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레임
프레임은 결국 생각의 울타리, 경계선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고 방식이나 논리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고,
우리가 가진 사고 방식이나 사용하는 논리 구조의 사용 범위 그 자체를 한정짓는 그 어떤 것을 말하지요.(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레이코프의 책제목이자 인셉션의 대사로도 잘 알려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프레임은
결국 '어떻게 하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우리의 사고를 가두어 버림으로써 결국 코끼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러시아가 공산당 시절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의 문장은,
결국 '경제'와 '공산당 시절'에 대한 생각의 경계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써 클린턴과 옐친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요.
물론 언론을 장악했거나, 혹은 장악한 효과를 낼 수 있거나, 여론 조사를 끝없이 해댈 수 있는 금전과 자유가 허락되는 경우에 그러합니다.
2. 진박
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이 총선을 바라보는 가장 주된 프레임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권 심판? 경제? 안철수? 영남과 호남? TK와 PK? 신공항? 분열? 연대?
저는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바라본 대한민국 국민들의 공통된 기준점이자 프레임은 '진박'이었습니다.
즉 공천문제였다는 이야기이죠.
온갖 언론에서 떠들어댄 것도 '진박'이었고, 가장 시끄러웠던 것도 '진박'이었습니다.
어느 선거가 공천 문제로 시끄럽지 않았겠습니까만은, 역대 총선 중 가장 무난하고 조용했던 공천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진박 이 한마디 때문에 가장 중요한 투표의 기준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사실은 이 프레임을 만든 당사자가 박근혜와 새누리당이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들은 긍정적인 효과를 원했겠습니다만.
'진박' 이 한 마디는 이한구의 숱한 똥볼과 유승민 사태, 그리고 옥새투쟁과 얽히며
결국 한없이 추락하는 경제에 대한 반성이 없는 새누리와 박근혜의 '오만'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언론에서 '진박'을 내뱉을 때마다 사람들은 더더욱 그것을 새누리와 박근혜의 '오만함'에 대한 심판 근거로 삼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쫑걸리가 아무리 '친노패권'을 입에 올리면서 지 얼굴에 똥칠하는 푼수짓을 해도, '진박'은 못 이기더군요.
야당 심판을 내세운 새누리는 친노패권이 언급되는 것을 간절히 원했겠지만,
자기들이 결국 진박을 두고 옥새투쟁까지 벌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다행히도 이 '진박'이라는 단어는 새누리가 공천과정에 보여준 오만을 떠올리게끔 만들었고,
그 결과는 더민주 비대위와 김종인의 숱한 똥볼에도 불구하고 새누리의 참패로 이어졌습니다.
더민주의 경제 프레임은 솔직히 작동조차 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부동층에겐 이슈가 되지 못했어요.
옥새투쟁을 보고 학을 뗀 새누리 지지자들이 투표를 접고,
헬조선에 대한 위기감으로 20대가 대거 투표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더민주 수도권 승리의 주요인이라고 봐야겠죠.
3. 호남홀대
한편 전국적 상황과는 다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호남에서는 어땠을까요?
호남에서 작동한 프레임은 '홀대'입니다.(호남홀대론)
호남을 홀대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이 호남에 팽배해 있었던 것은 누구나 아는 주지의 사실이죠.
참여정부와 문재인이 호남을 홀대했느냐 아니냐 그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논의하는 것 자체가 '홀대'라는 프레임에 들어가는 것이고,
호남으로선 그들이 홀대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일 뿐이니까요.
반문도, 버르장머리도, 김종인 국보위도 셀프공천도, 호남에의 약체 전략 공천도,
결국 호남을 홀대하느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점으로 작용했을 뿐입니다.
호남이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호남 멸시 발언, 즉 호남을 차별하는 발언입니다.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은 민주화 멸시 발언이지요.
공통점은 '멸시'이고, 좀 좋은 말로 순화한 것이 '차별'이겠네요.
이 두 가지를 한 방에 충족시키며 더민주를 호남으로부터 분리하고 호남을 궁물로 이동시킬 프레임이 바로 호남홀대론이었던 것이죠.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좋은 수였다고 봅니다.
비대위와 김종인의 똥볼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너무 자주 이야기해서 제 스스로도 피로해질 지경입니다.
이들은 대놓고 호남을 찬밥 취급했습니다. 호남이 궁물로 마음을 줄까 말까 망설이며 더민주를 관찰하고 있던 찰나,
'국보위 출신의 셀프공천' 이 어구 하나가 호남을 궁물로 확 기울게 만들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민주화 멸시와 호남 멸시를 한 방에 달성한 놀라운 사건이었죠.
김종인 위원장이 실제로 잘못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건 이후의 대응이 결국 호남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니까요.
거기다 김종인은 이후 행보에서도 오만한 모습을 감추지 않습니다. 당을 대표하는 자의 움직임은 굉장히 상징적인 겁니다.
한 자연인의 일탈이나 실수로 보기는 힘든 것이죠.
김종인의 똥볼 이후 무수습으로 호남은 급격히, 말 그대로 급격히 궁물로 이탈, 자리를 확고히 합니다.
반면 문재인은 겸허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난 결코 당신들을 홀대하지 않는다, 내 정계은퇴여부를 당신들에게 맡길 정도로 당신들을 존중한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홀대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음을 정확히 캐치해낸 것이고 적절하게 행동한 것이죠.
좀 더 일찍, 자주 갔으면 김종인의 똥볼을 문재인이 커버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비대위와 김종인이, 특히 김종인이 문재인의 호남 방문을 극구 저지한 탓인지 문재인의 호남 방문은 너무 늦었습니다.
제가 김종인이 프레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김종인이 잘 하는 것은 '이슈화'입니다. 즉 논란을 잘 만들 뿐이죠.
결코 프레임을 잘 만들어 내거나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종인은 매우, 매우 수가 얕고 낮은 양반입니다.
다만 그만큼 신념이 확고하고 심플하여 이해하기 쉬운 터라,
그의 신념에 대해 대중이 신뢰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장점도 있는 사람이죠.
호남 전체를 내어 주고도 107석 발언을 기준에 둔 채 자신의 공을 먼저 앞세우는 오만함은,
어쩌면 그의 단순한 성격에서 발로된 유치함에 다름아닐지도 모릅니다.
4. 전당대회. 친노에서 친문으로.
프레임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이죠.
친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승패를 겨뤄야 하는 상황에서 전장을 지배할 수 있는 프레임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친노는 현재 패권, 강성, 싸움, 운동권, 막말 등을 떠올리게 하는 프레임입니다.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고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존재합니다.
어떻게든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가는 길이죠.
대통령이, 즉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업적, 비전, 이미지 등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이 중 업적과 비전은 상대와 견주어 앞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지는 그렇지 않죠. 견주어 평가하는 항목이 아니라, 보는 순간 호와 불호를 가르는 것이 바로 이미지입니다.
친노라는 수식어가 붙는 한,
그늘과 2인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패권과 강성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세력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일을 맡기면 자기 사람을 시켜 일을 제대로 해낼 거라는 이미지를 주지 못합니다.
거기다 젠틀하고 인자한 문재인의 이미지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묘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코 플러스 요인이 되지 못하죠.
따라서 노무현을 뛰어넘어, 문재인이라는 사람만이 가지는 고유의 정체성과 독자세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친노라는 말을 폐기하고 친문으로 대표되는 상징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친노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움과 젠틀함, 그리고 일을 맡기면 제대로 해낸다는 인상을 줄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워,
'친문'이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구축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번 전당대회는 그런 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PK 8석은 분명한 문재인의 업적입니다. 김종인이 자꾸 옆에서 얼쩡거리면 문재인의 업적이 계속 김종인으로 희석됩니다.
따라서 최대한 빨리 김종인을 감추고,
문재인의 업적을 강조할 PK 8인 중 일부, 그리고 문재인이 직접 영입한 새로운 피 중에서 자기 할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을
전면에 내세워 주목받게 해야 합니다.
또한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도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당내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작업을 꼼꼼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당대표로 선출되어야 합니다.
복당원서 제출한 그 분, 그리고 다섯 살 어린아이를 집에서 잘 쉴 수 있도록 한 그 분 등이 무난하겠지요.
친노를 넘어 친문으로 가는 길을 닦아줄 당대표를 뽑아야 결국 종편과 새누리, 그리고 궁물의 견제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며 새로운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문재인이 당당하게 대통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