해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무신집정자 최우(崔瑀)가 자신의 정권을 보존ㆍ유지코자 행한 조처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무신정권은 몽골과의 1차 전쟁에서 패배하자, 향후 대몽침략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강화도 천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는 가까운 섬이나 깊은 산 속으로 도망하라는 입보책(入保策)만을 제시한 채, 자신들은 강화도에서도 여전히 사치행각을 계속했다.
삼별초는 최씨정권에 충성하는 군대로서 그들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 기간장교직은 심복들을 임명함으로써 완전히 장악하였고, 직접 명령을 받는 이들도 기간장교로서 중·하급의 무신이었다.
그리고 삼별초는 독립적인 기구도 있었으며, 都領·指諭·校尉들이 통솔하였다. 대개의 경우 야별초의 직접 지휘는 야별초 지유가 맡고 있었다
최씨정권이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그 저항세력을 위와 같이 섬멸하였던 당시에는, 몽고가 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광분하고 있을 때이다.
이 같은 시기에, 최씨정권은 몽고병을 막고 무찌르기보다 오히려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더욱 주력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