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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나의 어린시절 영웅 그의 이야기....
게시물ID : humordata_1205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삼돌이
추천 : 11
조회수 : 104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4/05/04 00:4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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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디지털 이소룡'이 추억까지 되살릴까? 디지털로 다시 돌아오는 '이소룡'영화 '드래곤 워리어'로 추진 중 [조선일보 이동진 기자]30년 전 죽은 이소룡을 살려낸다고? 2년 전 영화사 신씨네가 액션스타 이소룡을 디지털 캐릭터로 되살리는 초대형 극영화 프로젝트 ‘드래곤 워리어’를 추진 중임이 알려졌을 때 영화계는 반색하면서도 성사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 영화의 특수효과를 담당할 할리우드의 일급 제작진이 최근 서울에 와서 기술 시연회를 가져, 이 프로젝트의 실현을 예고했다. 이소룡을 CG(컴퓨터 그래픽)으로 살려낼 특수효과 책임자는 호이트 예이트먼과 데이비드 제임스. “말 그대로 ‘이소룡의 부활’을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다. 미국과 일본, 한국의 투자자들로부터 1억달러의 제작비를 모아 2년 내 완성한 뒤 할리우드 배급망을 타게 될 이 액션영화는 이소룡 유족들로부터 제작권을 따낸 신씨네 신철 대표가 ‘주만지’의 윌리엄 타이틀러와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다. 디지털로 재현될 이소룡은 국제적 범죄조직에 맞서 싸우는 제임스 본드 같은 인물로, 다른 인물과 장면은 모두 실사(實寫). ‘반지의 제왕’ 중 골룸 같은 표현이다. 예이트먼은 ‘어비스’로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은 것을 포함, ‘E.T.’ ‘아마겟돈’ 등 80여편의 작품에 참여한 실력자다. 그는 “사람 얼굴을 생생히 살려내는 게 CG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인데, 퍼포먼스 캡처란 기술을 통해 제일 먼저 우리가 할 수 있게 될 것 같아 흥분된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소룡을 정말 그대로 살려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차츰 “결국 디지털 캐릭터가 배우를 대체할 날이 오지 않을까”란 의문으로 바뀌어갔다. ‘제5원소’ 등의 시각효과를 맡았던 제임스는 “가까운 시일 내 CG 캐릭터가 주연을 맡는 극영화가 많아질 것”이라면서도 “실제 배우를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가 CG의 도움으로 연령에서 성별까지 바꿀 수 있어서 오히려 연기 폭이 넓어질 거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다시 떠오른 것은 영화 ‘시몬’이었다. 거기서는 감독의 창작 자유를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디지털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결국 감독을 파멸로 몰아넣는 내용이었다. 정점에 이른 기술발달이 치밀한 마케팅과 결합해 탄생시킬 CG 배우들이 실제 스타들을 대체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은 싼 ‘출연료’로도 과감한 베드신에서 위험한 액션 스턴트까지 모두 소화해내지 않는가. 예이트먼은 “CG는 도구일 뿐”이라면서 “전자음악 발달로 완벽한 피아노 소리를 낼 수 있어도 사람들은 결국 실제 피아노 연주를 즐기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건 실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성장한 뒤 전자음악을 접하게 된 사람들의 취향이 아닐까. 애초 전자음악으로 시작한 다음 세대에도 과연 우리의 ‘취향’은 유전될까. 테크놀로지의 활용 여부는 결국 대중의 욕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정 기술이 가능하다고 모두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팩시밀리는 이미 1843년에 발명됐지만, 대중들이 그 기술을 구체적으로 원한 것은 그로부터 130여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미 타계한 추억의 스타 이소룡을 만나는 일에서 시작해, 아예 구체적 이미지와 육체를 가진 새로운 디지털 배우를 기다리게 될 현대인의 욕망은 어디를 향한 것일까. 기술 그 자체가 탄생 후 성장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이 기술들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술자들이 자신의 특정한 사명에 종사하고 있는 동안, 역사는 그들이 발 디디고 있는 지반을 끌고가 버린다.”(오르테가 이 가세트) (이동진기자 [email protected] ) 이소룡의 실전경력 1958 이소룡 vs. 게리 에름스(당시 3년연속 복싱 챔피언)전 1라운드 승 1958 or 1959 이소룡 vs. 청(홍콩의 유명한 복서)전 2라운드 승 1960 - Seattle: 걷던 중 중국여인을 희롱하던 남자의 코뼈를 부서버리다. 이 격투는 제임스 데밀이 목격했다. 1960 or 1961: 이소룡 vs. 우에치(일본 가라데선수. 씨애틀에서 도장을 운영했다)전 10초에 승 63년 여름 - 홍콩 저녁산책을 하던 중 그에게 시비를 걸던 깡패와 그의 친구를 낮은 무릎차기로 격파. 이소룡은 홍콩의 복싱대회에서 3년 연속으로 우승했던 영국인챔피언 게일을 1라운드에 링아웃 시킨적이 있습니다. 고등학생일 당시 홍콩의 유명한 프로복서 챵을 역시 1라운드에 KO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력보다도 더 살벌한 것은 미국에서 생활할 당시의 무술계 거물들과의 스파링입니다. 공식적인 대회에서의 시합이 아닌 개인적인 스파링이었지만, 이소룡과 스파링을 가졌던 사람들은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척 노리스와의 스파링은 정말 대단한 것으로, 척 노리스는 전미 가라데 대회에서 그랜드 챔피언(그랜드 챔피언이란, 각 체급별로 우승자를 뽑은 다음 다시 이 체급별 우승자들끼리 대전하는 이른바 '체급무제한 최강자선발전'입니다)을 지낸 전설적인 인물입니다만, 이소룡과의 스파링에서는 도무지 상대가 되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소룡은 당시 전미 가라데계의 최강이라는 것이겠지요. 저명한 무술잡지 블랙벨트의 한 기자도, 당시 전미 가라데계를 통털어 이소룡 이상의 강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타류시합으로 많은 권법가들과 겨뤘는데 거의가 10초내에 쓰러뜨렸다고 합니다.(이소룡이 말하길, 실전은 6초안에 끝내야 한다라고 했답니다.) 가라데 선수를 11초만에 KO시켰고, 중국 무술계에서 이소룡을 응징하기위해 보낸 백학권사를 30초만에 결단냈습니다. 이 밑의 것들은 전부 글러브를 착용하고 룰에 따라 겨루는 것이 아닌, 순수한 '실전'입니다. 시합/ 스파링/ 실전을 통털어, 이소룡이 고전했던 적은 없습니다. 전부다 일방적인 승리였지요. 영화 '드래곤'에서는 백학권사와의 대결이 마치 막상막하 극적인 두 번의 승부로 그려졌습니다만, 실제는 간단하게 때려눕혔습니다. (그래도 이소룡의 격투중 가장 긴 시간-30초-이 소요되었지요. 보통은 일격에 때려눕혔습니다) 극진가라데 창시자 최배달과의일화 최영의는 말할 필요없이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각종 격파술과 ,황소를 쓰러트린일, 100전 100승의 전적. 이소룡이 홍콩에 있을 때 그는 불량소년패거리의 리더였다. 그는 거의 매일을 최영의처럼 싸움과 격투로 보냈다. 고교시절땐 권투챔피언도 했으며 영춘권엔 입문한후엔 각종 쿵푸의 타류시합에 출전하여 모두 이겼다. 그의 수첩을 살펴보면 싸운 상대와 그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있다. 대개 싸움은 5-10초 사이였고 이소룡의 전승이었다. 이 당시 이소룡은 성격이 상당히 난폭하고 사나웠던 모양이다. 결국 이러한 생활이 화를 불러 홍콩에서 머물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미국으로 용돈 조금을 쥐어주어 쫓아보낸다 이 후 무술인과 영화인으로 성공하는데 그의 주위에는 당시의 세계일류 의 무술가들이 모여있었다. 전미 가라테 7년연속 챔피언인 척노리스, 장법과 곤술의 대가 이노산토, 미국태권도의대부 이준구, 가라테 챔피언 밥 월, 세계 최초의 킥복싱,가라테 이종 격투기 대회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 그런데 이러한 챔피언들 조차도 스스로 자신이 이소룡보다 한 수 아래라고 인정하였다. 특히 요즘의 UFC나 K-1에 해당하는 킥복싱,카라테 이종대회 챔피언인 조 루이스 조차도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정말 뛰어난 파이터라고 극찬했다. 또 미국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면 세계적인 액션 스타들인 장 끄로드 반담,척 노리스, 스티븐 시걸 등을 이소룡보다 두수는 아래로 평가하고 있다.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미국인들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반담은 보디빌딩과 킥복싱 세계챔피언 출신이고 척 노리스는 설명이 필요없는 강자이고 스티븐 시걸은 세계최강의 고수들만 모였다는 미국 대통령 경호단의 일급 경호원이엇다 그는 일본 아키이도와 각종 동양무술에 능통한 고수이며 특수부대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1964년 미국 LA의 롱비취 가라테 토너멘트에서 절권도의 모범연무를 펼쳤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 가라테인들과 약식으로 대결을 하였다. 그 때 이소룡의 주먹이 워낙 빨라 아무도 그의 주먹을 막아내지 못했고 나중엔 지원자가 없어 그만두었다. 여기엔 세계대회였기 때문에 동,서양의 가라테고수들이 다 있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챔피언 조차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또 그는 절권도를 발표한 뒤 각종 무술과 우호적인 시합을 가진적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미국과 유럽출신의 권투 챔프와 대결한 것이다 이 이벤트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소룡이 좋은 결과를 이끌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상을 보면 이소룡의 전적이 결코 최영의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최영의의 전적도 상당수는 뚜렷한 증인이 없는 것들이며 상대들도 대개 무명이 많앗다. 물론 톰 라이스나 복서와의 대결은 유명하지만 이름모를 오지의 무술가들도 많은탓에 그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무명이라하여 약한 것은 아니겠으나 어느정도인지 객 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브르스 리와 최배달 그들의 진실. 이소룡과 최배달 이소룡과 최배달의 대결에 관심이 많지만 그들의 대결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 최배달은 젊어서부터 강자들을 찾아다니며 유무명의 강자들과 싸워 이겼다. 특히 그의 제자들이 어디서 맞거나 지고 오면 어김없이 그가 나서서 실력행사를 하던 그였다. 소림무술인들이 그의 제자들을 묵사발을 만들어놓자 당장 가서 그들과 대결했고 제자들이 야쿠자와 관련되자 거기에도 나서던 그였다.그런데 제자들이 이소룡에게 당하고 돌아왔을때는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렇다. 이소룡이 절권도를 발표하면서 "가라테는 운동장에서 수영배우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가라테맨들이 떼로 이소룡을 찾아가 둘러쌌다 거기엔 모두 전,현직 일본챔피언 또는 세계 피언들이었다. 일본에는 가라테문파가 많지만 주로 시합을 휩쓸었던 것은 전통의 강호인 송도관과 실전파 극진가라테가 가장 유력했다. 60년대 미국에서 동양무술의 마스터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자기네 스승인 최영의가 70년대 이소룡의 등장으로 한풀 기세가 꺾이자 불만을 품었던 최영의 제자들도 거기엔 있었는데 그 중 몇 명이 이소룡에게 덤벼들었다.이소룡이 특유의 괴조음을 내며 챔피언 몇 명을 순식간에 제압하자 기세등등하던 가라테맨들이 놀라서 그냥 물러나고 말았다 이 후 이소룡은 무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사건에서 괴조음의 아이디어를 얻어 정무문에서 활용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고한다. 어쨌든 이소룡의 등장으로 당시 세계무술계를 휩쓸고 주도했던 가라테인들은 매우 심기가 불편하던터에 이소룡의 심한 비난은 가라테인들에게 싸울 명분을 주었던 것이다. 극진가라테의 최영의 직계인 수제자들도 이소룡과 대결하고 올테니 허락해달라고 최관장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영의관장이 묵묵부답으로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던 터에 가라테인들이 몰려가는 기회에 참가했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왔다. 후에 이일을 알게된 최관장이 불러 물으니 "이소룡의 공격이 너무 날카롭고 위협적이어서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라고 얘기했고 최관장은 아무 얘기도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최배달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최배달은 40세이후 무리한 격투로 인한 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만했다. 각종 관절염과 신경통, 특히 무릎에 중상을 입었다. 특히 황소와 겨룬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또 젊을때는 단지 최강이 되겠다는 젊은 혈기하나로 밀어부쳤던 배달이지만 나이가 들고 자신의 명성과 명예가 쌓여가자 그 역시 주변의 시선과 평가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충분한 명성을 쌓았고 정점에 다다랐다.그런데 이제 다시 젊고 유능한 파이터와 승부하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 이다 당연한 일이다. 탑은 쌓아올리는데는 수십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힘이센 숫사자들끼리는 상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싸워봤자 아무 득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싸우게 된다면 "어부지리"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서로 상처입어 결국 다른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할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최영의의 이소룡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 최영의는 이소룡을 오버액션하는 액션배우로 밖에 보지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라고 일축햇다. 그러나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질문을 했을 때 최영의는 이소룡을 뛰어난 파이터로 인정하고 "싸워봐야 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소룡이 가라테를 비롯한 동양무술을 전파시키고 세계적으로 유행시키는데 이소룡이 1등 공신 이라고 평가햇다 최초 이종격투기 챔피언이 혀를 두를 정도 였다. 가라데 챔피언들도 여러 명이서 마구잡이로 덤볐는데 깨졌다. 한마디로 이소룡이 가지고 논다는 겁니다. 가지고 논다는 건 표현일 뿐입니다. 이소룡은 지나가는 3살박이도 정통으로 상대해주니 크로캅 파이터 기록상으로 볼때 이소룡 이긴다는 것은 좀 무리입니다. 체급으로 실력따지는 분들도 여러분 계시는걸로 알고있습니다만 이소룡을 아는사람은 다알듯이 자기보다 체급 높은사람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룡이 대부분 이겼죠. 참고로 말하건데 이소룡식 파이터 방식은 빠르게 급소에 정통파를 갈기는 방식입니다. 현재의 이종 격투기라는 것이 많이 간소화되고 스포츠화 되다 보니 실전용 격투기에서 멀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싱대회의 경력은 뭐 모두 다아시는 걸테고, 이소룡과 척노리스와의 스파링은 척 노리스 자신도 직접 말했고, 이소룡의 부인 린다 리가 쓴 "BRUCE LEE STORY"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이소룡의 전설"에도 나와있습니다. 실전 격투경력은 미국/ 영국/ 일본등지의 절권도 싸이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에 적어둔 것은 여러 기사들과 외국 싸이트의 글, 책에 적힌 것들을 비교 분석하여 신빙성 있고 검증된 것만을 적은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현재의 격투기 경기들은 너무 스포츠화 되어서 실전에선 점점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20~30년전의 이소룡식 맨손격투방식보다 점점 퇴화 된다는게 현재 이종격투기의 현실입니다. <출처 : 야후 시네마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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